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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거친 땅 견고한 곳 / 대상 12:8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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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가야 할 거친 땅 견고한 곳
역대상 12 : 8 - 18

악신에 들린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연일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시글락에 피신해 있을 때 처음에는 다윗 혼자였습니다. 그러다가 얼마를 지난 후에는 자기를 따르는 600 여명 정도의 사람들이 생겼습니다(삼상 27:2).

그러나 이제는 그 양상이 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사울시대 때 역전의 용사들이 다윗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심지어 동족인 사울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다윗에게로 나아 온 베냐민 지파의 용사들이 있었는가 하면(대상 12:1-7) 유다지파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대상 12:16-18). 이들은 무기로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 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만약 이 세상에서 자신의 영화를 구구했다면 시글락에 숨어 있는 다윗을 찾아오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의 육신의 영화보다도 동족간에 혈통의 관계보다도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더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들은 시세를 파악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대상 12:32). 성신의 감동을 받은 자들입니다(대상 12:18).
다시 말하면 역사적인 통찰력과 혜안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다윗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영예롭고도 소망 찬 행보라는 수사가 이들에게 합당했습니다.
특별히 갓 지파가 있던 땅은 요단 동편 길르앗으로 토지가 비옥하고 수림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의 고향을 버리고 다윗이 숨어 있는 거친 땅 견고한 곳으로 자신들의 삶의 방향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지파 별로 보면 유다 지파에 준비된 용사가 6,800명, 시므온 지파에 싸움을 잘하는 용사가 7,100명, 레위 지파에서 수령과 장교가 22명, 다윗을 왕으로 지지한 자가 8,300명, 베냐민 지파에서 왕으로 지지한 자가 3,000명, 에브라임 지파에서 싸움을 잘하는 용사가 20,800명, 므낫세 지파에서 다윗을 왕으로 지지한 자가 18,000명, 잇사갈 지파에서 수령 장교가 200명, 스불론 지파에서 싸움을 잘하는 용사가 50,000명, 납달리 지파의 수령 장교가 1,000명, 준비된 용사가 37,000명, 단 지파에서 싸움을 잘 하는 용사가 28,600명, 아셀 지파에서 40,000명,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에서 준비된 용사가 120,000명으로 총 340,822명이었습니다. 당시의 이 숫자는 엄청난 숫자인 동시에 다윗을 향한 절대적인 지지를 나타내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이른바 이스라엘의 역전의 용사들은 현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윗에게 있는 찬란한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영적 혜안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다윗을 찾아 거친 땅 견고한 곳에 도착했다고 했습니다.

Ⅰ. 다윗의 주위가 거친 땅 광야였 습니다.

본문 12장 8절에 {갓 사람 중에서 거친 땅 견고한 곳에 이르러 다윗에게 돌아온 자가 있었으니 다 용사요 싸움에 익숙하여 방패와 창을 능히 쓰는 자라 그 얼굴은 사자 같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악신에 들린 사울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는 다윗입니다. 무력하게 쫓기는 다윗입니다.
여기 {거친 땅}(미드바라, )은 '광야'를 의미합니다. 거친 땅 광야는 하나님의 나라를 도전하는 이 세상의 모든 성분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1) 광야 같은 이 세상은 사탄의 도전이 있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4장 1절에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 전격적으로 마귀로부터 시험받은 곳이 광야입니다. 마귀는 육신의 정욕으로 도전했습니다(마4:3). 안목의 정욕과 공명주의로 도전했습니다(마4:6). 마귀는 아예 신앙의 대상을 바꾸어 놓으려는 술책을 썼습니다(마4:8). 지금 이 시간도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2) 광야 같은 이 세상은 괴로움이 있는 곳입니다.
역대상 12장 1절에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을 인하여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기스의 아들 사울을 피하여 시글락에 숨어 있다는 말로 그 당시의 다윗의 아픔을 대변하기에 충분합니다. 다윗의 연약함을 가리켜 시편 62편 3절에 『넘어지는 담과 울타리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절에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고 했습니다.
{베다니}( )라는 말은 '괴로움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베다니에서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이 세상은 베다니 즉, 괴로움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동안 베다니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290장에도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광야에 찬바람 불더라도 라고 고백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괴로운 세상입니다.

3) 광야 같은 이 세상은 고난이 있는 곳입니다.
역대상 12:1절에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을 인하여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욥기 5장 7절에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에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5절에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3절에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34편 19절에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라고 했습니다. 요한 1서 3장 13절에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3절에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6절에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 앞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난과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경건한 사람의 고난은 인생의 모든 즐거움보다 더 행복하다."라고 했습니다. 고난은 승리를 위한 훈련과도 같은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우리가 감당하지 않으면 안될 여러 핍박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4) 광야 같은 이 세상은 대적들과의 싸움이 있는 곳입니다.
본문 12장 15절에 {정월에 요단강 물이 모든 언덕에 넘칠 때에 이 무리가 강물을 건너서 골짜기에 있는 모든 자로 동서로 도망하게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사울 왕의 추종자들이 갓 지파 용사들의 탈출을 저지할 때 싸워서 이기고 온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전의 용사들이 다윗에게로 가는 길은 거친 광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천만한 광야를 통과해야 하는 것은 살고자 하는 자들의 결단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광야와도 같은 곳입니다. 만약에 길을 인도하는 자가 없으면 길을 잃게 되는 위험하고 무서운 곳이 바로광야입니다.

Ⅱ. 다윗이 있는 곳은 견고한 요새 입니다.

본문 12장 8절에 {…견고한 곳에 이르러 다윗에게로 돌아온 자가 있었으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12장 16절에 {베냐민과 유다 자손 중에서 견고한 곳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오매}라고 했습니다.
{견고한}이란 히브리어로 "메짜드" ( )인데 이는 광야에 세워진 견고한 요새를 말하는 것입니다. 보호벽으로 둘러싸여진 성입니다. 따라서 이곳은 적들로부터 오는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입니다.

1) 이곳은 환난 날의 피난처입니다.
시펀 144편 2절 {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시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이 있는 그곳이 바로 피난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예선하셨습니다(삼상 16:1). 하나님은 사무엘로 하여금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했습니다(삼상 16:12).

시편 14편 6절에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46편 7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48편 3절에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59편 16절에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 날의 피난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지상교회는 사탄의 결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해방을 체험하는 평화의 도성입니다.

2) 이곳은 성신의 감동을 받은 자들의 집합소입니다.
본문 12장 18절에 {때에 성신이 삼십 인의 두목 아마새에게 감동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감동하시니}(라바쉬, )라는 말은 '옷을 입히다', '결박하다', '포로로 잡다'라는 뜻으로 성령께서 아마새의 전인격을 자기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는 말입니다.

3) 이곳은 새 임무를 받는 곳입니다.
본문 12장 18절에 {…다윗이 드디어 접대하여 세워 군대 장관을 삼았더라}고 했습니다.
지금 다윗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과 아마사에게 장차 도래할 이스라엘 건국을 위하여 아마사를 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4) 이곳은 한마음으로 왕을 섬기는 곳입니다.
역대상 12장 38절에 {…다윗으로 온 이스라엘 왕을 삼고자 하고 또 이스라엘의 남은 자도 다 일심으로 다윗으로 왕을 삼고자 하여}라고 했습니다.
다윗에게 온 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 다윗을 자기 왕으로 추대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장차 도래할 다윗 왕조의 기초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취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5) 이곳은 희락이 있는 곳입니다.
역대상 12장 40절에 {또 근처에 있는 자로부터 잇사갈과 스불론과 납달리까지도 식물을 나귀와 약대와 노새와 소에 무수히 실어 왔으니 곧 과자와 무화과병과 건포도와 포도주와 기름이요 소와 양도 많이 가져왔으니 이스라엘 가운데 희락이 있음이었더라}고 했습니다.

{희락}은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풍성한 잔치의 결과가 아닙니다. 이러한 잔치의 기쁨을 있게 한 동인이 넘치는 풍요와 희락을 가져 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무엘로 하여금 기름을 붓게 한 이후로 다윗의 왕권이 성취되는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가운데 희락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즐거움과 기쁨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교회는 날마다 예수 잔치하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믿는 자들의 구원이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어 다 이루어진데 대한 감사와 감격의 외적 표현이 풍성한 잔치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거친 땅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포위하고 있는 광야 같은 이 세상의 유형무형의 성분들입니다. 오늘의 주님의 몸된 교회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통하여, 신앙의 대상마저 바꾸자고 하는 엄청난 사탄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도시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괴로움의 도시입니다. 고난의 도시입니다. 쉴 사이 없는 사탄과의 싸움으로 인하여 긴장감이 고조되는 거친 광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숨막히는 곳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곳에 우리의 견고한 피난처인 교회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견고한 요새입니다. 이곳은 우리의 영육의 피난처입니다. 이곳은 만세 전에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 끈질기게 모이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새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교회운동입니다. 교회 운동의 본질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찾는 운동입니다.

사도 바울은 큰 근심과 고통이 있다고 했습니다(롬9:1). 그것은 바로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그의 아픈 고백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 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는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롬8:35, 38, 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했습니다. 동족의 구원의 필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잠시 잊어버린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바른 말을 한 것입니다. 동족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버려지는 한 마리의 아사셀 양처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저주를 받아 버려지는 한 마리의 아사셀 양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의 이 말은 동족의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서 그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감수하겠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하여 순교를 각오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그의 고백대로 마침내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도 교회 밖에는 우리의 혈육을 포함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오늘의 교회는 그 존재 의의와 존재 목적을 가집니다.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왕국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목사로 혹은 장로로 집사로 권사로 교사로 세워 군대 장관을 삼으셨습니다. 이제 사탄의 결박에서 해방된 우리는 성심으로 일심동체가 되어 주님의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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