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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고전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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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본문: 고전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어느 날 나귀가 등에 짐을 잔뜩 싣고 길을 걷다가 그만 연못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귀는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때 연못가에 있던 개구리가 소리를 쳤습니다.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연못에 좀 빠졌다고 뭘 그리 엄살이냐! 나는 너보다 몇 십 배나 몸집이 작지만 연못에서 헤엄치고 논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개구리는 바로 우리들 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표준으로 삼고, 자신과 다른 언행을 하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데 써버립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은 다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입니다.(10인 10색)
세상에는 천 가지 만 가지의 직업이 있습니다. 화가나 소설가의 경우처럼 혼자서 고독하게 작업을 해야하는 직업이 있는 가 하면 교사나 목사처럼 늘 많은 사람들과 접촉해야 하는 직업도 있습니다. 또한 일반대중에게 노출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가수, 탤런트, 배우 등의 직업도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직업이든 여러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직업에 종사하게 되면 그 관심도에 비례하여 행동은 그만큼 더 부자연스러워지게 됩니다. 특히 교사라든지 목사의 경우는 그 직업의 성질상 바르고 참되게 살도록 교육하고 훈계해야 하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이에 따른 인간적인 고충이 더 많게 마련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그가 가지고 있는 고충을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심방에 주력하면 설교가 서툴다고 합니다. 공부를 하면 교인 하나 하나의 시중을 들어주지 않는 다고 합니다. 목사부인이 나서서 말하면 저래서 야단이라고 합니다. 집 속에 들어앉아 있으면 목사부인이 아무 것도 안한다고 합니다. 아이가 없다면 인정을 모른 다고 하고, 다섯이나 여섯 있으면 지나치게 많다고 불평을 합니다."
이웃을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한 사실을 소개합니다. 어느 목사 사모님이 아주 내성적이고 말이 없어서, 심방을 가면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그 집에 대해 무엇이든지 칭찬을 해주라는 권고를 받았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집에 심방을 갔는데 참으로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어느 것도 칭찬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예쁘게 수놓은 책상보였습니다. 그 사모님은 수를 참 잘 놓았다고 한참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그 날 저녁, 그 집에서 선물이 왔는데 그 책상보를 잘 개어서 다리고 포장을 해서 보냈더랍니다. 그러자 소문이 돌기를 사모님이 얼마나 탐심이 많은지 그 가난한 집의 책상보를 빼앗아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사모님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서 거동을 못하고 말도 잘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사모님을 고의적으로 해치고자 말한 것이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쉽게 말한 것이지만, 이와 같이 사건의 내용을 모르는 채 얼마든지 남의 가슴을 찢어 놓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때의 상황과 형편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 특별히 교회안에서 성도들간의 대화에 조심해야 합니다.(잠20:19, 마12:36)
무고한 비방에 대한 결과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징계를 받게 된다.(민12:8-13)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 도다...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 도다"(시50:20-21) 둘째, 악을 낳게 된다.(요삼1:10) 셋째,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벧전3:16) 넷째,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다.(롬1:28-32)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기보다는 서로가 연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세워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잘못 판단하기 쉽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틀려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도 있고, 현재는 틀려 보이지만 나중에 옳은 것이 판명되기도 하고, 겉으로는 좋아 보여도 속으로 나쁠 수도 있습니다.(잠14:12) 또 내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남의 눈에 티를 빼라고 하기도 쉽습니다.(마7:1-2, 롬14:1, 벧전2:1)
이웃에 대한 험담을 잘하는 아낙네가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든 단점을 먼저 들춰내 헐뜯어 친구가 별로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친정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역시 아낙네는 창가에 앉아 어머니에게 이웃집의 불결함에 대해 험담을 해댔습니다. "저기 봐요, 옆집 빨래 줄에 널린 옷들이 너무 더러워요. 세탁을 엉터리로 했나봐요"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자세히 보렴. 이웃집 빨래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너희 집 유리창이 더러운 거야"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만큼 자기도 비판을 받게 되고 남에게 너그러우면 자기도 너그러운 판단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 많이 아는 사람은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남을 가리키면 세 개는 나를 지적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귀가 길고 혀가 짧습니다.

1. 판단의 우선순위
어느 날 포수가 새를 잡으려고 산에 올라갔다가 메추라기 어미새를 만났습니다. 그 새는 포수에게 새를 잡기는 잡되 예쁜 새는 잡지말고 가장 볼품 없는 새만 잡으라고 했습니다. 포수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새를 잡으러 갔습니다. 한참 후에 그 어미 새가 사냥꾼을 만났을 때 사냥꾼의 손에는 메추라기만 잔뜩 잡혀 있었습니다. 메추라기 어미새는 "아휴, 미운 것만 잡으라고 했더니 모두 예쁜 내 새끼들만 잡았군요"하며 땅을 치고 울었답니다. 메추라기는 꽁지가 없기 때문에 새 중에서는 가장 볼품 없는 새입니다. 그런데도 어미새의 눈에는 자기 새끼가 제일 예뻐 보였기 때문에 그와 같이 자신있게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 대한 평은 아주 부드럽고 좋게 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좋지 않게 평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자신을 엄격히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척도 앞에서 자신을 엄격히 판단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비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2-3) 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인간의 척도, 사람의 눈으로 이웃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척도에 따라 인간을 판단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하나님의 척도는 성경말씀입니다. 말씀 안에서 자신을 먼저 성찰하고 이웃을 판단해야 합니다. 판단에도 우선순위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유명한 다윗 왕에게 어느 날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찾아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한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매우 부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심히 많았으나 가난한 자는 단 한 마리의 암양 새끼밖에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 가난한 자는 그 새끼양을 어찌나 사랑했는지 심지어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가 품에 안고 잘 정도로 딸자식처럼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자의 집에 나그네 한 사람이 방문했습니다.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았으나 자기 것을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단 한 마리의 양을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가 이쯤 진행되자 다윗 왕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불같이 화를 내며 "하나님께 맹세하건대 그런 악독한 놈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할 뿐 아니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니 한 마리 새끼양 대신 네 배로 갚아 네 마리의 양을 주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는 "다윗 왕 당신이 바로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할 악독한 부자와 같은 자"라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정욕에 이끌리어 밧세바를 취하고 그 신하이며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고의적으로 전쟁터의 맨 앞자리에 서게 하여 간접살인을 한 자신의 악한 모습은 보지 못하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착취한 부자는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다고 목소리를 높인 다윗의 모습이 요즈음의 우리 사회 분위기와 연결되어 떠오르곤 합니다.
일부 교회 지도자 중에는 타종교와 정치인들은 신나게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죄악과 병든 모습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는 타종교와 정치인들을 신나게 해온 난도질을 멈추고 나단 선지자의 뜻하지 않은 지적을 받고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보고 크게 회개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엄청난 평가를 받은 다윗 왕처럼 우리 모두가 자신의 모습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성찰할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훌륭한 임금으로 추앙을 받고 있던 다윗 왕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지극히 관대한 잣대를 사용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지극히 엄격한 잣대를 사용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어느 한 도시의 동네사람들 50여 가구 대표가 모여 진지한 회의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 회의에서 자기 동네에 질주하는 자동차 때문에 주민들의 보행이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경찰서에 속도제한 청원서에 서명하여 제출했습니다. 경찰에서는 이 청원서를 받아들여 속도제한 표지판을 붙이고 단속을 시작하였습니다. 수 일 내에 다섯 사람이 단속에 걸렸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단속에 걸린 다섯 사람 모두가 그 청원서에 서명한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본인도 20대의 한창 나이였을 때, 버스에서 정신 없이 졸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 안달을 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들을 은근히 경멸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시간관리를 제대로 못하고 엉망으로 생활을 했으면 여러 사람이 타고 있는 버스 속에서 저렇게 입을 벌리고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졸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그들을 무절제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렇게 정죄하고 판단하던 바로 나 자신이 어느 날 귀가하는 버스 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깜빡 졸다가 내려야 할 버스 정류장을 한 정류장도 아니고 두 정류장이나 지나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너무 피곤한 탓이었다고 자위를 했던 내 모습 역시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는 가혹한 이중 잣대의 실상임을 깨닫고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을 판단하기 전에 우선 자기 자신을 먼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사람은 이상(Vision)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평범한 사람은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편협한 사람은 남에 대한 험담, 판단을 한다고 합니다. 자신에게는 관용하고 남에는 엄격한 잣대를 이제 바꾸어 잡고 자신의 모습을 날마다 성찰하며 앞날을 바라봅시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이루어 나가야 할 꿈과 비전을 나누기에 부지런하고 위대한 민족으로 도약했으면 합니다.

2. 외모로 판단치 말라
오래 전에 우리 나라에서도 상영이 되었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파란 만장한 삶을 살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실제 인물 토마스 로렌스의 일대기입니다. 그는 영국의 탐험가요 고고학자요, 군인이었는데, 이미 아는 대로 로렌스는 육군 장교로서의 복무를 그만두고 영국 공군에서 항공기 정비병이 되었습니다. 가끔 그는 토마스 하디의 집에 가서 그들 부부와 함께 차를 마셨습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토마스 하디의 집에서 돌체스터 시장의 부인과 한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시장 부인은 모욕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시장 부인은 하디 부인에게 "나는 일생동안 졸병과 함께 앉아서 차를 마신 적이 없다"고 프랑스어로 말하였습니다. 이 부인은 이 공군 정비병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깊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드디어 로렌스는 예의 바르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마담, 죄송합니다만, 하디 부인은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가 통역을 해드릴까요?" 이 말을 듣고 시장 부인은 기절할 듯이 놀라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비록 외모와 실제가 다 같이 보잘 것 없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결코 그런 자세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외모뿐 아니라 소문이 다른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비록 보잘것없이 보여도 한 인격으로 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 어떤 잡지에 이런 기사가 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명한 이스라엘의 여 수상이었던 골다 메이어의 수기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하도 못생겨서 사람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 심지어는 부모도 나를 시원치 않게 여겼다. 그래서 에라, 공부나 해야겠다 하고 열심히 했더니 결국은 오늘에 정치가가 되었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얼굴이 못생겼고, 눈도 작은 데다가 키도 작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가 칼뱅도 빼빼 마른 몸에, 눈이 나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으며,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몸과 얼굴이 깡마르고 다리는 유달리 길어서 고릴라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인물 사도 바울도 키는 작고, 시력도 좋지 않은 보잘것없는 외모를 지닌 분이었다고 합니다. 백범 김구선생은 과거에 낙방한 후 인생의 다른 길을 찾다가 부친으로부터 "네가 큰 일을 하려면 사람 보는 법부터 배우라"는 말을 듣고 열심히 관상학을 공부하다가 자신의 외모를 살펴본 후 크게 실망했습니다. 생긴 대로 운명이 결정된다면 자신의 앞날은 꽉 막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구가 외모에 집착하지 않고 다시 공부, 민족지도자가 된 것은 다음 글을 읽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얼굴 모양이 잘 생긴 것은 몸이 건강한 것만 못하고 몸이 건강한 것은 마음이 바른 것만 못하다."
하나님은 사람을 결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롬2:11, 골3:25) 사울이 불순종으로 하나님께서 버리심으로 이스라엘 왕을 다시 세우기 위해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갔을 때,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을 보고 그를 택해 기름 부으려 하자 하나님께서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사람은 그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그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하시고 다른 아들들도 다 물리치고 막내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또 뽕나무 위에 기어올라간 난쟁이 세리장 삭개오의 중심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로 하셨습니다. 이렇듯 주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습니다.(갈28:6, 엡6:9) 그런데 오늘날 교회안에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여 차별대우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외모라고 하는 것은 비단 용모뿐만이 아니라, 돈 있는 것, 똑똑한 것, 능력있게 보이는 것, 사회적 지위 등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이러한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 곧 진실한 믿음과 충성됨 그리고 정직성을 보시고 귀히 쓰는 일꾼으로 삼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4)
또한 신명기 말씀에는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신1:17),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신16:19)하였습니다. 일본 에도시대(1598-1867)에 이타쿠라 시게무네란 명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외부의 압력이나 유혹에 굴하지 않고 바른 양심에 서서 공정한 판결을 내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한 사람으로부터 "선생님이 그렇게 공정한 재판을 내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사람의 외모나 얼굴을 보지 않고 판결합니다. 사람에 대한 인상은 잘못하면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내 눈에 좋게 보인다고 다 선인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시게무네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의 얼굴만 봐도 판결을 할 수 있다는데 전 아직 그 경지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이며 독선입니까?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속사람일 것입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터지기 몇 해전, 오하이오주의 큰 농장에 한 초라한 소년이 찾아와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주인은 일손이 모자랄 때라 소년을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3년 뒤 이 "머슴"이 자기 딸과 사귀는 것을 알고 내 쫓았습니다. 그로부터 30년 뒤 주인은 낡은 창고를 수리하다 그 소년의 짐을 발견하고 내용물을 살피던 중 소년의 이름이 제임스 A 가필드라는 것과 현직 20대 미합중국 대통령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농장 주인은 대통령 사위를 맞을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풍조라 하겠지만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학벌과 재력, 집안 배경은 늘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결혼 상대를 고를 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만 좋으면 하겠다고 하다가도 막상 자신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면 어느 경우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거나 더 까다로운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조건을 다 원하고 그 위에 믿음까지 좋은 짝을 구하니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없지만 조건에도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선택에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뜻에 우선 순위를 두고,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7:24)
세종대왕 때에 청렴결백한 정치가로 유명했던 맹사성은 항상 허술한 옷차림의 촌부의 모습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성묘차 온양을 다녀오는 길에 비를 만나 용인의 어느 여관에 들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는 영남에서 올라오는 호화로운 선비의 행차가 있었으므로 맹정승은 방을 얻지 못하고 낭하 한 모퉁이에 쭈구리고 앉아 비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 바둑을 좋아하는 선비의 요청으로 대청 마루에 올라 바둑을 두게 되었는데, 서로가 신분을 알 수 없는 초면이므로 상대방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맹 촌부가 먼저 제의를 했습니다.
"우리 말할 때 묻는 말에 마지막에 공을 붙이고 대답 끝에는 당을 붙이기로 하자"고 하였더니 선비는 "서울로 간당"하고 대답했습니다. 관심이 생긴 맹 정승은 다시 묻기를 "무슨 벼슬이공?"하였더니 선비는 "녹사취재 벼슬이당"했습니다. 그래서 맹 정승은 "내가 힘써 줄공" 하였더니 선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자네 같은 촌부는 택도 없는 소리당"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환담을 하다가 선비는 서울로 올라와 과연 녹사취재 벼슬을 얻게 되어 3정승 6판서가 모인 정청으로 신고차 방문을 했습니다. 6조 판서 앞에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선비를 본 맹정승은 "어찌된 일인공?"하고 말을 건냈습니다. 낯익은 목소리에 선비가 얼굴을 들어 바라보니 금관조복의 좌의정이 바로 그 촌부였습니다. 전날, 촌부인 줄로만 알고 무례하게 대했던 선비는 정신이 산란해져서 말하기를, "죽을 죄를 지었당"하고 맥없이 대답했습니다. 그 후 이 선비는 맹 정승의 지도로 청백한 관리가 되었다는 사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을 외모로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1-12)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
어느 대학의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이 차례로 졸업장을 받고 있었습니다. 순서가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던 한 축하객에게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느 학생이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고는 총장과 악수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혀를 찼습니다. “참 세상도 많이 변했군. 저렇게 건방진 학생도 있으니. 이 학교는 4년 동안 무얼 가르쳤단 말인가?”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재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그게 아닙니다. 저 분은 사고로 한 팔을 잃고 대신 의수를 하고서 4년 동안 훌륭하게 학교를 다닌 학생입니다” 그러자 축하객은 얼굴을 붉히며 함부로 말한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우리는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판단은 빗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만 우리 인생을 공평하게 판단하십니다.
/한태완 목사(하나 교회)Http://allcome.c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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