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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으로 자신을 깨끗케 하라 / 요일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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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소망으로 자신을 깨끗케 하라
본문 : 요한1서 3:1-4 

조지 갤럽은 사후의 세계를 체험한 사람들과의 인터뷰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사후의 세계」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사후의 세계를 체험한 경험이 그 후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설명하였습니다. 중요한 점은 사후의 세계를 체험하고 현실세계로 돌아온 사람들 대부분이 인생의 자세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즉 보다 적극적이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갤럽이 책에서 지적한 첫째 변화는 신앙심이 깊어졌다는 것입니다. 사후의 세계를 체험했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신앙심이 훨씬 더 깊어졌다고 대답했습니다. 교통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한 남자는 "지금 나는 신이 항상 나와 같이 계시다는 것, 즉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신은 우리 주위에 어디에나 계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둘째 변화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없어지고 인생은 더욱 훌륭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여성은 심장발작으로 인하여 사후의 세계를 체험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오직 나는 언젠가는 주님과 또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천국에서 같이 있을 수 있도록 지금의 세계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셋째 변화는 모든 것, 모든 사람에 대하여 사랑과 정이 넘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후의 세계를 체험하고 더욱 겸손해지고, 남에게 인정을 베풀고, 더욱 관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넷째 변화는 쓸데없는 근심, 지나친 걱정이 사라진 것입니다. 사후의 세계를 체험하고 나서 물질이나 명예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적인 것들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상당히 초연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별의 쓸쓸함과 슬픔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여성은 생사의 고비를 넘기는 체험을 통하여 사후의 세계를 맛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이라면 가족과 친구를 모두 보내도 쓸쓸함과 슬픔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후의 세계를 체험하고 현실로 돌아온 사람들에게는 그 생활태도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장래의 소망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소망으로 인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자녀들은 천국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영생을 누릴 것이며, 그 소망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 소망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을 깨끗하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관점에서 봉독한 본문 요한1서 3장 1-4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소망으로 자신을 깨끗게 하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우리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믿습니까?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 자신 있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는 부족한 형편이지만 그래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점은 의심하지 말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은 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의견으로 보나 윤리적으로 보나 너무 형편없는 사람들이지만 분명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였습니다. 우리의 공로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1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였습니다. "보라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리하도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늘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3:16). 하나님은 우리를 구워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사랑은 없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요한15:3). 사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최고의 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신앙인으로서 과학자였던 영국의 미카엘 패러디는 임종시에 기자들이 찾아와서 "당신의 영혼이 장차 어떻게 되리라고 추측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하기를 "추측이라고요, 나는 추측으로 살지 않습니다. 나는 확신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신앙으로서 구원의 확신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장례식에서 찬송을 부릅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들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불교인이나 천주교인들처럼 계속해서 명복을 빌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명복이라는 단어를 쓰지도 않습니다. 모르고 쓰신 분들도 이제는 쓰지 마십시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명복을 빌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받음에 있어서 공로를 강조하는 천주교인들은 더 많은 공로를 위하여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빌어 줍니다. 해탈을 위하여 득도를 강조하는 불교에서도 명복을 빌어 줍니다. 여기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장례가 다소 소홀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는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 차이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도의 소망

그런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장래에 기업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직 분명하게 보지는 못하지만 언젠가는 확실하게 볼 천국의 소망이 있습니다. 2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십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할렐루야.

사도 바울은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하였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라고 하였습니다(롬8:17).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양자들에게도 친아들처럼 대우하시며 천국의 기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천국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잘 몰랐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국의 영광이 어마어마합니다. 요한은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며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읽으며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곳이 성도들이 물려받을 기업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천국의 맛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변화되시어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하늘로서 내려와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광경을 보며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기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태17:4). 아멘. 이것은 정신나간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이것이 성도가 누릴 소망입니다.

지금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장차 우리가 하나님이 나라에서 변화될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과 같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그의 육체를 보여주신 것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은 있으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한 몸은 하늘로 들리어 올라갔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누릴 소망입니다.

천국의 소망으로 오늘을 살라

그러므로 성도들은 소망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살 것입니다. 성도들은 소망 없는 사람들처럼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소망 가운데 하루 하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망은 천국만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소망을 본 사람은 그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천국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세상 도피적인 종말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세상에서의 삶을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의 날에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을 믿는 성도들은 주님께서 깨끗하셨던 것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것이 부족합니다. 많은 성도가 주님처럼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주님처럼 깨끗해지기를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소망에 따라 삶을 바르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그리고 소망 중에 환난과 핍박을 이겨낸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소망의 인내"를 칭찬하였습니다. 소망이 소망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성도들의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도 이에 걸맞은 열매를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천국의 소망을 이야기하면서도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사는 모습은 천국의 소망도 부활도 믿지 않고 세상만 바라보고 살던 사두개인들과 비슷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오직 세상만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잘먹고 잘 살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천국의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처럼 세상만 바라보고 살면 안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교훈도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한 부자가 농사를 지어 많은 소출을 얻었습니다. 부자는 매우 기뻐하면서 창고를 지어 곡식을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생 즐기면서 살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계획을 세운 부자에게 "내가 오늘 너를 부르면 이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부자가 농사를 열심히 지어 많은 소출을 얻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 세상 준비만 했지 천국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소유의 목적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즐기겠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삶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석교가족 여러분들이여! 우리 성도의 소망으로 오늘의 삶을 바르게 삽시다. 우리는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기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땅에 소망을 둔 사람들하고 똑같이 살면 안됩니다. 성도는 목표를 세워도 고상한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천국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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