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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받은 성도의 신앙자세(엡 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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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은 성도의 신앙자세
에베소서 3장 7-13절/

<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머뭅니다 >

지난 주 월요일 남서울 목회자 포럼에 속한 몇 명의 목회자가 만나 교제를 하는데, 한 분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2년 전, 그분이 교회에 부임할 때 교회에 아픔이 있어서 많은 성도들이 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임한 후 그런 성도들을 찾아 심방하다가 수지에 사는 어떤 집사를 찾아갔는데 전혀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사가 마음이 가난하게 되어서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지금 남편이 교도소를 갔는데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분의 남편은 청계천의 10평도 안되는 점포에서 인터넷 관련 사업을 했는데, 누가 사실과 다른 일로 고소해서 27일간 교도소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아내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남편도 교도소에서 나온 다음부터 함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뒤 이 남편은 매주일 교회에 제일 일찍 나와서 지금까지 2년 동안 한번도 교회청소를 거른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축복하시기 시작하는데, 1년만에 엄청나게 그 점포가 커졌고, 작년에는 코스닥에 상장했는데 그 회사 주식을 사려고 411대 1의 경쟁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산업자원부 장관상, 수출금탑상, 성남시장상 등 여러 상을 휩쓸었는데 정작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상은 작년 12월에 교회에서 준 봉사상이었고, 지금도 변함없이 청소로 봉사하며, 제일 많이 헌신하면서도 제일 조용히 지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겸손히 헌신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은혜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이고, 겸손함을 잃지 않는 한 은혜도 계속 그의 곁에 머물러 있게 하실 것입니다.

복음에는 구원의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무수한 은혜의 선물이 뒤따라오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의 선물을 주실까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우리는 은혜의 선물을 받고 입을 딱 씻는 사람이 되지 말고, 은혜를 받고 받은 은혜를 되돌려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좀더 헤아리며 사는 선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우리 곁에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 오늘에는 오늘의 체험을 가져야 합니다 >

지금 우리의 삶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과거에 대단히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과거의 은혜 체험에 대한 간증은 적을수록 좋습니다. 더 중요한 간증은 오늘 우리가 날마다 체험하는 은혜에 대한 간증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실의에 빠진 제자들이 사명을 버리고 디베랴 바닷가로 가서 고기를 잡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고,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주님이 오셨음을 깨닫고 베드로는 수영을 하고 다른 제자들은 배를 몰고 급히 육지로 올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올라보니 숯불이 있었고 숯불 위에 생선과 떡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습니다(9절).

바로 그때 주님께서는 "이제 준비된 생선과 떡을 같이 들자!"고 하시지 않고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 오라!"고 하십니다(10절). 이미 생선이 준비되어 있는데 왜 새로 잡은 생선을 가지고 오라고 하셨을까요? 함석헌 선생님은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오늘에는 오늘의 체험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우리가 축복 받았다고 하는 간증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보다 지금 주어지고 있는 은혜를 감사하면서 매일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체험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오래 전에 있었던 남의 간증에 감탄만 하지 말고, 오늘 나의 삶에서 체험되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증을 내가 만들어 가며 살아야 합니다.

인생 최대의 성공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생 최대의 불행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은혜에 대한 감동과 감격이 없으면 인생의 큰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그런 영적 무감각은 핍박보다 무섭고, 유혹보다 무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핍박과 유혹은 대적의 실체가 있어서 영혼의 대비를 할 수 있지만 무감각은 그런 대비도 하지 못하고 영혼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등을 보이는 자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모습은 뒷모습입니다.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릅니다. 돌아선 등은 그가 어떤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그가 머물다 간 자리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람임을 잘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은혜 받고 난 다음에 어떤 존재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이유 >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까?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주님의 풍성한 축복을 이방인에게 전하라는 사명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사명에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은혜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 비로소 판명 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한 학생이 물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졌습니다. 그때 어떤 남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헤엄쳐 가서 그 학생을 구했습니다. 학생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습니다. "아저씨! 저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그 남자가 말했습니다. "괜찮다. 다만 너의 생명이 구할만한 가치 있는 생명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라! 그러면 나도 너를 구한 보람이 있을 거야! 그것이면 족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만한 재목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증명이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주님의 풍성한 축복을 이방인에게 전하라는 사명을 이행함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선교에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나타내는 척도가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선교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선교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 선교하셨고, 승천하실 때 마지막 명령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선교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행 1:8).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도 선교와 관련되어 재림하실 것이고, 재림하신 후에는 우리의 선교에 대한 관심과 실천을 보고 상급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재림과 관련해서 2가지 필요한 조건이 나옵니다. 첫째 조건은 '유대인의 회개'입니다. 마태복음 23장 37-38절 말씀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신약 40페이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주님은 유대인들을 사랑으로 품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치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결국 이 말씀이 있고 약 40년 후에 예루살렘은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완전한 폐허가 되고, 유대인들은 1900년 동안 나라와 영토가 없는 백성으로 전 세계를 떠돌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님은 39절에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역설적으로 예루살렘 백성들이 회개하고 "주님! 찬송합니다. 저희를 찾아와 주소서!"라고 하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유대인 선교'는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위한 둘째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말은 선교를 통해 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되면 주님께서 오신다는 말씀으로 세계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 선교에 동참하는 자가 가져야 할 자세 >

그처럼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가 바로 선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사로 나가지는 못해도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힘써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교에 동참하는 삶을 살려면 꼭 필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1. 용서하는 자세

우리가 세계 선교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국경을 넘으려면 먼저 우리 주변에 있는 마음의 장벽부터 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하는 자세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지난 화요일 새벽에 기도하는데 저의 마음속에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선교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데, 네 마음은 선교를 하기에 합당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마음속에 찔림을 받아서 그날 새벽은 이제까지 살면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그분들을 축복해주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속으로 본능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네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을 위해서 축복 기도를 해준다면 너는 손해보는 인생을 사는 거야! 그런 기도는 시간 낭비야!" 그러나 곧 이어서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니다! 네가 구원을 받았다면 다 받은 것이다. 더 이상 손해 볼 것이 없다. 그러므로 너를 마음 아프게 한 사람까지 마음껏 축복해 주라!" 그래서 축복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내려다보시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진정 선교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면 미운 사람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끔 보면 정치인 미워하는 것은 죄가 아닌 줄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분들도 어떤 정치인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런 미운 감정, 그러한 적개심까지도 우리는 용서하는 마음과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하기 힘든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다면 그 용서한 만큼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2. 성육신의 자세

선교는 나의 처지를 버리고 남의 처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남의 위치에 서기 위해서 그의 위치까지 내려갈 수 있는 성육신의 마음이 있어야 온전한 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마음은 사랑을 실천하고 남의 허물과 수치를 가려주기 위해서 내가 당하는 수치도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성육신의 마음입니다.

어느 교회 찬송 경연대회에서 한 집사님 가정이 나와 찬송을 부르다가 가사가 틀렸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깔깔대고 웃었고, 그 집사님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얼른 자리에 돌아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어서 목사님 가정이 찬송을 부를 차례가 되어 찬송하는데, 어느 순간에 목사님도 찬송 가사를 틀리게 불렀습니다. 교인들은 다시 깔깔대고 웃었고, 사모님과 자녀들은 "왜 틀렸느냐?"고 핀잔을 주는 얼굴로 목사님을 힐끗 쳐다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과로로 쓰러지셨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유족들과 장로님들이 목사님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일기를 죽 읽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7월 14일, 교회 찬송가 경연대회가 있었다. 김 집사 가정이 찬송을 부르다가 틀려서 교인들이 다 웃었는데, 깁 집사가 무안한 얼굴을 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그 다음 차례로 우리 가정이 찬송을 부를 때 나도 일부러 틀려주었다. 다시 교인들은 깔깔대며 웃었다. 그때 슬쩍 김 집사를 보니 "목사님도 가사를 틀릴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안도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작은 일로 한 가정에게 위로를 줄 수 있어서 기쁜 하루였다."

그 목사님 일기를 읽고 장로님들이 모두 한 바탕 울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의 삶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성육신의 삶입니다. 여러분! 남의 허물과 수치를 덮어주기에 힘쓰십시오. 남의 허물에 귀가 솔깃한 불행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남의 허물을 안 보려고 하고, 금방 잊어버리고, 덮어주려는 행복한 마음을 가지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헌신하는 자세

선교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님들의 사역을 위해, 그리고 선교사님들의 생활을 위해 후방에서 우리가 헌신의 손길을 펴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다.

임병철 선교사님은 이번에 몽고에 들어가면서 머리를 완전히 밀었습니다.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밀었던 사도 바울처럼(행 18:18) 하나님 앞에 온전히 헌신하고자 하는 각오를 보이고, 철저히 몽고 사람처럼 낮아진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선교사님을 대하면서 우리는 후방에서라도 간절히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얼마 전에 임준호 선교사님이 성경학교 건축에 대한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몽고의 추운 날씨 사정으로 11월 중순까지 모든 공사를 완공해야 하는데 여러 사정으로 늦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2달 안에 3만 불을 마련해야 한다고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임준호 선교사님이 웬만하면 그런 얘기를 잘 안 하시는데 아주 다급하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마음의 감동이 있으시면 헌신의 손길을 펼쳐주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선교사님의 선교도 우리의 헌신의 손길이 있을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전방에 나간 선교사님들의 '헌신의 발걸음'과 더불어 후방에서 기도하는 우리들의 '헌신의 손길'이 보태질 때 선교 역사는 더욱 힘있게 펼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교를 위해 실질적인 헌신의 손길을 베풀면 어느새 우리의 영혼의 키와 믿음의 키는 부쩍 자라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4. 용기를 잃지 않는 담대한 자세

선교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는 어디에서 옵니까?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사도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얼마나 용기 있는 고백입니까? 용기가 무엇입니까? 어떤 환난에도 낙심치 않고 당당하게 살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열심히 사는 것이 용기입니다.

얼마 전 강원도에 큰 불이 나서 산 전체가 탔습니다. 그런데 화마가 지나간 곳에 요새 들꽃이 많이 피었다고 합니다. 그 들꽃의 생명력이 바로 용기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용기, 그런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을 절대 의뢰하는 신앙에서 나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에 둘째 형님이 당수를 하면서 나무와 돌을 격파하는 모습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하고 저도 계속 당수 연습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들어갈 때쯤에는 반쯤 차력사 수준까지 되었습니다. 흰 벽돌 네 장을 한꺼번에 손으로 격파하고, 5-6센티 되는 각목을 어깨에 쳐서 부러뜨리고, 이마로 쳐서 부러뜨립니다. 태권도 격파 시험을 할 때 쓰는 특별 제조한 약한 송판과 기왓장 같은 것이 아니라 공사판에서 쓰는 진짜 벽돌과 각목들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같은 반 급우들이 조용해집니다. "저 친구가 차력사나 할 일이지 고등학교에는 왜 왔나?" 하는 표정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입니다. 그러나 원리가 있습니다. 속도와 파괴력과 정확한 가격의 3박자가 맞아떨어지면 됩니다. 이마의 어떤 부분을 빠른 속도로 정확하게 가격하지 않으면 머리가 깨지지 각목은 부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이제까지 했던 훈련과 경험을 살리고, 또한 사람의 몸은 상당히 강하다는 믿음을 가지면 그런 용기가 나오게 됩니다.

용기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 의뢰하는 믿음을 가지면 반드시 놀라운 용기가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마음과 정성과 힘과 뜻을 다해서 예배하라고 말합니다. 요새말로 하나님 앞에 "올인!"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그런 용기를 가지고 있으면 어떤 환난의 벽돌이나 각목과 부딪쳐도 그것들이 깨지지, 우리가 깨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가끔 보면 참 못생긴 사람을 만납니다. 얼굴이 못생긴 것이 아니라 영혼이 참 못생겼습니다. 자기 외모에 대해 실망하면서 "이영애는 산소 같다고 하는데, 나는 이산화탄소 같다. 남자는 키가 187센티가 이상형이고, 여자는 168센티가 이상형이라고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작은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혼이 못생긴 사람입니다. 이영애가 우리보다 외모는 조금 낫겠지만 영혼은 우리가 더 아름답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요새 참으로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런 말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습니다. "요즘은 집이 세 채 이상 있는 사람은 함박웃음이 있고, 집이 두 채 있는 사람은 즐거운 미소가 있고, 집이 한 채 있는 사람은 담담하고, 전세 사는 사람은 깊은 한숨이 있고, 월세 사는 사람은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고 싶은 시대이다."

이처럼 살기 힘들다고 하지만 언제는 살기 쉬웠습니까?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하나님께 "올인!"하며 꿋꿋이 살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말고 스스로를 존경하며 살아야 합니다. 제 잘난 맛에 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가능성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불러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교의 사명자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존재할 뿐이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은 많겠지만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만 바꾸면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이방인에게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큰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들은 말씀대로 용서하는 자세, 성육신의 자세, 실질적 헌신의 자세, 그리고 담대한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선교의 열정으로 잘 분출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 있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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