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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욥 13: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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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욥 13:20-28) 

오랜 장마로 인한 잦은 비와 태풍이 지나간 후 가을 하늘이 얼마나 높고 맑고 청명한지 모르겠습니다. 기도하기에 제일 좋은 계절,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좋은 책에서는 좋은 향기가 나고, 좋은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그 향기가 스며들어 옆 사람까지도 행복하게 합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모두 이 향기에 취하는 특권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책을 읽는 기쁨을 꾸준히 키워나가야만 우리는 속이 꽉 찬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책과 함께 떠나는 여행으로 삶이 풍요로울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우리의 머리 속에는 시인 한 명이 생각이 납니다.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정말 아름다운 시입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경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무 가지에 다달은 까마귀와 같이“

그런데 오늘 정말 마른나무 끝에 다다른 까마귀처럼 정말 홀로 서 있는 한 사람의 주인공을 우리가 만나 보게 됩니다. 모든 것에서부터 배반당한 듯한 사람입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와서 3일 동안 같이 울어 주었지만 친구마저도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슬픈 사람이었고 고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욥인데 그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고 또 건강도 잃었습니다. 친구들마저 욥이 죄를 지어 그런 일을 당한다고 하면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친구들과 오랜 논쟁을 했습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죄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야 다른 뜻이 있을 거야." "아니야 너 죄 때문에 그런 거야" 계속해서 논쟁을 주고받다가 터질 것 같은 욥은 고개를 하나님을 향해 돌리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부분이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는 답답한 가운데 여러 가지 생각들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가 한 기도 속에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욥이 시험 끝난 다음에 이 기도를 다시 한다고 하면 몇 군데를 고쳐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급한 일을 당하면 그저 마음속에 있는 모든 생각들을 거르지 않고 그냥 그대로 하나님 앞에 쏟아 내게 됩니다. 하다 보면 스스로 문제 가운데 있는 그런 구절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답답한 사람은 이것저것 가릴 겨를도 없이 그렇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가운데 얼마나 많은 기도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가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6살 난 아이가 자기 어머니가 아기를 낳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어머니가 한숨도 못 자고 밤을 꼬박 새는 것을 보고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6살 난 이 아이가 어머니 옆에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어머니 지난밤에 이 아기 때문에 잠 한 숨도 못 잤어요. 너무 울보에요. 다른 아기로 좀 바꿔 주세요." 그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아기니까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은 기도를 그렇게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욥이 드리던 기도를 가만히 생각하면서 우리의 기도를 한번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가을에 성숙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욥은 이렇게 기도의 문을 엽니다. "주여! 주님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소서. 손을 좀 대지 마옵소서." 욥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손으로 치며 그를 괴롭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손을 거두어 줄 것을 지금 이 시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절 말씀입니다.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옵실 것이니이다" 그는 지금 자기에게 하나님의 손을 대시고 그를 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성숙한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손은 결단코 하나님의 자녀를 괴롭히는 손이 아닙니다. 공연히 하나님의 자녀들을 못살게 구는 그런 심술 맞은 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러는 이런 기도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게 왜 이러십니까? 왜 이렇게 저를 치십니까? 치지 마시고 이제는 손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더 이상 저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

어느 마을에 아주 망나니 같은 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버릇이 없기로 유명했고 문제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문제를 일으킨 아들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맞고 있던 이 아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과음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때려라 때려! 때리면 네 아들 죽지, 내 아들 죽냐!" 자, 이쯤 되면 이 아이는 문제입니다. 지금 아버지가 매를 들고 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아픈 매가 아니라 그 손이 바로 자기를 향한 사랑의 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펼치는 모든 손, 이 손은 때로는 아프게 느껴지고 괴롭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 손은 우리를 치료하는 손이요, 위로하는 손이요, 우리를 어루만지는 손이요, 싸매는 손이요, 새롭게 하는 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아들은 희망이 없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손이 어떤 손인지를 모르는 아들, 희망 없는 아들입니다. 그런 아들을 바로 키우기 위한 사랑의 손, 아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쓰다듬는 위로의 손인 것을 분명히 자식들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손은 세상을 창조하신 손이고 우리를 위로하는 손이며 우리를 치료하는 손입니다. 사망이 없지만 골짜기를 다니는 우리들을 구원하는 손입니다. 연약 중에 빠져 있는 우리를 강건하게 다시 세워 주는 손입니다. 잠시 동안 우리를 연단하시기도 하지만 그 연단을 통해서 바로 우리를 든든히 세우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그런 우리 하나님의 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12:6, 7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아버지는 아들을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징계하는 것은 죽도록 징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바로 세우기 위하여 강건하게 하기 위하여, 온전한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함부로 해석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깊고 온유한 섭리의 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러는 우리가 주님의 손을 보지 않고 손에 들려 있는 매를 볼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마치 그 손이 나를 죽일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다가 올 때가 있습니다. 마치 그 손이 나를 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우리에게 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욥도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주여!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소서."

그러나 이것은 바로 고쳐 써야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손이 지금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을 이렇게 저렇게 이기고 주물러서 아름다운 토기를 만들어 내듯이 또한 그 토기를 불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여 아름다운 토기로 굽혀 나오게 하듯이 우리 하나님의 손은 진흙 같은 우리를 만지시고 또한 두드리시며 불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셔서 우리를 지금도 완성시켜 나가고 있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64: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우리는 진흙,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대하시든지 비록 아픈 손으로 다가오시든지 또는 나를 죽이는 손이 아니라 만드는 손이요, 온전하게 하는 손이요, 회복하게 하는 손이요, 나를 더욱더 아름답게 빚어 나가는 손인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손을 내게 거두어 주옵소서"하는 기도는 온전치 못합니다.

주의 손을 떼지 마옵소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여 내게 손을 대지 마옵소서"하는 대신에 "주여 주의 손을 떼지 마시옵소서" 지금 하나님의 손은 나로 하여금 온전하게 만들고 치료하고 회복시키고 나를 빚어 가는 과정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계속해서 저를 만들어 주옵소서. 연단해 주옵소서. 계속해서 저를 만지시사 온전한 모습을 가지게 해 주옵소서.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이런 귀한 고백이 우리 속에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지금 받는 주님의 손길이 아프게 느껴지십니까? 고통스러우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손길은 지금 나를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 손길이 지금 나를 완성하고 있습니다. 그 손길이 지금 나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주여 주님의 손을 내게 떼지 마옵소서. 저를 만들어 주옵소서. 온전케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는 성숙한 기도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침묵하지 마옵소서. 내가 답답합니다. 말 좀 하시옵소서." 그의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욥에게 다가오는 고통, 육체적인 고통은 참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괴로운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는 것, 침묵하는 하나님의 침묵, 이것은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왜 이런 고통을 당하는지, 왜 이런 아픔을 겪어야 되는지 그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속 시원하게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한 마디도 그의 귀에 들려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 중에 제일 답답할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을 때, 내 문제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지 않는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는 순간에는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입에서도 똑같은 말이 나옵니다. "주님 제발 침묵하지 마세요. 말씀 좀 해 보세요." 그런 기도가 우리에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업그레이드는 여기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야말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을 때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생각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표현, 때로는 깊은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장 깊은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스바냐3:17절 말씀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지금 하나님은 욥의 심각한 상황을 보고 계십니다. 욥의 고통스러운 마음만큼이나 우리 하나님의 마음도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하실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사정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중간에 말씀하시면 중간에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욥의 고통의 현장 중에 있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은행에 돈 만원을 빚졌다고 생각하면 누구의 문제입니까? 그건 은행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입니다. 은행은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은행에 10억을 빚졌다고 생각하면 누구의 문제입니까? 그건 이미 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은행의 문제입니다. 매일 전화 걸고 난리 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 심각한 처지에 있을 때에는 이미 그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그 모든 상황을 보시며 가슴 아파하시고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 곁에 오셔서 일 하시고 힘쓰시며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믿어야 될 것입니다.

말씀하지 않고 침묵한다고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말씀하지 않는 순간은 하나님께서 가장 열심히 그리고 확실하게 일하는 순간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난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빚을 얻어서 자기 아들 대학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매달 용돈을 좀 넉넉하게 줘야 하는데 용돈을 주지 못합니다. 왜냐면 직장이 그렇게 넉넉한 직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늘 가슴이 찢어집니다. 아들은 불만입니다. 그런데 그날 직장을 마치고 돌아 왔는데 아들이 자기 방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상 위에는 아들의 지갑이 놓여 있었습니다. 지갑을 열어 보니 거기에는 대학생 지갑인데 단돈 2천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아휴 이 못난 아버지를 만나서 이 아기가 고생을 하는구나!" 이 아버지는 지갑을 열었습니다. 자기 지갑을 보니 거기에 3만원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전 재산입니다. 그것을 빼서는 아들의 지갑 속에 넣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이 내일 기뻐할 그 모습을 생각하며 흐뭇하게 잠자리에 들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부족한 것을 보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채워 주고 또 채워 주고 싶은 마음,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아버지는 자기가 없으면 채워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어려움을 아시고 채워 주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비록 아버지가 조용히 침묵하고 계셔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우리를 돌보며 새롭게 하고 고치며 채워 주기를 원하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보여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주머니를 알고 계시고 우리의 아픔을 알고 계시고 우리의 사정을 알고 계십니다. 그는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럼으로 “침묵하지 마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이 잠잠히 사랑하시는 침묵의 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저는 지금 주님이 일하고 계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저를 돌아보고 계신 것을 믿습니다. 설명해 주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면서 조용히 주님이 말씀하는 침묵의 소리를 듣는 믿음의 귀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침묵하셔도 우리를 향해서 사랑한다고 고백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어떤 상황 중에도 들을 수 있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욥은 자신의 발에 착고가 채워져서 꼼짝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사정을 표현합니다. "주님 나를 자유롭게 해 주옵소서. 내 발을 자유롭게 하옵소서." 그는 지금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27절 말씀입니다.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한정하시나이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꽁꽁 묶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금 질병의 사슬에 묶여있고 정죄의 사슬에 묶여있고 인간관계의 사슬에 묶여있고 좌절의 사슬에 묶여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하나님은 그를 묶어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더욱더 큰 은혜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자유를 누리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잠시 고통의 순간을 통과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끔 묶여 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꼼짝 못하게 묶어 놓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 왜 묶어 두십니까? 풀어주세요." 그러나 우리를 묶어 두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잠시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셔도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그대로 우리를 방치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묶어 두셨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실 그렇게 느끼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반석 위에 나의 발을 세우시는 순간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발을 사슴과 같이 하게 하시며 높은 곳을 마음대로 다니게 하는 놀라운 사람으로 연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3:19절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바울과 신라가 빌립보 감옥에 묶였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묶여 있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송하기를 시작합니다. 묶여 있지만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 크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착고의 그 모든 것을 풀어 주었고 옥문을 열어 주었고 복음의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간수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시고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묶여 있지만 사실은 묶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 그들의 발을 반석 위에 세우시고 묶여 있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이 더 잘 증거 되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찾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묶여 있으나 묶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발이 착고에 묶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발이 제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상태 그대로 주님 앞에 엎드리기만 하면 오히려 이런 고통 때문에 우리 발은 반석 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 발은 사슴의 발처럼 모든 역경을 딛고 모든 장애물을 마음대로 넘어서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여 내 발을 좀 풀어 주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대신에  "주여 내 발을 오히려 주님의 사랑의 줄로 더 묶어 주시옵소서. 주님의 귀한 은혜의 줄로 더 묶어 주시옵소서. 주님의 귀한 진리의 줄로 더 묶어 주셔서 하나님 손에 붙들려 연단 받아 나의 발을 반석 위에 세우시고 사슴의 발같이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

가난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들도 절망합니다. 불치병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자들도 절망합니다. 결혼 못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도 절망합니다. 신용불량자라서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용 우량자들도 절망합니다. 가을이라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봄에도 절망했었습니다. 내 맘대로 안 되어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맘대로 잘 될 때도 절망했습니다. 인생의 모순 때문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래도 절망하고 저래도 절망합니다. 풍요지수나 지식지수가 높아질수록 절망지수 또한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절망에서 예외 될 사람은 없으며 절망의 영향권 안에서 벗어나 절망의 사각지대에 숨을 자가 없습니다. 절망 앞에서는 영웅도, 위인도, 하나님의 사람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람은, 나보다 더 힘들고, 더 가난하고, 더 실패하고, 더 아픈 사람을 보며 용기를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야곱을 생각하며 성화됨의 가능성을 갖습니다. 모세를 보며 살인자를 쓰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를 보며 엉터리 같은 내 자신의 영성과 인격에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엘리야를 보며 우리와 같은 연약한 질그릇이었음에 한숨을 돌립니다. 만일에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 본래부터 훌륭하고 완전한 사람뿐이었다면 아마도 성경은 우리에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절망을 만나게 됩니다. 굳이 무엇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냥 사는 게 힘이 듭니다. 그냥 믿는 게 힘이 듭니다.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에 대한 중압감이 구름이 비되어 내리듯 우리의 심장을 압박합니다. 절망의 수렁에서 헤멜 수 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일어 날 수도 없고 기도조차 할 수 없습니다. 수저 들기가 힘들 때도 있습니다. 본래 수렁의 특징은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치면 더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그것 또한 불안의 수렁이 되어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빨려 들게 합니다.

이렇듯이 살다보면 누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절망의 수렁에서 사투를 벌이게 되는 날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예외일 수 없으며 위인이라고 다르지 않으며 기도의 거인이라도 봐주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절망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거절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기도한 것의 반대로 일이 전개되는 것 때문일 수 있습니다. 또한 삶의 모든 가능성과 미래에 대하여 희망의 여지가 없는 것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 어떤 사람의 변화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는 것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떠하든 우리의 절망의 포커스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 많습니다. 보통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으면 무조건 산 정상으로 올라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산위에 올라가면 길이 보인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어디가 정상인지 분별하기 힘들 때 극심한 절망에 도달하게 됩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만 보인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고, 기다릴 수 있고,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의 정상, 신앙의 최고봉이신 하나님이 안보이고 안 들린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어려움이야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겠지만 하나님이 안보이심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절망지수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다 터널이 무너져 터널의 입구와 출구가 봉쇄된 상태와 같은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예수 믿다 절망하고, 기도하다 절망하고, 사람으로 인하여 절망하고, 교회로 인하여 절망하고 가난으로 인하여 절망한 분이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듯 싶습니다. 주님이시라면 절망한 영혼들에게 어떻게 하셨을까요?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절망하냐'고 호통 치셨을까요? '믿음이 부족해서 절망했다'고 나무라셨을까요? '기도를 그렇게 못하니 당연히 절망하지 않겠냐'고 정죄하셨을까요?

절망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러나 절망의 회복은 누구에게나 경험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절망의 회복을 갈망하십시오. 하나님이 절망에서 건져내심을 보면 좀 의아하고 너무 일반적이기도 함으로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 되게 하는 자원입니다. 절망 중에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급파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지금도 절망 중에 있는 교회, 가정, 성도들을 신속히 희망으로 회복시키시기를 소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렇게나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드렸던 모든 기도를 이 가을 고쳐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손을 대지 마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주여, 주의 손을 내게서 떼지 마옵소서. 계속해서 저를 만드시고 빚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 고통의 순간 "주여 침묵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 대신에 "주여 침묵의 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주님 깨닫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묶여 있는 모든 것을 보면서 "주여 풀어 주옵소서."라는 기도 대신에 "주여 오히려 더 묶어 주옵소서. 은혜의 줄로 사랑의 줄로 내 발을 묶어서 반석 위에 세우시고 사슴의 발같이 나를 만들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성숙한 기도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나무의 뿌리와 같은 것이고, 또한 새의 날개와 같은 것입니다. 깊은 기도를 통해 영혼의 뿌리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고, 그리고 영혼의 날개를 펼쳐 자유로이 창공을 날 수 있습니다.

또한 골프를 치려면 값비싼 골프채가 필요하지만, 기도에는 아무런 도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테니스를 치려면 파트너가 필요하지만, 기도는 파트너 없이 혼자 할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며 언제라도, 어디서든 가뿐하게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가치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큰 것입니다.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무조건 하나님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 같이 생각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기도에 대한 전적인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야 어떻든 쎄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 앞에 항복하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미신적인 망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로 밀어 붙인다"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그것도 정신없는 사람들의 망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간절히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전제입니다.

주여,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올 가을에는 모든 이들이 가을 하늘이 파랗다는 것을 함께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같은 밤이면 찻잔이라도 기울이며, 사슴 같은 사람들과 가을을 마셨으면 합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까지도 사치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곧 다시 무릎을 조아려 주의 긍휼을 구합니다. 서있기 조차 힘들고, 아침이 두려운 분들의 삶의 질곡 앞에서 다시 허리를 동이고 퍼질러진 마음들을 옹쳐 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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