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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라버린 강물 / 계 16: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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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계시록 16:12~16 
제목 : 말라버린 강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간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알고 계신대로 총회를 다녀왔습니다. 총회 회의 방식이 이전과 달라져서 전에는 400명 500명이 한자리에 앉아서 모든 토의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쨌든 한사람 이야기 하고 사오백명은 들어야 되는 구조였는데 올해는 크게 네 팀으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했어요. 누가 그러더군요. 4배나 더 많이 말을 했다고, 4배나 많은 말의 성찬이기도 했습니다마는  얼마나 바른 결정을 했는지를 돌아볼 때에 저는 이 계시록 말씀을 여러분들과 나누어야 되겠다는 부담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듣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록된 모든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들고 지킴으로 오늘 우리 자신을 살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은 일곱 교회의 실상을 먼저 말하고 나서 역사의 일곱인을 떼는 장면들이 펼쳐집니다. 그러고는 일곱 경고의 나팔이 울려 퍼집니다. 그리고 나서 경고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 일곱 진노의 대접이 부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쏟아 붓는 장면입니다.

56장을 보면 첫째대접, 둘째대접, 셋째 대접은 한 두절 밖에 기록이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여섯째 대접은 쏟은 결과를 더 길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종말을 준비하게 합니다. 여섯 번째 대접을 쏟은 결과는 종말을 가져오는 대신에 임박한 종말을 위해서 준비하게 하는 역할이 여섯 번째 대접의 역할입니다.

이제 여섯 번째 대접이 쏟아지는 곳이 어디입니까? 큰 강 유브라데 라고 밝혀져 있습니다. 유브라데 강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강을 사이에 두고 바벨론과 접해있습니다.

동방을 대표하는 나라 바벨론은 어떤 나라입니까? 성경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침공하는 그런 나라로 등장합니다. 특히 계시록에서는 적그리스도의 나라와 지경을 상징합니다. 

여섯 번째 천사가 그 대접을 그 강에 쏟을 때에 그 강이 말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부터 오는 왕들의 길이 준비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강물이 말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이 유브라데 강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현대적인 댐 공사로 말미암아서 한 날 유브라데 강이 마르면 마지막 종말이 온다고 주장합니다. 유브라데 강물이 말랐다는 것은 그걸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강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연적인 경계가 되곤 했습니다. 우리나라 보십시오. 중국하고 압록강, 두만강으로 경계하고 있지 않습니까? 강은 자연적인 경계 역할을 하기 때문에 거기 있으면 거기가 갈라지지요. 전쟁을 해도 많은 군대를 옮기려면 강물 때문에 쉽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강물이 말라버리게 되면 육지처럼 건너가니까 더 이상 막아주는 역할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는 유브라데 강물이 마르건 마르지 않건 그걸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의 상징인 이스라엘과 세상의 상징인 바벨론 사이에 구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여섯 번째 대접이 쏟아진 결과입니다. 이스라엘과 바벨론 사이에 있는 큰 강이 말랐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하고 세상 사람들 하고 구별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교회가 세상과 구별이 되지 않는 한 시대가 도래 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적그리스도의 사이에 구별이 없어지는 무서운 시대, 교회가 세상과 어깨동무를 하는 시대가 도래 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보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고 그렇게 하니까 그 다음 오는 것이 홍수라고 하는 세계 전체적인 재앙이 왔습니다. 여러분이 신자답게 존재하는 것이 이 세상을 버티게 하는 마지막 버팀목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세상 사람들하고 차이가 없어져버리면 하나님은 이제는 손써야 한다, 이제는 마지막 심판을 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게 됩니다.

세상과 교회 사이에 구별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교회 안에도 이런 두 흐름들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곳에도 아벨의 제단, 가인의 제단이 있었던 것 우리 기억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나는 받지 않았습니다. 같이 예배를 드려도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왔다고 해서 전체다 무사통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그렇게 전할 수 없습니다. 중심에서 하나님 사랑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나와야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시지 ‘나는 지난 한 주간 동안 괜찮게 살았어, 교회 오면서 보니까 오늘도 교회 안 오고 딴 데 가는 사람 봤어’ 하고 폼 잡고 나온다고 하나님이 우리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도 엄연히 두 부류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밭에도 가라지는 더 뿌려져 있다는 것은 말 해야만 합니다. 이제는 전략적 제휴를 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큰 강 유브라데가 말라서 경계가 철폐되었습니다. 

더 이상 원리적인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진리,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비타협적인 인간으로 몰아 부칩니다. 사고가 경직된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옳고 그른 것 사이에 더 이상 근본적인 구별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치 교통사고가 나면 네가 몇% 잘했느냐, 몇% 몇% 이렇게 나누는 것처럼 모든 생각들이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착한 놈 없고, 아무도 나쁜 놈 없고 다 비슷비슷합니다. 세상에 그렇게 절대적인 진리가 없어지고 나면, 기준이 없어지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더 이상 사람 눈 무서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욕망에 따라서 두 사람 좋으면 무슨 짓이든지 가리지 않고 행하는 패역한 시대 아닙니까? 아니 젊은 피가 끓는 사람들만 그럽디까? 할아버지도 할머니들도 관광버스 타고 어떤 짓거리 하는지 나보다 여러분이 더 잘 알지 모릅니다. 돈만 된다고 하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세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돈만 벌면 그것을 성공이라고 말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도대체 신앙인과 비 신앙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왜 신앙인이 불신자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까? 우리 국민의 1/4 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런 시대에 민족사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이 교회에 넘쳐 들어와서 더 이상 구별이 어려운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도인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친구들의 삶이 그 목표가 달라야 됩니다. 그리고 그 목표로 나아가는 방법이 달라야 됩니다. 우리는 다릅니까? 결혼하고 자녀 낳고 키우고 대학 보내고 같은 일 하지만 목표가 달라야 됩니다. 취직해야 되고  돈 벌어야 되고 하지만 목표가 달라야 됩니다. 그리고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하는 방법도 달라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혹시 거기서 아무 차이도 발견할 수 없다고 하면 여섯 번째 천사의 대접은 이미 우리의 삶 가운데 부어졌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도와 불신자는 엄청나게 차이 나야 됩니다. 왜냐하면 처음 인생이 타락할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뱀을 향해서 “너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는 원수 됨을 두리니” 거기는 화해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전략적 제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적은 미소를 띠고 다가와도 적입니다. 나라도 걱정입니다. 대한민국 육십만 대군의 주적이 누구인지 상실되는 시대, 헷갈리는 시대 현재입니다. 태초의 유혹은 이런 절대적인 구별을 없애버리려는 것입니다. 찾아와서 뭐라고 합니까?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람이 과일하나 따먹는 것 가지고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하니까 거기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동산에 있는 과일 다 먹어도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안 바꿔집니다.

여러분의 삶에 창조주를 인정합니까? 여러분이 이 시대에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은 여러분이 정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미리 주문생산 했습니까? 나는 어느 나라에 어떤 집에 태어날 겁니다. 언제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내 태어날 때는 예비고사도 없어지는 시대에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주문해서 여러분 태어났습니까? 아무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민 박람회가 그처럼 성황을 이루겠습니까? 산더미만한 배를 가지고 비행기타고 가서 외국 가서 아이 낳을 거라고 그렇게 설치겠습니까?

여러분이 걷는 인생길도 여러분이 주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인생 배후에서 주관하시는 분 그분을 가리켜서 성경은 대 주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지은 부잣집들 보면 일하는 머슴들이 많아요. 큰 머슴보고는 무슨 일 하라고 시키고 중간 머슴보고는 어디 가서 밭 갈라고 시키고 셋째보고는 산에 가서 나무하라고 시키고 다 주인이 분정 하는 것입니다. 사는 게 그런 것입니다.

삶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내 나이 지금 오십인데 어떻게 살아야 하지요? 칠십인데 어떻게 살아야 되지요? 물어봐야 됩니다. 주인 뜻에 따라서 인생을 살아야 그 사람이 복 받는 사람 입니다. 조금 가는 길이 좀 어려워 보여도 주인이 가라고 그러면 그 길로 가야 됩니다. 산으로 가라 그랬는데 들판으로 나가는 종은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해보면 지금 가는 길이 오르막길처럼 보이지만 곧 어떤 길이 펼쳐질지 누가 압니까? 모르지 않습니까? 지금 가는 길이 평탄해 보이지만 언제 무슨 일 당할지 누가 압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여기 예배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여러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물어야만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그 인생길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걷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기 원하는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우리시대는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엄연한 구별을 철폐하려고 합니다. 소위 뉴에이지 운동의 메시지가 그런 것입니다. 겉으로는 자연보호 운동을 내세우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뭐냐 하면 자연과 인간은 하나다는 겁니다. 물론 자연이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는 것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 지구” 이렇게 부르는 것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세상 사람과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 맞지만 사람과 만물이 우리는 이성적인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소 개 돼지하고 같지 않습니다. 소나 돼지나 개나 닭이나 거기에는 촌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어울려도 그것보고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합니까?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하면 짐승만도 못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태어날 때부터 여러분은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또 해야 하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들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고 내가 행동하는 것은 선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이 거기 있습니다. 우리는 해서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에 감각이 있습니다. 양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도덕적인 선악을 철폐하자고 부르짖는 것은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대항하는 운동입니다. 그들은 또한 특정 종교를 지원하는 것을 철폐하도록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종교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결국 종교적인 혼합 주의로 몰고 가서 순수한 말씀에 기초한 기독교를 반대하려고 획책합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의 세계 정부 운동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단에 의해서 지배되는 하나의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상 조직은 사단이 지배합니다. 중국에 오치만리라고 하는 사람이 아주 명쾌하게 한마디로 결론 내렸습니다. 세상 조직은 세속적인 마인드가, 마음이 있는 사람이 결국 지배합니다. 정치, 종교, 사회, 학문, 어느 곳에든지 이런 풍조들이 다 침투되고 있습니다.

경계선 역할을 했던 강물은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준비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이 어디서 나오고 있습니까? 하나는 용의 입에서, 하나는 짐승의 입에서, 하나는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지, 여러분의 입에서 튀어 나오는 말들이 무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말입니까? 형제를 세우는 말입니까? 형제를 헐뜯는 말입니까? 비난하는 말입니까? 속이는 말입니까?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은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입에만 나오는 것 아닙니다. 그들의 졸개들의 입에서도 나오는 것입니다. 

먼저 용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용은 여기서 마귀를 뜻합니다(계 12:9). 온 세상을 거짓으로 유혹하는 괴수입니다. 하늘로부터 쫓겨난 사단은 세상에서 지금 활동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단이 교회에까지 침투해서 교회를 파괴하는 시대입니다. 교회의 도덕적인 순결을 떨어뜨립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교회를 파괴하는 공작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도덕적인 순결을 상실하도록 하여서 세상이나 교회나 별것 아니라는 인상을 갖도록 합니다.

때로는 기독교의 진리를 잘못 강조함으로서 웃음거리가 되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 재림한다고 퍼뜨려서 우리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건 틀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말고는 정답이 없으니까 그렇게 주장 하는 게 이단이라고 알고 있지만 바깥사람들이야 이단인지 삼단인지 알게 뭡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 온다고 재림한다고 해놓고 틀렸네, 웃기네 그러고 맙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진리가 조롱받게 합니다. 교회 안에 거짓 지도자들을 세워서 하나님의 교회를 유린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를 읽어보면 “듣는 자는 명심해서 들으라.” 서지 못할 것이 거룩한 것의 선 것을 알면 때는 끝이다. 서지 못할 부정한 사람이 존재가 가장 거룩한 자리에 서게 되면 그건 시대의 종말이 왔다는 것을 깨달아 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한날 하나님의 교회에 말도 되지 않은 지도자가 서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온갖 거짓말을 해서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듭니다. 비리의 핵심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양심을 따라서 증언조차 하지 못하게 하고 여론으로 인민재판을 해 갑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앙대로 바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점점 어려워지는 때가 올 것을 계시록은 말하고 있습니다. 소수의 무리들만이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에 따르지 아니하고 남은 자 될 것을 말합니다. 마치 바벨론 포로에서 남은 자들이 돌아와서 이스라엘을 재건했듯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남은 자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생명을 걸 자들이 있을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세상은 우상을 숭배하게 될 것입니다. 또 생명을 걸 자들이 있을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세상은 우상을 숭배해야 될 것입니다.  번영의 우상, 쾌락의 우상, 안일의 우상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악한 영이 그 입에서 나오는 짐승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여러분은 계시록에서 여러 번 짐승이 등장하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 땅에서 나온 짐승 그러나 짐승의 족보를 캐보면 다니엘서에 있습니다. 그건 다니엘서에 다 나왔던 이야기들입니다.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은 세상 권력을 가리켜서 짐승이라고 말합니다. 왜? 하는게 짐승 짓이니까, 힘으로 밀어부치니까, 수로 밀어붙이니까 짐승이라고 합니다. 헌법이야 대한민국 헌법도 그렇고 조선인민주의 공화국 헌법도 그렇고 주권은 국민에게서, 주권은 인민에게서 나온다고 다 했지요.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이  인민들한테서 주권이 나온 겁니까? 대한민국만 해도 몇 차례 우리는 총구에서 권력이 나온다는 것을 보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나라에 대해서 예언서는 짐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힘에 대한 권력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관심을 본능적으로 가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하는 것이 “내가 더 힘세다” 이렇게 말 하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정치권력의 뒷이야기는 언제나 잘 읽혀지고 있습니다. 최고 통치자의 전기나 권력투쟁에 관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읽기 좋아합니다.

별들의 전쟁이라고 이름을 붙이든지, 청와대 실록이나 남산의 부장들이라고 하든지 상관없이 개걸스럽게 읽어댑니다.  정치는 인간의 삶 속에서 직접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권력이 한번도 사단의 관심사를 벗어난 때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단은 세상정치뿐 아니라 교회 정치 배후에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바른 판단을 내린다고 하지만 그 배후에는 악의 세력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한 정치에 관심을 갖고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권력은 그 본질상 야수적이 되기가 쉽상입니다.

짐승은 그 주인이 용입니다. 용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마귀가 시키는 대로, 사탄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게 권력의 속성입니다. 그 권력이 유지되는 궁극적인 힘은 정의가 아니라 거기에는 어떤 합리성이 아니라 거기에는 비합리적이고 거기에는 폭력적인 힘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권력을 다니엘서와 계시록은 짐승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어야만 할 기대 이상을 세상정치나 교회정치에 두면 여러분은 계속 실망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악한 영은, 개구리처럼 생긴 악한 영은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부터도 튀어 나오고 있습니다. 본문에 그 정체를 드러내는 거짓 선지자는 적그리스도의 대변인입니다.  이론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왜 이 세 더러운 영들이 개구리 같다고 표현했을까요? 왜 하필 개구리가 표적이 되고 있습니까? 몰골이 흉악해서 입니까? 개구리 하면 생긴 것도 징그럽게 생겼지만 그 울어대는 것을 여러분은 들어 보신 적 있습니까?

여름에 울어대는 매미소리 만큼이나 오뉴월 못자리에서 들리는 개구리 울음소리도 대단합니다. 매미는 낮에 울어 대지만 밤에 주로 개구리는 울어 댑니다. 개구리가 울기 시작하면 엄청납니다. 여러분 처음에는 그럴리 만무하지 사람들이 어떨 땐 그래요. 그러나 계속해서 개구리처럼 울어대면 진짜 뭐가 잘못 되었나보다 그런다고요. 한 10년이 넘게 이야기를 하면 나중에는 아주 가까운 친구들조차도 아무래도 내 친구한테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 보니 이 친구 뭐 잘못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개구리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넋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여러분과 제가 사는 세상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활자정보, 방송매체, 영상매체를 통해서 끊임없이 메시지가 나오고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거기 귀를 기울이기가 너무 쉽습니다. 눈을 뜨면 신문이요, 심심하면 켜면 텔레비전을 통해서 영상을 통해서 나오지요. 혼을 빼앗으려 듭니다.

바벨론이 팔고 있는 상품 중에는 인간의 영혼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 24시간 상품 체널에서 물건 파는 것 보면 정말 사람의 영혼까지 팔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충동구매 카드 긁어서 결국은 자기 생명을 지불하고 만 것이 우리 세대 아닙니까? 그런데 한 두 사람 그런 것 보면 정신 차려야 되는데 아무도 정신 못 차린 것 같지 않습니까? 일들은 계속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을 듣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사람들이 관심을 안기울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내가 죽을 것인지 입장 정리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이 소리도 그 소리 같고 그 소리도 저 소리 같고 이 사람 말도 옳은 것 같고 저 사람 말도 옳은 것 같고 모두 개골개골 떠들어 대니까 사람들이 참과 거짓사이의 분별을 상실하고 맙니다. 

지금 사단은 동방으로부터 오는 왕들을 유인해서 끌어 들이고 있습니다. 그 영향이 온 세상에 확대되고 있습니다. 전에는 이 유브라데 저쪽에서 악한 짓들 다 했지 강 이쪽으로 물이 마르니까 다 넘어와서 이제는 안전하게 남아있는 곳이 없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 25시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계시록이 말하는 이야기의 전부가 아닙니다.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의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14절) 온 천하 임금들을 미혹해서 모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결판을 내려고 덤벼들고 있습니다. 옛날 다윗 시대에는 다윗이 왕이 된다니까 사방이 떠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 갈 때도 “십자가에 저를 못 박으소서 못 박으소서” 소리쳤습니다.

“그 날에는 헤롯과 빌라도가 친구가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 잡아 죽이는 일에, 하나님의 사역 망치게 하는 일에는 동조를 잘 합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소리치고 합창하던 음모가 이제는 노골화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이 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이의 큰 날, 이런 표현은 자주 나오는 것 같아도 성경에는 그렇게 자주 나오는 편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주의 날, 그리스도의 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간단하게 말하면 그날, 마지막 날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날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수시로 분출되던 하나님과 그 백성을 향한 미움과 핍박이 이제 그 극치에 달할 그 날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자들이 그 졸개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달려들 날입니다. 그러나 이날은 동시에 여호와의 날이고 전능하신 이의 큰 날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서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15절). 갑자기 지금 온 세상 왕들을 몰아서 강을 건너서 쳐들어오는 전쟁 이야기 하는데 갑자기 “보라” 그럽니다. 혹시 졸고있다고 보라는 소리에 깜짝 놀란 사람 없습니까? 갑자기 터져나온 것 같지만 흐름을 보면 나와야 될 자리입니다. 이제는 어떤 싸움이라고요? 온 세상과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간에 마지막 결전이 벌어지느데 마지막 싸움인만큼  양쪽 다 치열한 싸움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라고 자기 편을 격려하기 위해서 여기 음성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도적같이 오리니, 오리니” 이것이 계시록의 주제입니다. “내가 오리니, 내가 오리니” 계시록은 그것을 전해주고 우리에게 그 오는일이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로 겹겹이 겹겹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종말이 옵니다. 종말이 옵니다.

세상은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어릴때를 생각해보면 저는 내 기억에 디딜방아 찧어서 보리쌀 삶아서 걸어놓고 밥해먹던 그런 시절 생각하면 지금은 잘 사는 겁니다. 우리교회 교인들 95%는 따뜻한 물이 쫙~ 흘러나오는 집을 다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18년 전만해도 제가 유학 갈 때만 해도 유학 가서 지내는데 어떤 분의 농장에 갔는데 거기에도 순간 가스온수기가 있더라구요. “햐 요것만 하나 있으면 내가 한국에서도 따뜻하게 목욕할 수 있을 텐데”그게 참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난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그런 주거환경 속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다 잘살게 되었는데도 못살겠다고 떨어지는 사람들은 더 늘어가잖아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아파트라는 말은 재미있는 어원을 가진 단어입니다. 아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말하면 not, no라는 단어입니다. 파트는 떼놓는다, 떨어져 있다. 떼놓지 않는 집, 집 지어놓은 것 보면 벽이 서로 닿아있고 떨어져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는 모습 보면 정말 서로 십리나 백리나 천리나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총총히 사람들 살고 있지만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한 집도 벨 눌러서 찾아갈 집이 없으니까 떨어지는 겁니다. 같은 회사에 드나드는 사람이 수만명인데 수만명의 사람은 옛날 사람들 같으면 평생 만나도 못 만나는 사람 숫자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같은 입구로 출근하지만 옥상에서 뛰어서 자살을 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잖아요. 여러분 이게 종말적인 상황이라니까요. 사람이 사람을 도움 받을 사람을 찾지 못해서, 다른 나라에 비하면 우리가 엄청 잘 사는데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긁어대다가 결국은 그 늪 속에 스스로 빠져 들고 마는 이런 어리석은 삶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주님이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적절한 상황 가운데서 발하신 음성입니다. 임박한 최후결전 앞에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아마겟돈에 집결한 왕들의 이야기가 인류 역사의 마지막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이 궁극적인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내가 오리니” 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은 그 날이 가까워 왔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책입니다. 사단과 그 하수인의 선전을 간파하는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영적인 역사의 황혼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을 바라보는 역사의 파수꾼으로 여러분과 제가 서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유혹이 노골화 되는 이 시대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십시오. 항상 깨어있으라, 깨어있으라, 깨어있으라 그러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날은 아파트 추첨하는 날이 아닙니다. 입주하는 그날이 아닙니다. 아이파크 언제 입주 하는가 그게 울산사람들의 관심사가 될 수 있지마는 크리스챤의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살려고 하다보면 먹고 입고 잘 집도 있어야 되지만 그것 못하라는게 아니예요. 그러나 거기에 온통 정신을 다 팔아버리면 영혼까지 팔아넘기면 안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누구든지 깨어서 자기 옷을 지켜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주님이 처음 오실 때부터 이 역사를 가리켜서 말세라고 불렀어요. 마지막 시대에 테이프가 끊어진 것입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 모릅니다. 초읽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참 편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무슨 일 터질지 몰라서 미군들 웃돈 얹어줘도 여기 파견 받으려고 안합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저는 참 무사태평 합니다.

저는 총회에 참석해서 우리가 총회를 거룩한 모임이라고 그러는데, 거룩한 총회가 하는 짓거리를 보면서 제가 제일 두려웠던 것은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가만 안 있는데 하는 생각이고 또 하나는 이건 완전히 잘못하는데 아무도 얼마나 두려운 시대에 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말세는 참 신앙생활 하기 쉬운 때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해서 신앙생활 하기 어렵다고 말들 합니다. “목사님 저는 주일도 출근해야 됩니다.” 그런 사람 말 들으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 사람들 보고 무시하면서 주일날 교회 온다고 우리가 착한 교인 되는 것 아닙니다. 그 어쩔 수 없어서 직장을 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천 명이 모여서 예배하는 교회가 좀 뭔가 도움이 되어야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 안되겠습니까? 연 30억의 예산을 가지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 도울 수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안 되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지난주에 여러분들이 작정 200만원을 포함해서 2천만원 헌금해 주셔서. 그래서 몇몇 교회가 모여서 지금 정말 세상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있거든요. 집터도 없이 쓸려나갔는데 그렇게 비참한 눈물을 흘려도 눈물을 씻어줄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당이나 그런 사람들을 좀 돌보아 주기 위해서 활동이 시작 되었습니다. 생활 어려운 것만이 신앙생활 하는 것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생겨도 그렇습니다. 돈 가지면 좋은 승용차 있지요 가는 곳 마다 콘도 준비되어있지요. 토요일도 예배당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골프채 들고 나가면 샷을 날릴 수 있는 그린 필드가 눈에 오락가락 하는 겁니다. 그러면 가난해도 힘들고 부자가 되어도 주일 성수 하는 것은 쉬운 때가 아닙니다. 주 오일만 근무하게 되면 더 왔다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역사의 어두움이 짙어가고 파고가 높아질 때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만나보십시오. “내니 두려워 말라” 갈릴리의 풍랑 이는 밤바다에 찾아오신 그 분이 우리 곁에  항상 계십니다. 그래서 최후의 날을 앞둔 교회를 위해서 주님은 갑작스런 위로의 말로서 찾아오십니다.

사탄은 온 세상을 삼킬 듯이 그 가냘픈 배를 풍랑에 삼킬 듯이 설치고 있지만 최후 승리는 주께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주님께 있습니다. 고백하는 사람들이 우리 성도들 아닙니까? 최후의 승자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아마겟돈 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주재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하나도 몰라도 아마겟돈은 들어보거든요. 신학적인 주제만이 아니라 소설책 제목이고 영화제목 아닙니까?

아마겟돈전쟁, 그래서 이 전쟁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 궁금해 합니다. 성경을 살펴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 어디서 이야기가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본문의 강조점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아마겟돈이 어떤 곳이 되었던 상관이 없습니다. 언어적으로, 지리적으로 추적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계시록의 특성상 틀림없이 이것도 상징적 의미를 가진 지명일 것입니다.

아마겟돈, 그것은 특정한 장소를 지칭하는 대신 온 세상의 최후 반란을 가리키는 의미일 것입니다. 악의 최후 대결, 그 최후의 파멸의 장소를 상징할 뿐입니다. 그날은 악의 최후파멸의 날입니다. 본문은 그 날을 위해 모여드는 왕들을 보여주고 끝을 맺습니다. 저도 끝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강물이 마른 시대, 경계가 철폐된 상황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깨어있으라 옷을 지키라. 성도의 옷은 뭡니까? 흰옷, 정결함, 거룩함입니다. 말은 성도라고 하고 예배는 주일날 드리면서 사는게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이 살면 그건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유브라데 강물이 마르고 왕들이 모여서 시작하는 아마겟돈, 피의 전쟁이 두렵습니까? 더 이상 적과 아군의 경계가 없어져서 불안합니다. 정치적으로도 이미 9.11사태 후에 우리는 전선 없는 새로운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영적인 전선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저는 지난 한 주간동안 너무나 실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의 앞날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 피로 정결케 하신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책임은 어린 양의 피로 씻은 그 세마포 옷을 정결케 유지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인내하십시오. 찬양하면서 주를 맞이하십시오. 그가 속히 오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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