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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 롬 8: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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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성경말씀 : 로마서 8:26-27

우리는 매 순간 공기를 호흡하면서 살아가지만, 공기의 고마움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밀폐된 공간에 갇히거나 매연이 심한 장소에 가면 신선한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절실히 깨닫습니다. 사실 공기처럼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이 없이는 우리의 영적 생명을 부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숨쉬듯이 성령님을 호흡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령님이 공기와 같은 물질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거룩하신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 삼위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한 성령님의 역할이 공기처럼 절대적이라는 뜻입니다.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는 사람은 건강하듯이,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살아가는 성도는 영적으로 건강합니다.

이 시간 저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이라는 설교를 통하여 성령님께 대하여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진리를 증거함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성령님이 누구신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장은 천지만물의 창조에 관한 것입니다. 그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였고,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언급한 “하나님의 신”은 곧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욥기 33장 4절에는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성부와 더불어 성령께서도 창조에 함께 참여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성자께서도 창조에 참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신 3절 말씀이 이를 증언합니다. 여기서 “가라사대”는 곧 말씀이신 성자를 통해서 창조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절로 3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는 ‘말씀’이신 성자께서 창조에 참여하셨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삼위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알고 보면 성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이신 사실에 대하여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이같이 말씀했습니다. “7)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10)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찌라도 12)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있었던 한 불행한 사건이 나옵니다. 그 당시 성도들은 주 안에서 형제 사랑을 나누는데 힘썼는데, 그 중에는 복음 전파와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해 달라면서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자연히 그런 사람들은 성도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때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치기로 의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땅을 판 돈의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 앞에 내 놓고 그것이 땅 판 돈 전부라고 말했습니다. 땅을 판 돈 가운데 얼마를 바치든지 그것은 그들의 자유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잘못은 땅 판 돈 일부를 바치고는 전부를 바쳤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고 하니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속인 것을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성령님을 일컬어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거룩하십니다. 요즘 한국 기독교 안에는 교리적으로 잘못된 사람들이 있어서 예언 집회를 하면서 자기들이 사람들에게 성령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처럼 선전합니다 마는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서 경건한 마음으로 성령님을 예배하고 그 은총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성령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창조에 동참하셨을 뿐 아니라,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지대한 역할을 하십니다.

첫째로, 성령님께서는 인간의 죽은 영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을 적에 그의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누구나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영이 죽었다 함은 영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이 있긴 하지만 영으로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의 역할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이 죽었으므로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섬기려면 먼저 죽은 영이 살아나야 합니다. 이를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한자어로는 중생(重生)이라고 합니다. 일본어 성경에는 신생(新生)이라고 번역했는데,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죽은 영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요? 한번은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유대의 최고 종교재판소에 해당하는 산헤드린의 회원이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성경 지식이 깊은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대체로 예수님을 적대했으나 니고데모는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니고데모는 도무지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무나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아무나 나사렛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거듭난 사람이라야 합니다. 영적인 신생을 경험한 사람이라야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거듭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는 과학적인 진리나 철학적인 진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성경이 다루는 진리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누구나 열심히 탐구하면 과학적인 진리나 철학적인 진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진리는 다릅니다. 제 아무리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라도,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도 성경을 읽고 제 스스로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과거에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진영을 적화할 목적으로 성경을 많이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성경을 고전의 하나쯤으로 여기고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계고전 목록에는 항상 성경이 올라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읽어도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와 삶에 유익한 교훈을 아는 정도로 그치지, 구원의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아서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령한 말씀이므로 인간의 능력으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얼마든지 성경을 읽고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생 경험이 많은 어른들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하지만 교회에 나오는 어린이들은 확실하게 알고 믿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고 하셨습니다.


셋째로, 성령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9절에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인들은 그 속에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점이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속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살아가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지만, 불신자들은 제 소견에 좋은 대로, 욕심에 따라 살아가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 속에 성령님께서 임재 해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소유를 표시할 때 도장을 찍습니다. 은행통장에도 도장이 찍혀 있고, 집문서에도 인감을 찍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으로 도장을 찍으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성령으로 인 쳤다는 것은 우리 속에 성령님께서 와 계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성도들의 영원한 운명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인을 쳐서 자기 소유로 삼으셨으므로 사탄이 감히 넘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성령님께서는 영원히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한 세상 사노라면 뜻하지 않게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을 때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연약한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를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의 의지와는 달리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 드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야지 결심하였건만 그것은 생각에 그칠 뿐이고 여지없이 실패한 자신을 발견하고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고 탄식합니다.

또는 불신 가족으로 인해 핍박을 받고 믿음 생활에 후퇴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또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고 하셨건만,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근심, 걱정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건만 사랑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미워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지를 잘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육신에 속한 일을 좋아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할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며 의기소침해 집니다. 기도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지만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또는 기도를 하는데 내가 보아도 중언부언에 불과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힘이 소진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밤중에 자다가 “불이야!” 소리를 들으면 피신해야겠다는 생각은 하면서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시험이 다가오면 얼마든지 이길 것 같았는데 정작 시험을 당하고 나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당황해 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마음은 부끄러움에 사로잡히고 주님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낙심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 같은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님께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니 성령님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련과 시험이 다가와도 너끈히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되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심으로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성령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은 우리가 처한 형편을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실패를 성령님께서는 당신의 일이라도 되는 듯이 탄식하시면서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대신 기도해 주시는 것이 그렇게 큰 도움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도의 위력을 믿는다면 그것이 가장 위대한 도움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로 작정하시면 우리는 당면한 문제로 인해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면 여기에는 몇 가기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야고보서 4장 2절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하신 대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야고보서 4장 3절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하신 대로,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는, 하나님의 응답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서 1장 6절로 8절에는 “6)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고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기도에는 이와 같은 결함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우리를 위해 드려주십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간구하시기 때문에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까지 우리가 은혜롭게 지내온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해 주신 덕분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하여 실패하고 낙심해 있을 때 위로해 주십니다. 어려운 시험을 만나 겁먹고 있을 때 격려해 주시고 감당할 힘을 더해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슬퍼할 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권면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성령님의 권면에 순종하고 그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에 “아니요”라고 하지 마시고 “예” 하고 순종하십시오.

만약에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순히 순종하면 계속해서 성령님의 감화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감화하시고 바르게 행할 바를 지시해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어서 거부하고 제 생각에 좋은 대로 행하면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근심하십니다.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파멸시키는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에베소서 4장 30절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는 “성령을 소멸치 말며”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소멸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깨달음을 주시고 권면하실 때 순종하지 아니하고 성령님의 생각을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생각을 계속해서 거부하는 것은 마치 난로에 물을 끼얹어 불을 꺼버리듯이 성령을 소멸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심령이 돌같이 완악해지고 강퍅하게 됩니다. 성령의 우로가 내리지 않으니 우리 마음이 사막처럼 삭막하게 됩니다.

성도와 성령님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인격적인 관계는 서로를 존중할 때 지속되고 발전하는 것이지 한쪽이 다른 쪽을 무시하고 거부하면 파탄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한번 상처 입은 관계를 회복하려면 그야말로 눈물어린 회개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내용을 명심하고 항상 성령님을 존중하고 그 인도하심에 기쁨으로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사모하여 읽고 듣는데 힘써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 보니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검은 공격과 방어에 다함께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세 번에 걸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으나 세 번 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마귀의 시험을 통쾌하게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6장 18절에 보니,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되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의 폭을 넓혀서 여러 성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마음을 넓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할 때 나 중심의 편협한 상태를 벗어나서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5장 18절에 보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그 대신 세상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19)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언제나 성령충만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속에 임하여 계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그 인도하심에 기쁨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을 힘입어 날마다 자아를 이기고 시험을 이기고 사탄을 이기는 삶을 살아가실 뿐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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