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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믿음 - 순례자의 삶 / 히 1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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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브리서 11장 8-10절
제목 : 아브라함의 믿음 - 순례자의 삶 


당신은 무슨 비젼을 갖고 살아가십니까? 당신은 무엇에서 위로를 받으며 험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오늘의 본문은 성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이라는 유명한 책을 쓰도록 영감을 준 본문입니다. 이 땅을 순례자로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을 위한 소망과 비젼이 "하나님의 도성"임을 밝혀 주지요?

교회는 오랜 전통으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최초의 믿음의 사람이었다거나 혹은 믿음이 가장 쎈, 강한 사람이었다라는 의미보다도 믿음의 모본, 믿음의 전형이라는 의미가 더 많습니다. 예컨대 노아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믿음의 사람이었고 또 아브라함의 믿음이 제일 쎄다 이것도 아닙니다. 누가 믿음이 가장 쎄냐 이것은 우리 사람이 쉽게 분별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리고 천국가면 그런 관심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마치 "누가 크냐"는 제자들의 관심에 예수님께서는 "애고 이 철부지들"하고 한심해 하셨던 것처럼.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시대, 그가 어느 지역의 사람이나 본받을 수 있는 믿음의 원리들을 잘 보여 주는 믿음의 모본,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의 믿음의 삶의 전기가 된 이 말씀 속에서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지는 믿음의 원리들을 배우고자 합니다. 두 가지 믿음의 원리를 이 짧은 말씀의 속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로, 믿음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고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입니다<8절>.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시작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은혜로 얻는 구원을 강조하다보니 영생을 선물로 비유하여 마치 천국행 티켓을 예매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혼돈하고 착각하는데, 신앙을 갖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고 영생은 그 은혜의 선물로서 결과적으로 누려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본질은 "내가 영생을 얻었느냐?"가 아니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느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시작은 하나님의 부르심에서부터입니다. 흔히들 부르심, 소명하면 목사가 되는 소명, 선교사가 되는 소명을 생각하는데, 잘못된 개념입니다. 성경에서의 부르심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부르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르심. 단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시작,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창11:27-12:3>까지를 보십시오. (읽고)

아브라함의 아버지의 이름은 데라입니다. 데라라는 이름의 뜻에는 '지체하다', 연기하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흥미롭지요. 아버지 슬하에 있는 동안,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꿈은 지체되고 연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데라가 자가 아들 아브람, 며느리 사래, 조카 롯을 데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하란이라는 곳에서 머물다가 거기에서 죽고 맙니다.

하란에 오기까지, 아브람을 중심으로 보면, 아브람은 삶을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그냥 아버지 따라다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를 따라 별 생각없이 본토 친척들의 관습을 따라 사는 삶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편리한 삶입니다.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삶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편리한 것이 아무 생각없이 다른 사람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미련한 것이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호막인 양 아버지 슬하에서 아버지의 결정과 선택을 따라다녔었건만, 이제 하란에서 아브라함은 홀로 서야 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하란이라는 지명의 뜻이 흥미롭습니다. 영어로 cross road, 네 거리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삶을 이끌어왔던 아버지가 죽고 이제 하란, 네 거리에서 서서 어디로 갸야할지, 이리갈까 저리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 인생의 네 거리에서 이제는 사람에게 의존적인 삶이 아니라 험한 세상을 독립적으로, 창조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의 내용이 <창12:1-3>입니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이지만, 오늘 히브리서 말씀에 비추어 중요하게 보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그 일생에 청사진을 펼쳐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고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신앙의 시작은 분명히 떠나는 것에서부터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에도 제자들이 믿음으로 응답할 때, "배와 그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디이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특징, 그 첫 번째 것을 다르게 사는것(extradrdinariness)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사는 사는 삶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이제는 세상의 다수와는 다른 가치관,  다른 철학, 다른 동기, 다른 목표로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이전에 그냥 세상의 다수의 흐름에 따라서 별 생각없이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살아가는 옛 생활의 습성으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롬12:2>에서 명백히 가르쳐 주듯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내 등뜨시고 배부른 것이 제일이더라, 이런 세상의 원리, 철학을 벗어야 합니다. Christian faith의 능력은 이전의 life style, 세상적 사고를 떠나는 것에서부터 시작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시면서 이전의 옛 생활에서 떠나셨습니까? 떠날 것을 결심하셨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네가 앞으로 10년은 이런 삶을 살 것이며 그 후로 몇 년은 어디서 살 것이며... 이렇게 다 보여 주시고 따라와라 약속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결정된 운명을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과의 동행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믿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믿음은, 보여주시는 길이 좋으냐 나쁘냐 판단하고 좋으니까 따라 나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에서 나옵니다.

어디로 인도하실지 알지 못하지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를 두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에 소망을 두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서 인생의 청사진을 한번 짠 보여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점쟁이 찾아가지요? 그렇게 되면 좋을 것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하나님 의지 안합니다. 어차피 그렇게 되고말 것인데..라고 체념하곤 맙니다.

이런 경우를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길을 몰라서 길을 물었을 때, 오른쪽으로 돌아서 신호등 몇 개를 지나고 다음 첫 번째 골목에서 좌회전해야 하는데 안 되니까, 사 거리를 하나를 더 건너서 유턴해서 다시 사거리 하나를 지나...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보다도 "제가 함께 가 드릴께요." 이러면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도 그것입니다.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심은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생의 청사진을 보여 주는 것보다도 훨씬 실제적이고 좋은 것입니다.

미국의 맹인 복음성가 가수로서 빌리 그레함 전도협회의 일원이었던 킴 뛺스 자매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소경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십미터 전방에 무엇이 있다고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앞에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 놓으라고 말하고, 앞에 흙탕물이 있으니 피하라고 말합니다. 저는 저를 인도하는 사람을 신뢰하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옮기면 언제나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말하기를 "저는 인생이 그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그와 꼭 같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를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옮기다보면 주께서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그 영광스런 목적지에 도착할 것을 믿습니다."

또 우리는 믿음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얼마나 자주 고집합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심지어는 <전7:13,14>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길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인생들이 헤아려 알지 못하도록 일부러 굽게도 하시고 일부러 펴게도 하십니다.
예) 손가락과 필기구.

따라서 "이것 아니면 안됩니다." "저 형제, 저 자매 아니면 안됩니다" 식으로 하나님의 한 가지 방법만 고집하는 것은 그 마음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훌륭한 믿음은 겸손과 함께 나아갑니다. 믿음이 좋은만큼 겸손하고 겸손해야 진정한 믿음이 자라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믿음의 삶으로의 초청은 그렇게 은혜의 동행에로의 초대입니다. 이 부르심의 약속에 응답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방법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은사, 하나님의 도구들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던 아브라함처럼 내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실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최선의 삶으로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하루하루 따르십시오.


둘째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영원한 세계에 소망을 두고 이 땅에서의 삶은 순례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9절>.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라는 말은 외국인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외국에 있는 것처럼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쉽게 이사갈 준비를 하며 살았다는 것이고 그 땅에 뿌리를 내려서 집착하거나 연연하며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상당히 부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히브리서11장 9절의 표현으로 "장막에 거하였으니" 텐트 생활을 하였다는 것이고 이는 정착하지 않고 언제든지 이사갈 준비를 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왜요? 왜 아브라함은 이 땅의 것에 연연하지 않으며 언제든지 떠나갈 준비를 하며 살았습니까? 그의 마음이 다른 곳에 드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10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이는 영원한 도성, 영원한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도성, 천국을 바라보았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을 때에나 지나가는 노정중에 외국인, 나그네처럼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서도 그는 외국에 있는 것처럼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소위 비젼의 땅에서도 그는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의 삶이 지겹고 진절머리가 나고 무지하게 힘들어서 "빨리 도망가야지" 도피의 마음으로 영원한 세계를 사모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도피가 아닙니다. 순례자로서의 삶이, 도피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압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정착한 땅,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입니다. 이 땅에서 그와 그의 후손들의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복의 근원이 되는 비전을 꿈었고 그 비전이 땅에서의 삶에서 충실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비전의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충실하게 살았듯이, 오늘 우리도 이 땅에서의 우리의 인생,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 마음을 두지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그의 후손에게 유업으로 주실 약속의 땅이긴 하지만, 또 그래서 오늘의 삶에 충실하게 살았지만, 이 땅에 자기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오늘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비젼보다 내일 영원한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비젼에 더 마음의 초점을 두었습니다.

사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으로 히브리 기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핵심이 이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다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이 땅에서의 인생을 나그네, 순례자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13-16절> 보십시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의 믿음을 소개한 다음 이 사람들의 믿음의 내용을 정리하여 믿음의 원리를 제시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다 이 땅의 것에 연연하지 않고 영원한 세계에 가치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목회자들과 크리스천 카운슬러들이 범하는 큰 오류 중의 하나가 내적 치유를 받으면, 성령을 받으면, 성경공부를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하면 마치 이 땅에서 모든 마음의 한이 다 풀리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고 모든 어려움이 다 극복될 것처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에 있어서 이 땅에서 영화를 이룰 수 있는 것처럼 환상적 기대를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계21:4>에서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할 때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있지 아니하리니..."

거꾸로 추론하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 전에는 사람들 마음의 한, 아픔, 애통이 100% 다 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극복은 되고 부정적 상처, 아픔들 승리는 됩니다.

그러나 개인에게 있어서도 천국은 정말 천국에 가야 경험됩니다. 이 땅에서는 맛뵈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이 땅에서 천국이 실현될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영원한 세계를 사모하십시오. 그 소망의 믿음이 도리어 오늘의 삶에서도 아브라함처럼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땅에서의 삶이 지나가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까? 오늘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아니 극히 일부임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오늘이 전부인양 살고 있는 것같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세계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는 것같습니까?

순례자로서의 삶은, 그 마음이 지나가는 이 땅의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마치 이 땅에서의 인생이 전부인양, 이 땅의 일에 목숨걸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 이 땅에서의 소유와 명예에 목숨걸지 않습니다.

다시 반복하면 그렇다고 순례자로서의 삶이 도피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대제사장으로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에,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피를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초연과 승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영원한 세계에 마음을 두고 이 땅에서의 것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부르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을 신뢰하여 부르심에 합당한 최선의 삶을 드려 가십시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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