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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믿음 II - 벼랑끝에 서는 용기 / 히 1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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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브라함의 믿음 II - 벼랑끝에 서는 용기 
본문 : 히11:17-19


제가 오늘 제목을 '벼랑끝에 서는 용기'라고 표현했는데, 벼랑끝에 서는 용기라는 말은 국제 예수전도단(YWAM)의 창시자인 로렌 커닝햄이 쓴 책의 제목입니다. 하나님 한분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벼랑끝에 서는  용기'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믿음은 일면 벼랑끝에 서는 용기와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믿음은 자연스럽고 쉽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담대함을 필요로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또 꼭 떨어질 것같은 느낌을 극복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다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관찰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능력 등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한 기대와 신뢰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확인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못하느냐입니다.

오늘 본문이 주제로 삼은 스토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사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였던 그 장면입니다. 많이들 아시는 스토리이지만 그 장면, 창세기 본몬을 통해서 먼저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22:1-14>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바치라고 하자 아브라함은 군소리하지 않고 이삭을 정말로 바치려고 하였고 이삭을 정말로 바치려고 하자,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말려서 이삭을 살리고 숫염소를 대신 제물로 바친... 극전 반전의 한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나타난 믿음의 진실을 저희는 오늘 배우고 확인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의 원리를 배우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기억하고 싶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test)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 시험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세 가지 의미의 단어가 한꺼번에 "시험"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시험(test)과 유혹(temptation)과 시련(trial) 이 세 가지 의미 모두에게 쓰였습니다.

시험(test)은 마음과 삶의 상태를 드러내고 확인하기 위한 도구, 절차를 말하고 유혹(temptation)은 사람을 넘어뜨리는 악한 목적으로 부추기는 것이고 시련(trials)은 환경적 어려움과 반대, 장애물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의하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의 시험은 유혹(temptation)입니다.

<약1:13>이 명확히 선언하듯이 하나님은 아무도 유혹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test)하십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을 준비시키는 과정 가운데서 이 시험을 종종 사용하십니다.

오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는 유명한 사연의 시작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test)하시고자 하는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창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시험하십니까?

이것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왜 시험을 봅니까? 기죽게 하려고? "니 꼬라지를 알아서 설설 기어라"고 그럽니까? 아닙니다. 자신의 실력을 확인하고 더 나아가 학생들의 실력을 높이기 위하여 시험을 보는 것입니다.

운동하는 사람들, 평가전을 왜 치릅니까? 그들의 실력을 확인하고 더 나아가 실력을 높이기 위하여 평가전을 치릅니다. 초등학교 운동회도 예행연습을 시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짜 운동회에서 더 잘 할 수 있도록 예행연습을 시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약1:2-4>을 보십시오. 2절의 시험은 trail, 시련이고 3,4절의 시험은 테스트(test)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냥은 생기지 않는 소중한 자질, 인내를 체득하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온전케(성숙하게) 만드시기 위하여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당신도 시험(test)하십니다. 삶의 역경, 곤경을 통하여, 당신도 시험하십니다. 아니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시험, 징계와 같은 적극적 간섭이 없다면 당신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까닭없는 곤경을 당한다고 느껴질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가 거센 푹풍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힘들게 느껴질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케 하기 위한 시험일 수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중요한 한 phase는 다른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기적 관점, 세상적 관점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의 인생을, 삶의 단면을 바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삶이 쉽지 않습니까? 역경의 파도가 거세다고 느껴지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성숙케 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test, trial임을 마음으로 바라보십시오.

또 간혹은 자신의 삶에서 겪는 어려움 앞에서 이것이 마귀의 유혹일까, 하나님의 시험일까, 세상의 시련일까 고민하느라 많은 시간 소요하는 분들이 있는데, 고민하느라고 너무 시간보내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유혹이든, 시험이든, 시련이든 이기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일까 고민하느라고 시간만 낭비하지 마시고 유혹이든 시험이든 시련이든 하나님을 담대히 신뢰하여 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으로 시험을 통과하였습니까?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통과했던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는 믿음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믿음은 느낌, 감정을 이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을 쉽게 기록하였는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였을 때, 그 말씀을 처음 듣는 순간의 아브라함의 느낌과 정서가 어떠하였을 것같습니까?

모리아산을 향하여 삼일 길을 걸어가면서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삭이 "아부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라고 물어 보았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어느 순간 물이 쏟아지듯이, 아브라함의 부정(父情)이 왈칵 쏟아질 것같은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순간순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처음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부터.. 삼일 길을 가는 동안, 칼을 들어 이삭을 잡으려 할 때까지 그가 감정에 치우친 하나의 흔적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막판에 이삭을 붙잡고 "아이쿠 이놈아, 지럴허덜 말고 어서 와서 제물로 바쳐라~" "아부지, 해도 너무하십니다~" 애끊는 판소리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기계처럼 무정한 사람이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마음에서 믿음의 생각이 자연스런 정서를 이긴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믿음을 자꾸 느끼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천국이든 지옥이든 헤까닥 체험하면 잘 믿겠는데..." 이런 생각들을 하지만, 한번 충격적인 느낌이 절대로 믿음을 세워주지 못합니다.

다시 이 말씀 기억합시다. <롬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느낌이 아니라 근거가 분명한 것입니다.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의 구원은 황홀한 혹은 신비한 느낌의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20세기 기독교 지성의 대표자인 존 스토트 박사님의 표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감정은 매우 쉽게 변한다. 날씨나 환경, 또는 건강 상태에 따라서도 감정은 변한다. 우리는 변덕스럽고 기분에 좌우되는 종잡을 수 없는 피조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감정변화는 영적인 상태와 상관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감정변화는 영적인 상태와 상관이 없습니다.

예) 3F 이야기.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당신의 믿음이 견고하게 서기 위하여, 변덕스런 감정에 이끌리지 말고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움직이시기를 권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에, 감정의 풍부함은 뒤따라 옵니다.


둘째로, 믿음은 내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것마저도 기꺼이 드리는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존재입니까? 아들, 딸을 둔 애비, 에미 형제님 자매님 여러분, "내가 죽을지언정 내 아들, 내 딸은 절대로 죽게 못한다" 이것이 자연스런 인간의 부정, 모정 아닙니까? 하긴 요새 하도 말세지말이 되어서 이러지 않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널려 있지만... 말세의 한 징후가 무정한 것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보편적인 인간들에게 죄인일지라도, 자식은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아들을 다섯 둔 집에 자식이 하나도 없는 절친한 친구가 아들 하나만 달라고 애원을 하였습니다. 합리적으로 다섯이니까 하나쯤 줘도 괜찮겠지 생각하고 그래 생각해보자 대답하고 집에 와서 생각을 해 봅니다.


첫째는 장남이니까 당연히 안되고 둘째는 제일 똑똑하니까 안되겠고 셋째는 몸이 제일 약하니까 품안을 벗어나면 걱정이 끊이지 않을 것같아서 안되겠고 넷째는 넘 잘 생겼어.. 우리 집 모델인데 누굴 줘? 안되겠고 그리고 다섯째는 그 귀여운 막내를 안보고 어떻게 사나...줄 아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못 줬습니다.

아들 다섯도 그런데, 이삭 어떻게 해서 얻은 아들입니까? 100세에 기적같이 얻은 아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들, 얼마나 사랑스럽고 대견스럽고 자랑스럽겠습니까? 제가 아무리 설명해도 처녀 총각들은 몰라... 빨리 시집, 장가들 가십시오.( 경태, 경민이에게 하는 말은 아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창22:12>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들 이삭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을 말리면서 해 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번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공산당 빨갱이 되듯이 무정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제일 강한 정서, 제일 강한 정서인 가족의 사랑,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도 미움이라고 표현할 만큼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열망이 많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을 소개하실 때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들어 보셨습니까?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면, 당신의 피조물이 딴 짓하고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은 관념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이 깨달음으로 그는 회개하였습니다.

거꾸로 우상이 무엇입니까? 나무나 돌로 깍은 것이 우상이 아닙니다. 우상에 대한 성경적 정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아들도, 애인도, 재산도, 명예도 하나님의 축복일 수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지만 만약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마음보다 더 우선적인 마음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그에게 우상입니다.

하나님이 독재자처럼 느껴지십니까? 당신의 느낌을 넘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분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통치자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할만큼 당신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왕이십니다.

그 하나님이라면,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 한분 의지, 의존하도록 권고하심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도록 권고하심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오늘 당신의 마음은 무엇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까? 당신의 마음은 무엇을 제일 소중하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마음은 무엇의 의존하여 살아가고 계십니까? 자식? 애인? 돈? 당신 자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십시오. 아브라함을 거울삼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신바람나는 체험은 그 거룩한 믿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셋째로, 믿음은 내 생각으로 그 과정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아들입니까? 그냥 아들이 아닙니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입니다. 이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후손을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되리라 하신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참 이랬다 저랬다 하시네" 이런 생각이 얼핏 듭니다.

도대체 뭐가 맞는 말이야? 어제는 이 아들을 통해서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시겠다더니.. 약속의 씨이면, 애지중지 잘 키워도 아쉬운 판에 오늘은 이 아들을 죽이라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으니...

아브라함의 마음에도 이 딜렘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딜렘마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히브리서 본문 보십시오. <19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어떻게 생각했다구요?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시니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이고 오늘은 아들을 죽이라고 하시니, 내가 죽이면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게라도 해서 약속을 이루시겠지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된다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되는 명령이라고 불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모순되어 보이는 상황, 생각의 딜렘마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를 져버리지 않았으며 또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네모난 머리로 판단하여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여 거부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아브라함의 생각, 추측했던 것과는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내가 제물로 바쳐 죽은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죽음 직전에 아브라함을 말리셨습니다.

정작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브라함의 생각과 달랐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은 모순처럼 보이는 상황, 딜렘마의 처지에서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면, 그렇게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만 조금만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과 우리의 현실 상황이 다르게 전개되는 것같으면 얼마나 쉽게 불평하고 원망하고 심지어 아예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버리고 맙니까?

"아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더니.. 내가 얼마나 열심히 매달렸는데 안들어주시지 않았습니까? " 그리고는 하나님은 틀렸고 내가 옳다는 도도한 눈빛을 쳐들고 반항하기를 잘 합니까?

언제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당당하게 하시더니 십원짜리 동전 하나도 안 주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온다구?" 나도 순진할 때에는 열심히 쫓아 댕겼는데, 이젠 안 속는다, 안 속아.. 다 교회 장사하려고 하는 소리지."

우리는 모순되어 보이는, 아니 조금만 어렵게 느껴지는 상황이 되면 얼마나 빨리 오만한 목을 쳐들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조롱하듯 내팽개치기를 잘합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올 것같은 상황, 이 상황이 하나님의 시험(test)이 혹시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복에 매여 있는지/ 당신의 영혼, 영원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지를 확인해 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이 혹시 아닐까요?

당신의 신앙이 소위 기복신앙인지 아니면 생명력있는 제자도인지 깨우치시며 나아가 마침내 당신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신을 빛처럼, 향기처럼 발하도록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시험 아니겠습니까? 

선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르게 바라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심지어 판단하는 그 현장은, 하나님께서 오히려 당신을 인내케 하고 온전케 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시험의 과정일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의 시험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도무지 얻을 수 없는, 돈으로도, 명예로도 살 수 없는 "속사람의 강건함, 정금같은 믿음, 눈부시도록 고결한 마음, 가슴뭉클하게 전달되는 겸손의 아름다움"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득하게 하시기 위한, 선한 뜻 아니겠습니까?


다윗의 고백을 기억해 보십시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율례를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인간의 참을성 없는 조급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팝콘 튀듯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편리하면 "헤~ 하나님 사랑합니다" 했다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조금이라도 값지불을 해야 하면 "이건 아닌 것같은데.." 침울해지는 우리의 모습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이 선하십니다.

그 선하신 인도하심의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안거치고 소위 평탄한 길(easy way)만 간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기에,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딜렘마에 직면하게도 하시며 곤고의 강을 건너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침내 선하십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지나온 모든 과정들, 여정들에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의 손길(touch)이 안미친 곳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최선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제일 크게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이 아닌 것처럼, 최악인 것처럼 느끼하게 느껴질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자격없는 나를 사랑하시는 은혜의 하나님.. 이 믿음을 붙드십시오. 이 믿음을 간직하십시오. 마침내 당신에게도 위대한 믿음의 승리가 선포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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