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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빚진 자/ 마 18: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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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진 자
마태복음18:23-34

어린 아들이 부엌에서 일하는 엄마에게 작은 종이를 내밀었습니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이번 주 방 청소한 값 1000원, 가게에 엄마 심부름 다녀온 값 500원, 엄마가 시장에 간 사이에 동생을 돌봐준 값 500원, 쓰레기를 내다버린 값 1000원, 숙제 잘한 값 5000원, 거실 청소하고 걸레질 한 값 2000원, 전부 합쳐 10000원’
엄마는 내심 기대에 차서 자신을 쳐다보는 아들을 잠시 바라본 후 아들이 건네준 종이 뒷면에 다음과 같이 적어 건넸습니다.‘너를 내 뱃속에 열 달 동안 데리고 다닌 값 무료, 네가 아플 때 밤을 세워가며 간호하고 주님께 기도한 값 무료, 너 때문에 지금까지 힘들어하고 눈물 흘려가며 고생한 값 무료, 이 모든 것 말고도 너에 대한 내 진정한 사랑은 무료’
아들은 엄마가 쓴 글을 다 읽고 나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습니다.“엄마 사랑해요” 그러더니 아들은 연필을 들어 큰 글씨로 이렇게 썼습니다.
"엄마, 전부 다 지불되었어요. 오히려 내가 진 빚이 너무나 많군요. "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보다 내가 한 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현대인들에게 빚을 진다는 것은 매우 흔한 일입니다. 도시인들로부터 농촌에 이르기까지, 작게는 카드 빚에서부터 거액 융자에 이르기까지, 또한 사채까지 오히려 빚을 지지 않고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활의 여유를 찾지 못하고 언제나 조급하고 불안해하며, 부드럽지 못한 인생을 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옛부터 '가난'은 속일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속성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생명이 있는 한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수치스럽더라도 채주에게 돈을 빌려 양식을 사고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소위 '빚쟁이'가 되고 싶은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는 과정에서 자신이 원치도 않는 빚진 자의 모습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빚진 것을 아는 자는 열심히 일합니다. 왜냐하면 그 빚이 가져다 주는 결과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대처한다면 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파산 선고가 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남은 재산, 가정 모두 파괴되고 심지어 사회에서조차 '신용 불량자'로 낙인 찍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빚을 갚지 않으면 악인
"사악한 자는 빌리고 갚지 아니하나 의로운 자는 긍휼을 베풀고 주는도다"(시편37:21)
꾸고 갚지 아니한 자, 즉 빚진 자는 악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빚을 갚지 못한 상태에 있는 한 악인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영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수 차례에 걸쳐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소서 내가 불법 중에서 형성되었으며 내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수태하였나이다(시편51:5)
결국 우리는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누군가에게 빚진 상태에서 출생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분에게 빚을 갚기 전까지 악인, 혹은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이 빚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나올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세상에 머물러야 했고, 공기, 흙, 물 등을 통하지 않고는 생명을 존속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느니라(요한복음1:1-3)
이미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부채를 떠 안고 세상에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것인 양 마음껏 즐기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악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빛을 갚을 마음도 없고, 혹은 알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면 이미 그의 파산선고는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그의 인생의 실패는 이미 예고되어 있습니다.
"곧 그 증거는 사악한 자를 멸망의 날까지 남겨 두신다 함이니 그들이 분노의 날까지 인도함을 받느니라"(욥기21:30)

2. 빚진 자의 신분
우리 자신이 빚을 졌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사실상 우리의 신분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의 신분에 따라 빚을 갚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한 자는 가난한 자를 다스리고 빌리는 자는 빌려주는 자의 종이 되느니라"(잠언22:7)
이스라엘 백성들은 빚진 자가 만일 빚을 갚지 못하면 채주의 종이 되어야 하는 법이 있습니다. 이 빚은 당대에 이르지 않고 희년이 돌아올 때까지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물려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신분은 빚으로 인해 종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종의 신분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빚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주인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법적으로 빚을 갚지 아니하고는 절대로 종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태복음5:26)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행위)이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웃을 돌보며, 명상시간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을 시도하며,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며, 봉사, 전도, 구제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좋은 이미지를 심으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종의 신분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한 채무(빚)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짊어진 빚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빚의 문제를 해결한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록된바 의로운 사람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로마서3:10)
현재 우리에게는 빚을 갚을 만한 힘이 전혀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설령 힘이 있다고 생각이 되더라도 너무나 엄청난 빚을 안고 있기 때문에 절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의 빚을 진 상태일까요?

3. 우리가 진 빚
예수님은 마태복음 18:21-35의 내용에서 용서에 관한 교훈을 가르치시면서 빚진 자에 관한 비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 속에서 용서를 해야하는 우리의 상태를 설명하시면서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계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그에게 데려오매"(24)
일만 달란트라는 액수를 쉽게 환산하자면 금이 약 400돈이나 되는 양입니다.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액수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입니다. 우리의 모두 소유를 다 팔아도 갚을 수 없습니다. 그 까닭에 나를 포함한 모든 가족은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이에 주인이 명령하여 그와 그의 아내와 자녀와 모든 소유를 팔아 갚게 하라 한대"(25)
우리의 상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탕감시켜 주시고 세상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은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망각하고 지냅니다. 우리는 자신의 탕감 받은 사실은 잊고 남에게 빌려준 작은 돈에는 집착하여 받아내려 합니다.
"그 종이 나가서 자기 동료 종들 중에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같으라 하매"(28)
백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한 데나리온이 성인 남자의 하루 일당에 해당되는 금액이므로 약 500만원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코 적은 돈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탕감 받은 것을 생각한다면 매우 적은 액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은혜를 망각하고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빚을 다시 돌려 받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빚을 다 갚기 전까지 그는 더 이상 자유인이 아닙니다.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기까지 그를 형벌 주는 자들에게 넘겨주었느니라"(34)
우리는 이미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너무도 무거운 짐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아는 것이 이처럼 매우 중요합니다.
"내 불법들이 내 머리를 덮어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나이다"(시편38:4)
"셀 수 없이 많은 재앙들이 나를 에워싸고 내 불법들이 나를 붙들므로 내가 위를 볼 수도 없사오며 그것들이 내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나이다"(시편40:12)
이처럼 죄악이 넘친다는 것은 곧 엄청난 빚을 안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빚을 청산하기까지는 우리가 결코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빚을 청산하고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요?

4. 종의 신분에서 아들의 신분으로
우리가 종의 신분으로는 엄청난 빚을 갚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분이 자녀로 바뀌어진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종이 아들의 신분으로 바뀌어진다면 그의 채무는 자동적으로 폐기될 것이며, 더불어 상속권까지 부여받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어차피 세상에서 빚을 갚을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는 상태라면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분을 영접하는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요한복음1:12)
성경은 자녀가 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고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가진 빚을 정리하시기 위해서 행하신 일, 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빚진 것이 아니니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로마서8:12-14)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빚으로 인해 종의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난 것은 아닙니다.

5. 복음의 빚을 갚자
저는 여름 어느 날, 시골 교회 정원의 나무 그늘 아래서 로마서를 읽다가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고 고백하는 말씀을 읽는 순간 저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빚진 자'라는 그 단어가 제 가슴에 큰 감동으로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울었고, 이 종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아니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주님, 이 종은 빚진 자입니다. 도무지 갚을 길이 없습니다. 저는 부모님에게 빚진 자입니다. 저는 형제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저는 교인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저는 조국에 빚진 자입니다. 이 종은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모두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늘의 바람소리나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도 '너는 빚진 자다'라는 소리로 들리는 듯했습니다. 모두가 나를 위해 주었건만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살아온 제 자신을 보며 한없이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후로는 '나는 빚진 자다' 하는 하늘의 음성이 제 가슴을 떠나지 않았고, 그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한시도 게을리 하거나 함부로 살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빚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너무나 크고 한량없기에, 우리는 도무지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받았기에 그 은혜는 우리에게 빚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너무 고마워 누구에게든 갚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빚진 자의 심정입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은 이런 빚진 자의 인생관으로 충만했기에 자기 목숨을 아깝다 하지 아니 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없으므로 빚졌다 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받음으로 빚이 됩니다. 우리가 풍족히 받은 만큼이 모두 우리의 빚입니다. 배운 사람은 그 배움이 빚이 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몸이 빚이 됩니다. 물질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물질이 빚이 되어 가난한 사람을 보면서 채무자의 심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근심으로 시달리고 있는데 나 혼자만 행복한 생활을 보낸다는 것을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동급생들의 비참한 가정 형편에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대학시절에도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내 자신이 누리는 물질적 환경과 건강에 대하여 나는 어떤 채무감을 느껴야만 했다. 내가 21세 되던 어느 맑게 개인 여름 아침, 성령강림절에 나는 이런 행복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보답으로 남에게 무언가를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서른 살까지는 내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위하여 살고, 그 후에는 인류를 위해 직접 봉사하는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였다."
은혜의 보다 깊은 단계는 빚진 자의 단계입니다. 빚진 자에게는 사방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감사할 것뿐이고, 세상 어느 곳을 가도 사랑할 것뿐입니다. 행복을 얻고 싶습니까? 그러면 사랑의 빚진 자가 되십시오! 만일 우리가 빚을 탕감받고 상속자가 되었다고 방종하는 생활을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본 뜻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의 빚을 지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이나 바바리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지혜 없는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선포하고자 하노라"(로마서1:14-15)
복음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신 것'(고전 15:3, 4)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만, 쉽게 말한다면 빚을 갚아 주신 분을 소개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면 어리석고 게으른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책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다해 복음의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합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으니...너희는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둠 속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25:26,30)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결코 게으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자들에게는 상급으로 더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보다 아름다운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 사는 세상은 피차 빚을 지기도 하고 또한 빚을 갚으며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빚만 지고 갚지 않을 경우에는 그 사태가 매우 심각해집니다. 특히 2000년 전 예수님이 사시던 봉건사회에서의 채무관계는 오늘날보다 매우 혹독했습니다. 막대한 빚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하고 임금 앞에 끌려와 야단을 맞는 이야기인 오늘의 본문에서 임금은 "네가 약속대로 내 빚을 갚지 못했으니 네 재산을 몰수하고 네 식구들도 노예로 팔아 빚에 충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라며 호통을 칩니다. 가련한 빚쟁이는 꿇어 엎드려 "주인이시여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소서"라고 애절하게 호소합니다.
임금은 빚쟁이가 지은 너무도 커서 기한 연장으로도 도저히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그 빚은 어떤 개인이 갚을 만한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만 달란트는 당시 화폐개념으로 한 사람이 5000번 정도 계속 태어나 돈을 벌어 겨우 본전만 갚을 수 있는 천문학적 액수입니다.
임금은 그와 그 가족을 불쌍히 여겨 아예 탕감하겠다는 파격적인 은혜를 보여줍니다. 빚쟁이는 이제 자신을 근심케 하던 모든 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와 죄책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하늘을 날 듯이 황홀하고 감격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굳이 1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쟁이의 비유로 천국을 설명하셨을까요.
먼저 1만 달란트 빚이란 어떤 개인도 갚을 수 있는 빚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비유에서 채권자는 하나님이며 사람들은 1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 의인은 결코 없습니다.
둘째, 이런 엄청난 빚의 해결방법은 오직 채권자가 탕감해주는 길뿐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내 공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의 형틀에 내어 주시사 우리의 죄 값, 즉 율법이 내 죄에 대해 선고한 벌금을 예수께서 다 지불하셨다는 탕감의 은혜를 실감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바로 내게 임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사망의 법과 율법에서 나를 해방했습니다. 자, 이제 나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누리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셋째, 은혜를 받은 자들이 주변의 이웃에게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 때에만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하나님께 탕감 받은 그 엄청난 빚을 실제로 삶 속에서 어떻게 갚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께서는 본문 33절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니라"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빚은 보이는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갚는 것이 바로 주님께 빚 갚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주께서 돕고자 하는 이웃을 찾아 돌보아 주고, 주께서 불쌍히 여기는 영혼들을 찾아 전도하는 삶을 살면 바로 주님께 지은 빚을 갚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피차 빚을 지고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빚쟁이입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이 있기까지 그 누구의 수고와 도움, 그리고 사랑의 손길이 끼어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로마서 13:8절에 "너희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성경에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빚쟁이입니다. 있는 사람들은 없는 이에게 빚쟁이입니다. 학생들은 스승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빚 갚는 심정으로 사는 것이 순리요, 행복한 길입니다.

6. 갚을 수 없는 빚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조금씩이나마 부담스러운 빚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주택융자금이나 카드 빚, 매월 납부해야 할 공공요금 같은 것들인데 이것들이 우리를 잠시도 편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재정적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상으로 물건 사는 일을 줄여나가고 충동구매 습관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요금청구서에 의한 부담은 한결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히 갚지 못할 빚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무거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 분은 허물과 죄 많은 우리를 위해 값없이 대속의 제물이 돼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진 사랑의 빚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 우리가 용서하지 못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랑과 평화의 계절을 형제와 이웃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돌아보는 기회로 삼읍시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13:8).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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