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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리와 바리세인 (눅 18:9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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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와 바리세인
구약의 말씀: 창세기 1:26 ~ 31

  주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집안에 재앙을 일으키고, 네가 보는 앞에서, 내가 너의 아내들도 빼앗아, 너와 가까운 사람에게 주어서, 그가 대낮에 너의 아내들을 욕보이게 하겠다. 너는 비록 몰래 그러한 일을 하였지만, 나는 대낮에 온 이스라엘이 바라보는 앞에서 이 일을 하겠다.'" 그 때에 다윗이 나단에게 자백하였다. "내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님은 죽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이번 일로, 주의 원수들에게 우리를 비방할 빌미를 주셨으므로, 밧세바와 임금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죽을 것입니다." 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께서, 우리아의 아내와 다윗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치시니, 그 아이가 몹시 앓았다.

서신서의 말씀: 에배소서 2:4 ~ 10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범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푸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18:9 ~ 14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또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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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인생살이에는 걱정거리도 많은가 하면, 기쁜 일도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높은 자리에 처하게도 주시고 낮은 곳에도 머물게 하십니다. 그런 기복 가운데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교통사고 대국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교통사고 사망자가 많다는 보도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보다 자살로 인한 사망자가 더 많다는 보도를 듣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과거에 저는, 자살이라 하는 것은 가난해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서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너무 풍요하고 사회적 혜택이 많아서 정신력이나 마음이 약해지고 삶의 의욕이나 의미를 찾지 못해서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풍요한 사회에서의 자살은 복지제도가 최고로 발달된 서유럽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우리나라가 어느 때부터인지 세계 부자 나라들의 모임인 OECD 국가 가운데에서 자살률이 상위권에 속한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자살이 늘어나는 것일까? 자살하는 사람은 자기와, 자기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또 다른 자기와의 대화가 끊겼거나, 아니면 아예 대화가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나 자신의 모습과 지금 눈을 뜨고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고 살아가는 나 자신의 모습, 두개의 자기가 항상 대화를 한다면 아마 이런 자살병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아주 재미있는 예화를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겉에 있는 자기와 속에 있는 자기 사이에 대화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대화를 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는 어떻게 대화를 합니까?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화는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에 세리와 바리새파 사람 둘을 내세웠는데, 두 사람이 도덕적으로 어떤 사람들이냐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를 드렸는데 어떻게 했기에 한쪽 기도는 들으시고 한쪽 기도는 안 들으시느냐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쪽은 살아 있지만,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쪽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된 것이니까요.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된 겁니까?
예수께서는 두 사람을 내세우셨습니다.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 다른 하나는 세리!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한 청중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 질병에 걸린 사람, 못 배운 사람, 힘없는 사람, 말하자면 사회적 약자, 빈곤층,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람은 짓밟고 버려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요새 말로 말하면 지식이 많은 사람, 많이 배우고 지식을 축적한 사람입니다. 재산도 적당히 가진, 중상층 이상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입니다. 도덕적으로도 흠이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시민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도 열심히 합니다. 오늘 기록에 보면, 이 바리새인은 헌금이나 십일조도 꼬박꼬박 내고, 그리고 또 일주일에 두 번씩 반드시 금식기도도 했다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토색하는 사람들과 같지 않다”고 하는 말은 토색도 한 일이 없고 부정부패한 일도 없다는 말입니다. 모범시민, 도덕적인 시민, 그런 사람의 상징이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세리 역시 빈곤층은 아닙니다. 로마 식민지 시절, 세리가 한 일은 각 지역에 할당된 세금을 각 가정에서 가능한 한 많이 염출해서 로마 관청에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할당액을 채우고 남는 돈은 착복했습니다. 유대 땅과 시리아, 유대 땅과 이집트의 국경을 오가는 국경 검문소에서도 세관원들은 세금을 받으면서 많은 돈을 챙겼습니다. 세금은 많이 받을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당하게 많은 세금을 뜯긴 사람에게는 세리는 원성과 미움의 대상입니다. 게다가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바쳤기 때문에 유대사람들은 세리들을 로마의 앞잡이로 여겼습니다. 민족과 신앙을 버리고 부정과 착취로 돈을 벌어서 경제적으로 윤택한 사람, 그러나 남들 앞에 서기에 부끄러운 사람, 이 사람이 세리입니다.

두 인간이 지금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한 일은 이렇게 좋은 일들뿐입니다. 저는 옆에서 같이 기도하는 세리와는 달리 모범 신앙인이요, 모범 시민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저는 드릴 말이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눈을 들 수가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야 어찌 고개를 들 수가 있겠습니까? 자비만 바랍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세리의 기도는 의롭다고 받으시고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는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의 생활 하나 하나를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헌금을 많이 냈느냐, 적게 냈느냐고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오직 기도하는 모습 하나만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세리에게 왜 그렇게 착취했느냐고 추궁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직 기도하는 모습 하나만 가지고 판단합니다.

왜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는 받지 않으셨습니까? 바리새파 사람은 하나님한테 기도한다고 하면서 실은 자기가 한 일을 보고했습니다. 업무보고입니다. 업무보고 때는 대부분 잘한 일을 보고합니다. 칭찬듣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기도는 업무보고가 아니다! 잘한 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칭찬하시고 복을 주실 텐데, 그걸 믿지 못하거나 기다리지 못하고 보고하는 것입니다. 보고하는 것에는 자기가 선하다고 생각한 일을 하나님도 선하다고 여기고 복을 주어야 한다는 판단과 주장이 깔려 있습니다. 자신의 판단에 하나님의 판단도 맞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재단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자기방식의 하나님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습니다. 자기의 자리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기도를 받아야 합니까? 아예 기도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 스스로 다 재단하고 다 판단했으니, 그 판단대로 살면 될 것이 아닙니까.

이와는 달리 세리는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으므로 보고할 것이 아예 없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세리의 기도에는 자기의 자리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계실 장소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왜 자기 속을 자기로 가득 채우고서, 하나님의 자리 하나 없이 자기만으로 채우고서 하나님한테 옵니까? 하나님은 보고를 받지 않으십니다. 우쭐거리는 보고는 더군다나 안 받으십니다. 이것은 옛날 유대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 앉은 여러분이나 저나 세리는 아닐 겁니다. 그리 착취한 일은 없지 않습니까? 많이 배웠지요? 지성인이지요? 빈곤에 시달리지 않지요? 사회적으로 존경받지요? 옛날 유대사회로 치면 우리는 딱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나쁩니까?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나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여기서 자기의 공적을 얘기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아뢰었더라면,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께서 계실 공간을 만들었더라면, 예수님의 기도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왜 지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아니겠습니까? 왜 일해서 번 돈이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사회적 지위가 왜 복이 아닙니까? 그것들은 다 소중하고 복된 것들입니다. 문제는 그걸 가지고 하늘을 재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결코 세상 것으로 재단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의 말씀에는 다윗이 자기 휘하에 있는 장수 우리야의 아내가 너무 탐나서, 우리야를 최전선에 보내서 죽게 합니다. 그러고서 우리야의 아내를 취했는데, 하나님께서 이 일로 다윗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다윗이 그 앞에 엎드려 고백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회개를 받아들이시고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난 아이의 목숨을 거두어 가시는 선에서 벌을 멈추십니다. 다윗의 입장은 “하나님, 제가 감출 게 없습니다. 그러니 저한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세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잘못한 것은 일일이 다 고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자기를 돌아보고 자비를 구하는 마음, 이것이 진실한 기도입니다. 이게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다음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하나님 만날 때 자기의 공적을 가운데 세워놓고 하나님을 만나려 했습니다. 세리는 내세울 공적도 없었지만, 하나님을 만날 때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놓지 않고 직접 하나님을 만나려 했습니다. 기도는 직접 하는 것입니다. 무얼 흉내 내고 꾸며서 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는 기드온 사사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기드온의 삼백 명 전사가 이스라엘을 침략해온 미디안 사람들을 물리친 얘기에 보면 이렇습니다. 미디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침입해왔을 때, 이스라엘 장정 삼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 삼만 명 중에서 싸울 사람들을 선발합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선발의 기준은 단 한 가지입니다. 삼만 명을 물가로 데려가서 물을 먹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을 먹는데, 두 종류로 갈립니다. 한쪽은 체면을 지키며 허리를 숙이지 않은 채 손으로 물을 떠서 문명인답게 먹습니다. 다른 쪽은 머리를 숙이고 급히 혀를 대고 핥아 마십니다. 성서 말씀에는 개처럼 핥아 마시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처럼 핥아먹는 사람 삼백을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임박한 전쟁을 앞두고 체면을 차리며 손으로 물을 떠먹는 사람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개처럼” 물을 먹은 사람 삼백 명을 이끌고 미디안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도 개처럼 마시자’는 것이 아닙니다. 급할 때 중간에 낀 것 없이, 누구나 무엇 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직접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급합니다. 물을 먹는 사람은 마시자마자 바로 진군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새겨야 할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하면, 하나님은 진실로 하늘 높은 곳에 계시지만, 동시에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십니다. 또한 그 가장 깊은 곳에는 인간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있습니다. 가장 깊은 곳, 아직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 가봤다 하더라도 너무나 엄청나서 뭐라고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곳, 그곳을 사람들은 “신비”라고 표현합니다. 신앙은 신비입니다. 우리는 신비라는 말을 할 때 우선 하늘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가슴속 깊은 곳을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깊은 곳에 거룩하여 신비한 곳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피조물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신비가 우리 속에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신비가 제 속에 있어서 저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제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신비스런 제 존재가 있습니다. 그 신비스러운 존재, 진정한 나는 하나님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직접! 여러분이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신비한 존재입니다. 이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깊고 신비한 그곳에도 계신 하나님, 깊고 신비한 구석을 가진 우리 인간, 그 직접적인 대화! 이런 것을 알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십니다.

오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구원은 어떻게 받습니까? 구원은 은혜로 받습니다. 선물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베푸시는 그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제가 이렇게 바울의 말을 이렇게 풀이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사랑이라는 샘을 만드셨습니다. 그 샘에는 은혜라는 이름의 물이 솟아납니다. 그 샘에 와서 믿음의 그릇으로 은혜의 물을 떠서 마셔보십시오. 기도는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사랑의 샘에서 믿음으로 은혜의 물을 떠 마시며 감사하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자기가 잘났다는 보고는 필요 없습니다.

문명이 발달해도 환자는 참 많습니다. 우리 교회도 아픈 분이 많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병원의 입장에서 보면 최고의 고객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환자들입니다. 아프면 아플수록 병원에서는 그만큼 가치 있는 사람들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뭐 하러 갑니까? 자기 건강을 자랑하려고 병원에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병원은 아픈 사람들이 고침을 받으려고 가는 곳입니다. 예수의 말씀입니다. “나한테 와야 하는 사람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다. 나는 병든 자를 고치러 왔지 건강한 사람을 찾아온 것은 아니다.”

사랑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병원에 가는 것과 비교해 봅시다. 의사에게 가서 혼자 진단을 내리고 약 처방하서는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의사한테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다 쏟아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진단받을 수 있습니다. 병원에 가서 아프지 않다고 거짓말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 앞에 가서는 진실로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바리새파 사람의 잘못은 다른 게 아닙니다. 잘했건 잘못했건, 왜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 저한테 부족한 구석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해 주십시오.’ 왜 그런 얘기 안 하고, 자기가 건강하다는 얘기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뭐 하러 병원 왔습니까? 바리새파 사람은 잘했지만, 그러나 가장 깊은 곳, 자신의 신비스런 영역에 하나님께서 거처할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꽉 차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속칭 지성인들의 잘못입니다. 속칭 잘난 사람들의 허구입니다. 속칭 건강한 자들의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께서 계실 그 신비의 자리에 임하시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대화하려 하십니다. 있는 그대로, 직접! 환자가 의사한테 말하듯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들과 항상 함께 있다. 내 사랑의 깊은 샘에서 믿음으로 은혜의 물을 마셔라. 나와 함께 깊은 곳에서 만나자.

깊은 곳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복입니다. 이 샘물 간직하시고 많이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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