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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약의 갱신 / 창 17: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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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언약의 갱신 
본  문 : 창세기 17:1-27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부터 수지맞은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흥미진진한 생애가 펼쳐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그전에 살던 고향 땅 갈대아 우르에서 계속 살았어도...
그냥 그저 밥 먹고.. 돈 벌고... 재미있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살았으면 그는... 그저...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위하여만 사는..
그런 존재였을 뿐이었을 것이고.... 좀더 크게 산다면 인류를 위하여 사는..
그러한 정도의 존재로 살았을 것이지만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부터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화는 75세를 깃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세기 12:1-3)

아브라함은 이 엄청난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언약의 말씀을 따라..
그동안 살아왔던 정든 고향 땅.. 본토를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을 향하여 정처없이 나아갔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그 땅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당장 큰 민족도 이루게 되고...
당장 이름도 창대케 될 뿐만 아니라...
당장 자기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어....
땅의 모든 족속이 자신을 통하여 복을 얻게된다는 기대 속에... 흥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그러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새로운 복을 주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를 포기하라고 하시는 구나.....
내가 이 땅에서 살면서 집착하며 믿고 사는 땅과... 재물과... 사람...
이 세 가지를 다 떠나.... 완전히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야....."

아브라함과 사라는 10여년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이 위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곧 그를 이끄시며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훈련의 손길이었습니다.

고향 땅... 하란 땅.. 애굽 땅... 등 기름 진 땅.... 가치있는 땅을 포기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애써 모으고 모은 재물을 포기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어려웠던 것은 사람에 대한 훈련이었습니다.
사람을 포기하라... 사람에 집착하지 말라.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혹독하리만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그 훈련을 잘 통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과 사라는 다메섹 출신 에리에셀을 아들로 입양하려던 계획도 취소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아들을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점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언약의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횃불언약의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음이 좋은 아브라함에게도 시험이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아내를 통한 시험이었습니다.

"여보, 아무래도 안되겠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후사를 주신다고는 하였지만.. 세월은 자꾸 흘러만 가고...
난 자꾸 나이만 먹어가고 있지 않소? 이제 제 나이 75세요.
이제 내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 이렇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며... 하나님을 도와 드립시다.
당신이.. 나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아기를 가지구려...
그러면 그 아이도 당신의 몸에서 난 아이니까.. 
당신의 몸에서 난 후사라고 생각되는구려..." 

아브라함은 아내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라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아기를 이내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예정대로 아기는 출생하였고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지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아기하나만 없는 것이지.. 나머지 부분에서는 남부러울게 없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였을 때...
사실 맨주먹 쥐고.. 그 말씀을 따라 정처없이 떠났지만...
이제 그의 재산은 엄청나게 불어 있었습니다.
그를 돕는 하인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부족한 것은... 단 한 가지!...
아기만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풍족한 삶 가운데서도 허전함이 있었습니다.
그가 죽으면 이 많은 재산을 누구에게 상속하고 죽나... 이것이 고민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방법 쓰지말고 좀 더 기다려!
다메섹 출신 엘리에셀을 양자로 입양하여 자식 삼는 것은 안돼!
그리고 틀림없이.. 양자... 그런 방법 말고 틀림없이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손이 될 것이야.."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세월만 가는 달력을 쳐다보며...아브라함과 사라가 드디어 연구해 낸 것은
몸종 하갈을 통한 자식 얻기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이 생각을 하고서는 휘파람을 불었을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진작 우리가 이 생각을 못했지?
이러한 방법도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 얻은 자식이 분명한데 말야!!"

그리고 나서 그들은 꼭 1년 후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었습니다.
물론 아들이 생긴 이후에 아브라함과 사라
즉 남편과 아내 사이에..
아기를 가진 하갈 때문에... 부부싸움도 잦아졌지만..
아브라함은 아들이 생긴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86세 된 노인이 아들을 이제 겨우 하나 얻게 되었으니....
그 기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노년에 얻은 이 아들 이스마엘을 보면서
제법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아내를 통하여 아들을 얻는다는 것은
완전히 체념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도 게을리 했을 것입니다.

물론 전혀 안하지는 않았겠지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기보다는....
아들 이스마엘을 보며 사는 기쁨이 더 컷을 것이란 점입니다.

이렇게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창세기 16장 마지막절과 17장 1절과의 사이에
약 13년의 세월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늦동이 이스마엘과 알콩달콩하게 사는 약 13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기다리다 못한 하나님께서 드디어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창 17:1-2)

아브라함은 놀랐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이 놀란 것은..하나님이 나타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것은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그러한 지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때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4-8)

하나님께서는 방학 중에 있는 아브라함을 다시 찾아 오셔서 이름을 새롭게 갈아주시면서
두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는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 언약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자, 이제 아주 중요한 부분에 도달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는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계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고
또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계를 가진 인간이 그리고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있는 말입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다.
인간은 유한합니다.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죄도 없으십니다.
그리고 전능하십니다.

그러므로 유한하고 죄인된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살며
그가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살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며
그의 보호하심 속에서 살면.... 하나님 때문에!! 완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늦동이 이스마엘을 얻고 기뻐하며 살면서도
자기 아내는 이제 나이가 너무 들었기 때문에 절대로 아기를 낳을 수 없다고 체념하면서...
물론 하나님은 아기를 주신다고는 하셨지만...
그의 전능하심을 온전히 믿지못하고 사는데서 부터!!...
이제라도 정신차리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다시금 일어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깨닫기 시작합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믿음으로 달려는 왔지만... 지금 엉뚱한 것을 보면서 시간만 보내고 있구나..
이러면 안되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본문 9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이미 주셨던 그 언약의 말씀을 좀더 구체적으로 또
현상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언약을 갱신하였습니다.

여기서 양피라고 하는 것은 양의 피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말로서 남자의 생식기 껍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양피를 벤다는 것은 
오늘날의 포경 수술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왜 하나님은 언약의 표시로서 이런 특이한 행위를 요구하셨으며
특히 언약의 표시를 머리 위에나... 얼굴에나 팔뚝에 하지 않으시고...
남자의 그 은밀한 곳에다 하게 하셨을까 하는 점을 고찰해보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에 대한 학설들은 몇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이 언약이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후손 대대로 미칠 언약이므로
생육의 수단인 남자의 생식기에 하게 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태어날 때는
부모와 자식들 모두가 다 그 자손이 언약으로 말미암아 태어났고
또한 그들에게도 이 언약이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왕에 언약의 자손들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세울 바에는
그들의 건강에도 유익하도록 할례를 택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셋째는 신체 중에서 가장 은밀한 곳이니까
그곳에 언약의 표징을 두어 혼자서만 보도록 하셨다는 주장입니다.

넷째는 좀 특별한 주장으로서... 자랑치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만약 팔뚝이나 이마에 어떤 표시를 하게 했다면
그 언약의 표시를 매일 자랑하고 다닐 것이기 때문에
남자의 신체 중... 가장 드러내기 부끄러운 그 부분에 하도록 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설명... 모두가 다 그럴듯해 보이는 주장들이라 생각은 됩니다만!!
정확한 것은 주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하셨는가... 보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이 새롭게 말씀하신 언약의 갱신으로서의 할례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할례란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세운 언약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었다는 하나의 표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할례가 보편화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선택받았다는 믿음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만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할례는 그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
즉 하나님으로 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오늘 우리들에게있어서 이러한 구분의 표징은 무엇입니까?
선택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자의 구분으로서의 표징 말입니다.

물론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의 할례는 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약 표징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며 또 성령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어떤 사람이 선택받은 사람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서의 표징은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
그의 마음 속에 주님을 모신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며
그것이 할례의 기준이 된다고 보겠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할례란 대대손손 각자가 행해야할 중요한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아버지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아들도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각자가 각각 다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아버지가 믿는 것은 아버지가 믿는 것이고..
아들이 믿는 것은 아들이 믿는 것이기 때문에...
할례는 각자가 각각 자기 몸에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몸에 할례의 흔적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과 그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이 할례의 의식에서 하나님의 넓고 깊은 사랑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 12-14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언약 속으로 들어오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자기의 양피를 벨 뿐만 아니라
그 후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그 약속이.. 그 언약이.. 그 축복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언약의 특권을 이방인들에게는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종들이나 노예들도 할례를 받게 되면 결국 자신들과 그들의 구분이 없어지게 되고
같아지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셨고
다만 이스라엘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할례를 행하지 않는 사람만 다 죽이라 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 언약의 갱신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도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므로
다 지옥의 땔감으로서 버리운 자가 되었었겠지만...
하나님의 넓고 크신 사랑 때문에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저는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로 갱신된 언약이 어떻게 시행되었는가를 함께 살펴보고
설교를 매듭지으려고 합니다.

본문 23절 이하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에서 남자를 데려다가 양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99세이었고
그 아들 이스마엘이 그 양피를 벤 때는 13세이었더라
당일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생장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이 말씀은 곧 갱신된 언약이 아브라함과 그 가족 모두에게 미치는 광경을 보여 주고 있으며
동시에 이방인에게도 믿음으로 할례를 받는 광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이 살고 죽는 구약의 할례가
신약에 와서는 세례로 그 의미가 전이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골로새서 2:11을 보면 할례가 신약의 세례로 전이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 앞에서..
베풀어 주신 갱신한 언약을 믿고...
신약에서 새롭게 제정된 세례를 받아....
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과 축복을 누리며 사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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