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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위로의 하나님 (고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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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든 위로의 하나님
본문:  고후1:3-5

[서론]

오늘날 우리 사회는 스트레스 사회입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날마다 받으며 살아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어린 초등학생부터 은퇴하신 분까지 모두 다 받고 살아 갑니다.  어린 초등학생이 얼마나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견디다 견디다 못해 자살해 버리고 말아 버립니다.  사람들이 겉은 멀쩡해도 속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고 멍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면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성인병이라는 것은 사실 모두 이 스트레스에서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뇨라는 것은 옛날에는 돈많은 어른들만 걸리는 병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이런 병에 걸립니다. 스트레스 때문이지요.  암도 이 스트레스를 해결하지 못할 때 잘 걸리게 됩니다. 

결국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견딜 수 없을 때, 육체도 병이 들게 됩니다. 그러면 그 해결책도 마음을 치료해야 합니다.  마음의 치료는 위로입니다.  즉 사람들은 마음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위로가 있어야 스트레스로 멍든 가슴이 치료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인위적인 방법”을 찾습니다.  술로 잊으려고 합니다. 마약으로 잊으려고 합니다.  이런 것으로 마음이 위로 받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잠깐 동안 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위로는 없습니다.  그것은 더욱 큰 문제를 불러 오게 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자연으로 돌아가 거기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합니다.  “자연적 방법”입니다. 그래서 숲으로 가고, 등산도 하고, 운동도 합니다.  이런 방법은 상당한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큰 문제가 생기고,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스트레스가 생길 때에는 자연적인 해결 방법도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최종적인 해결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선포하기를, 우리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하나님,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벌레만도 못한 인간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세상 어디에서 이런 말을 들어 보았습니까? 우리가 상상한 하나님의 모습은 세상을 다스리고, 주관하고, 악한 사람을 벌주고, 세상을 심판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인간을 붙잡아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니! 얼마나 파격적인 모습인지 모릅니다. 

만약 이 성경 말씀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정말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인간이 경험한 그 어떤 위로보다 훨씬 더 뛰어난 위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위로해 주신다면, 그 위로는 인위적인 위로나 혹은 자연적인 위로와는 차원이 다른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을 한번 상고해 봅시다.  성경에 보니, 죽겠다고 외치던 사람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다시 회복되는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그 유명한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그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 혈전을 벌렸습니다.  그리고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 직후에 모든 것이 꺼꾸로 변하고, 자신은 사막으로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하든지, 로뎀나무 밑에 누워 “하나님, 나 죽겠습니다. 내 생명 이제 거두워 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절망에 허덕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서는 다시 회복되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이러한 놀라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 위로는 마치 진통제와 그 효과가 비슷합니다.  그렇게 아프던 사람이 진통제 주사 하나를 맞고나니, 그 즉시 아픈 것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진통제는 부작용이 많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맞으며 살기는 힘이 듭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이런 부작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의 고통을 이김,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은 “인위적인 위로”나 혹은 “자연적인 위로”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너무나 크고 강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만이 효과가 있습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교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그 어려운 피난생활을 하며, 사회적 멸시를 당하였고, 감옥 생활을 하며, 시체가 썩어가는 공동묘지에서 생활하는데도 기쁨으로 담당했으며, 감사함이 넘쳤으며, 은혜 넘치는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도저히 살 수 없는 환경에서도 그들은 기뻐하며 살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위로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그 백성들을 위로해 주십니다.  어떤 때는 부드럽게, 어떤 때는 혹독하게, 어떤 때는 가슴 벅차게 만들면서 위로해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모습을 보고 배울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위로하십니까? 


[1] 눈물을 닦아 주시면서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부드러우신 분입니다. 여름날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같은 분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시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안아 주시면서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눈물이 있을 때에 그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눈물이 없는 눈에 눈물을 닦아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합니까?

먼저 자신의 죄악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회개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가족의 구원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특히 짝믿음의 가정들은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울어야 합니다.  그것이 마음에 큰 부담이 되어 울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어 달려야 합니다.  그때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또한 자녀들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수능 시험을 앞둔 자녀를 두신 부모님들, 자녀를 위해 울며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자녀의 앞날을 위해 울며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자라서 독립할 때에 우리나라 상황이 어떻다고 보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경쟁이 치열하고, 훨씬 더 힘들고, 어렵고, 스트레스 많이 받으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불쌍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생각하면 불쌍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앞날을 위해 울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시면서 자신을 위해 우는 예루살렘 여인들을 향해 “예루살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손들을 위해 울어라”고 했습니다.  조상들이 저질러 놓은 죄악 때문에 누가 고통을 당합니까?  자손들이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여인들을 보면서 “너희 자손들을 위해 울어라” 했습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리 자손들이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저질러 놓은 잘못 때문에 자라나는 우리의 자손들이 고통 중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손들이 당해야 할 고통과 고난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울어라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이 나라와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범죄하고 하나님을 노엽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때에 그 진노를 당하는 사람은 우리의 자손들입니다. 이들의 환난을 보면서 울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자손들이 당하는 고통입니다.  이런 고통을 위해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이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울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처럼 나라와 민족을 앞에 두고 우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울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눈에 눈물이 메말랐습니다.  옛날 우리 선배들은 기도할 때마다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새벽기도 마치고 나면, 바닥에 눈물자국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눈물이 지금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눈물의 기도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통탄할 일입니다.  우리 성도는 울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울어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앞날을 위해 기도하며 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민족의 죄악을 앞에 두고 울어야 합니다.  이러한 울음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귀한 향기입니다. 이런 향기가 하늘을 향해 올라갈 때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고,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 위로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줄 것입니다.  눈물의 기도자가 되어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하시면서, 때로는 때리시는데, 한대 얻어 맞아 아픈 것이 도리어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때리시는 매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관하시며,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내가 잘못하여 하나님의 매를 맞으면, 도리어 감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살아 있으니, 아직도 여기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잘못하고, 우리 민족이 범죄했는데 매를 들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는 것이고, 민족을 포기하고 이제 멸망시킬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우리를 때리신다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아직도 우리에게 회복할 소망이 있음을 말합니다. 

하박국 선지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 중에 이렇게 악한 사람이 잘되고 선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가? 만약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을 심판하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팡이로 백성을 때리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때에 하박국은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매가 우리에게는 위로가 되는 것은 마치 아버지의 꾸지람을 들은 아들이 얻는 위로와 같습니다.  꾸지람을 들을 때는 기분이 좀 나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아버님이 아들을 꾸짖을 정도로 건강하시고 정정하시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하게 될 때에 아버지의 꾸지람이 오히려 위로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하나님의 지팡이는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도구입니다.  양은 이 지팡이를 보고 그 험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 갑니다.  만약 한 발이라도 잘 못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지는데, 그 지팡이가 앞에서 인도하고, 막대기가 잘못된 발걸음을 때려서 교정해 주어야 안전하게 갈 수 있습니다.  반항적인 양이 막대기를 따르지 않고 다른 길로 갈려고 방향을 틀면 목자의 막대기는 사정 없이 때립니다.  그 매가 양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양을 따라 멸망으로 가는 다른 양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는 우리를 때려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우리를 잘못을 지적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막대기와 지팡이는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매를 얻어 맞는 사람은 위로 받는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새 소망을 주심으로 위로하신다

하나님은 소망을 주심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 소망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십니다.  이 소망이 있는 사람은 결단코 낙망하지 않습니다. 이 소망이 있는 사람은 현재의 생활이 아무리 힘이 들어도 견디어 냅니다.  왜냐하면 소망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0:31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고 했습니다.  누가 “새 힘”을 얻습니까?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그 사람은 새 힘을 얻어 현재의 고통과 고난을 이겨 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2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소망과천국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우리는 기다립니다. 종말을 기다립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 거기서 영원히 살아 간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 약속이 우리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곧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눈에 눈물을 닦아 주시고, 막대기와 지팡이로 때리시면서 인도하시고, 소망과 비젼을 주시면서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우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한가지 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세상에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받도록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 혼자 위로 받았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주위에 힘들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위로 받을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된 도리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모든 성도 위에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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