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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심 전력과 진보 향상 (딤전 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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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심 전력과 진보 향상 (딤전 4:11-16)                 

1. 본문과 제목

오늘은 신약 성경 목회 서신 가운데서 본문과 제목을 택해 보았습니다. 디모데 전 ∙ 후서와 디도서의 세 책은 목회 서신이라 불리웁니다. 이 명칭은 일찍이 중세기의 대표 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7-74)가, “이 세 편지는 그 내용이 모두 교회를 목양하는 데 관한 것을 다루었다” 한 데서 시작이 되고, 1726년 독일의 경건파인 바울 안톤(Paul Anton, 1661-1730)이 이 명칭을 정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2. 바울의 제1,2차 옥중생활

사도 바울은 로마 옥에 두 번 갇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3차 전도여행으로부터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 ∙ 서기관 ∙ 바리새인과 같은 교권주의자들에게 잡혀 많은 고통과 압박을 당하고, 마친내 관헌 당국에 내어주어 바울을 없애버리려고 여러 가지 내용으로 고발하고 그의 잘못을 증거하였으나,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와 함께 앉은 법관들이 살펴 본 결과, “이 사람 바울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만한 행사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아그립바왕이 베스도 총독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한 말씀이 사도행전 26장 마지막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름 받아 이방인의 사도로 다년간 세계 각처로 두루다니며 선교 활동을 하였으나, 나사렛 예수의 부활과 십자가 구원의 복음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어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저촉되는 죄와 허물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인 아닌 하나의 미결수로 다른 죄수들과 배를 타고 이탈리아 로마로 가서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하여 로마옥에 갇히게 되지만, 로마 시민권의 소유자인 그는 셋집에 유하며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다가, 일단 석방되어 그가 원하던 땅 서반아를 방문하고, 발길을 돌이켜 일찍이 그가 심혈을 기울여 전도한 헬라지방과 소아시아를 방문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 디모데와 디도가 바울을 동반했는데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두고, 디도는 그레데에 남겨두어 교회를 돌보며 전도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중간 여행의 도중 에베소와 그레데에 있는 두 제자에게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를 보냈고, 계속 여행 중 아마 니가볼리로 향하는 무렵 관헌에 다시 체포되고 로마로 호송되어, 두 번째 옥에 갇힌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제2차 로마 옥중에서 그는 고요히 최후를 기다리면서 디모데 후서를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 후서가 바울 사도의 절필(絶筆) - 맨 마지막 서신이 되는 것입니다.

3. 옥중 서신

1) 연대와 장소

목회 서신의 바울 저작권을 거부하는 편에서는 그 저작 연대도 제1세기 말부터 제2세기 초(90-105)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고, 혹은 제2세기 중엽까지 미룹니다. 그러나 지지설의 견해는 (우리 개혁신학은 목회 서신의 바울 저작권을 확실히 믿고 절대로 지지함) 이미 바로 앞선 항에서 밝힌 대로, 로마 옥에서 석방되어 동방에 여행하는 도중에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를 기록하고, 다시 로마 옥에 투옥되어 디모데 후서를 기록하였습니다.

2) 저작의 동기와 목적 및 개요(槪要)

목회 서신은 두 개인에게 보낸 세 책으로 구성됩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하나의 공동서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세 책이 다 같이 당시의 교회 문제를 공동으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목회 서신을 기록하게 된 동기와 목적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이단에 대한 경계입니다. 당시 사상계는 유대주의화한 그노시스 주의(영지<領智>주의) 또는 그노시스 주의화한 유대주의가 대두하여, 새로 세워진 신생의 교회에도 사상적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딤전 1:4-7, 4:1-3,6:3-5, 20, 딤후 2:23-26, 딛 1:10-13, 3:9 등). 이런 이단을 방지하고, 바른 사상을 가르치는 것이 목회 서신의 주목적이었을 것입니다(딤전 1:15).

둘째는 교인의 윤리적 훈련입니다. “경건” 또는 “율법”이란 말이 번번히 반복되는 가운데 신앙을 반영할 경건된 실생활을 가르치고, 교회 안과 밖에 각층에 대한 신자의 자세를 지시하려는 것이었습니다(딤전 5:1-25, 딤후 3:14-17, 딛 2:1-10).

셋째는 교회의 조직 강화 같은 행정적 지시였습니다. 장로, 집사 등에 관한 규정은 길이 교회 행정의 지침이 될 교훈이 되었던 것입니다(딤전 3:1-13, 딛 1:5-16). 지금도 우리 교회에서 장로나 안수집사를 선거할 때마다 반드시 찾아 읽어가며 그 직분의 적절하고 합당한 표준을 삼고 있는 디모데 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의 해당 구절들이 다 목회 서신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가 없지요.

이런 세 가지 구체적인 사항 외에도 노 사도 바울은 아들과 같은 젊은 제자들, 디모데와 디도 개인을 위한 친절한 지침을 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아직 연소하고 경험이 부족했던 젊은 목회자들에게 많은 참고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3) 실용적 가치

문자 그대로 이 세 책은 목회 일반에 대하여 당시에 대단히 유익하고 필요한 실용적 가치가 있는 서신이었다고 생각이 될 뿐만 아니라, 그 때로부터 2,000 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간 오늘, 여러 가지 방면으로 조직신학 ∙ 역사신학 ∙ 실천신학 ∙ 주경신학 등 목회에 관한 연구와 책자가 많이 나와 있는 현대 목회 현장에 있어서도, 없지 못할 목회의 지침과 표준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강도사 인허식이나 목사 임직식과 같은 때의 권면은, 대개가 목회 서신에서 그 내용을 찾아 보게 될 정도로 매우 소중한 성경이라 하겠습니다. 목회 서신이라 해서 실제 목회하고 있는 교역자들, 곧 성직자 들에게만 필요한 서신이 아니라 모든 평신도들, 전체 교인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가치 있는 서신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모든 신 ∙ 구약 성경은 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주신 특별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각계 각층 남녀 노소 차별이 없이 다 받아 읽기에 합당한 사랑의 메시지라는 말씀입니다. (다음과 같은 찬송가를 설교자 자신이 곡조에 맞추어 부름).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귀하고 중하신 말씀일세. 기쁘고 반가운 말씀 중에 날 사랑한단 말 좋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나는 참 기쁘다” (241장 1절)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청년 남녀들이 서로 주고 받는 연애 편지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성경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딸인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서신이며, 우리 신랑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된 우리 신자들 사이에 주고 받는 사랑의 편지인 줄 알고, 매일 읽고 주야로 묵상하여 은혜 받는 복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라비아 파 교회의 지도자 진센돌프(Nicholas Luduig Zinzendorf, 1700-1760)는 동부 독일 귀족의 가정에서 태어 났습니다. 삭센 공국의 대신이었던 아버지는 일찍이 죽고 어머니는 재가하여 조모와 숙모 손에 양육을 받았어요. 두 분이 다 경건파로 진센돌프는 어려서부터 경건히 그리스도를 사랑하였으며, 그리스도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는 유명한 일화가 교회사 책에 기록되어 있지요. 마침내 교회사에 빛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4. 현대의 이상적 교회상

제자가 스승 같고 스승이 제자 같으면 가장 이상적인 사제 관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뜻 깊은 명언을 교회에 적용할 때, “평신도가 교역자 같고 교역자가 평신도 같으면 아름다운 이상적 교회이다” 라는 격언이 될 것인데, 이런 교회야 말로 현대 교회에 있어서 가장 은혜롭고 바람직한 이상적 교회상으로 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 일반 평신도들은 그저 주일날 교회에 출석이나 하면 되는 줄 알고, 모든 것을 교역자에게만 맡겨 버리면 그 교회는 아무런 발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신분은 평신도이지만, 실제 봉사 활동은 교역자처럼 자기 맡은 직책을 잘 감당하고, 열심히 교회를 봉사할 때 그 교회는 부흥하고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금년 2003년을 “전 성도 사역화의 해” 라고 표어를 정한 것은 잘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 한편 교역자는 나는 이 교회의 지도자다 하는 자기 직책을 너무 내세우고, 일반 평신도들이 해야 하는 기본적 임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교역자이면서 이 지교회에 적을 둔 하나의 회원인 평신도와 같다고 하는 겸비한 생각을 가지고, 평신도들이 하는 모든 의무와 봉사를 기본적으로 본이 될 수 있도록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측면, 즉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랑의 편지이기 때문에, 교역자들에게만 아니라 우리 모든 평신도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교훈이라는 것과, 평신도가 교역자 같고 교역자가 평신도 같다는 원리를 잘 준수하는 교회가 오늘 현대 교회의 바람직한 이상적 교회이며, 이런 교회만이 날마다 새롭게 부흥 성장할 수 있다는 견지에서, 오늘의 본문과 제목을 목회 서신에서 택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올시다. 이제 실제로 본문 말씀을 고찰하는 가운데 과연 그렇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믿습니다.

5. 본문 고찰

오늘의 본문은 디모데 전서 4:11-16이지요. 다 성경 책을 잘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순전히 본문 설교가 되겠습니다. 두 차례로 나누어서 먼저 11절부터 13절까지를 우리 다 같이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교독이 아니라 제독(齊讀)입니다. 11-13 다 같이 읽기 시작합시다.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예, 11절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이 말씀은 물론 직접적으로 교역자 디모데에게 하는 말씀이지만, 장로 ∙ 집사 ∙ 권사 등 각 구역 지도자들과 각급 교회학교 교사들에게도 꼭 같이 적용되는 교훈입니다.
12절, 디모데는 그 당시 아직 나이 젊었을 때고, 디도가 좀 연장자이었던 것 같습니다. 연소하다는 헬라 원문은 “네오테토스”로, 완전히 성장해서 군대 복무할 연령에서 40 세까지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을 수행할 때 그의 나이를 20 세 전후로 본다면, 이 때 디모데는 38-40 세 정도였다고 추측할 수가 있는데, 그 당시의 교회 장로들은 대개가 50이 넘은 노인들이 많았으므로 장로(長老)라고 불리웠던 사실을 감안할 때, 디모데를 교역자로서 아직 연소하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교역자들의 육신적 연령이 비록 적다 할지라도, 정신적 또는 신앙적으로도 유치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노파심에서, 그를 아들로 보는 사도 바울이 이런 교훈을 하였던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격세의 감이 없지 않아 오늘 현대 교회에서는 30 세로부터 성직자로 임직될 수 있고 장로로 피택될 수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비교적 젊은 계층의 성직자들과 평신도 항존직들이 명심할만한 교훈인 동시에, 일반 평신도들에게 있어서는 그들 지도자들의 지능적 또는 영적 지도력을 존중하여, 육신적 연소 만으로 그들의 지도력을 폄하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리라 믿습니다.

12절은 하반절이 더 구체적인 중요한 교훈입니다. 말 ∙ 행실 ∙ 사랑 ∙ 믿음 및 정결의 다섯 가지 요긴한 덕목을 주신 것은, 한 손에 붙어 있는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곱아가며 항상 잊지 말고 지켜야 할 귀중한 기본적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지상 생활은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말 곧 대화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은 한 번 한 다음에는 다시 주어 담지 못하므로 말로 실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약 3:2).
행실이란 헬라 원어는 영어의 흠정역과 같이 대화(conversation)로도 번역이 됩니다. 전도자는 말로 전도하므로 일상생활의 회화의 말도 그 전도의 말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행실은 곧 그의 말을 직접 입증하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이 자기의 말을 그대로 지키는 행실이라 하겠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대하는 기본 자세입니다. 이는 세속적 사랑이 아니라 거룩한 종교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바른 교훈에 대한 확신과 이를 뒷받침하는 하나님께 대한 충실한 봉사입니다. 또 이 낱말은 “신실”을 표시할 수도 있습니다.
정절은 5:2에 다시 나타나고 거기에는 “깨끗함”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정조(貞操)와 절제(節制)의 합성어가 곧 정절(貞節)입니다. “이는 언제나 도덕적 의미를 가지고 육체의 죄에만 한하지 않고 동기와 행동의 정결을 포함한다”고 성경학자 빈센트(Vincent)는 주석하고 있으며, 이성 관계나 물질거래에서 정결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덕목의 구체적인 교훈이 어찌 교역자에게만 대한 것으로 국한될 수 있겠습니까? 일반 평신도들에게 꼭 같이 필요한 훈계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본문에서는 디모데를 비롯한 목회자 곧 성직자들은, 마땅히 이런 기본적인 덕목에 있어서 일반 평신도들의 본이 되라는 권면이라면, 일반 평신도들은 불신 이웃과 사회인들에게 본이 될 수 있도록 잘 준수해야 되리라 믿습니다.

다음의 13절도 역시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 꼭 같이 적용되는 공통적으로 필요한 교훈입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란 말은 직접적으로 바울이 돌아올 때까지라는 뜻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 재림시까지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읽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읽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저는 종종 “no Bible, no breakfast”라는 말을 합니다. 성경을 읽기 전에는 조반 -아침 식사를 하지 않는다, 혹은 조반을 먹지 말라는 뜻이지요. 제가 이 말을 간혹 하는 만큼 저는 이 말을 수십년 동안 계속 실행해 오고 있습니다. 이번 9월 하순에 7 일간 미국 뉴욕 모임에 다녀 왔습니다만, 단체로 관광을 떠나는 때도 많아 매우 바쁜 스케쥴이었지만, 아침마다 늘 하는 맨손 체조를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원칙은 꼭 지켜 가며 아침마다 식사 전 성경읽기를 실행하였습니다.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교육을 의미할 수 있으나 전도에 대한 뜻으로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으라고 권하며 십자가 구원의 도리를 가르칠 수도 있기 때문에 양을 낳는 것은 양이지 목자가 아니랍니다. 목자가 양들을 잘 먹여 기르면 양들이 튼튼히 자라서 새끼양을 낳는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전도는 일반 평신도들이 한다는 뜻인데, 평신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고 교역자들도 물론 하지만. 수효에 있어서 평신도들에 비하여 성직자들의 수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소수의 불가하므로, 전도의 실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일반 평신도들의 광범위한 전도 활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14-16절을 다 함께 읽을 차례입니다. 제독인 고로 다 소리를 내서 일제히 같이 시작하여 같이 끝나도록 비교적 천천히 읽어가도록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14절부터 시-작.
“네 속에 잇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14절은 디모데가 안수 받을 때 예언의 말씀으로 주신 은사를 의미합니다. 은사란 은혜로 주신 선물이며 성령으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사로도, 좁은 의미에서 병 고치는 것 같은 특수한 은사에도 적용됩니다(도전 12:9).

“조심 없이”는 주의하지 않고 태만한 태도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그 달란트를 땅 속에 감추어둔 행위 같은 것을 말합니다. 받은 바 은사에 대하여 태만하게 무관심해도 안 되고, 조심 없이 함부로 남용해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14절 말씀은 교역자의 경우는 안수 받고 성직자로 임명될 때를 가리키고, 일반 평신도들은 세례 받은 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안수 받아 항존직으로 임직될 경우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6. 본문 15절

15절은 오늘의 제목이 기록되어 있는 결론적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 같이 다시 한 번 봉독합시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예, 여러분 잘들 읽으셨습니다. 우리 한국말 번역이 소홀하게 되었다고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흠정역(AV)에서, “이 일들을 명상하고 거기에 너희 전력을 다하라” 하였고, 개정 표준역(RSV)에서는, “이 의무들을 실천하고 거기에 너 자신을 헌신하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일 곧 위 12-14절의 내용을 먼저 명상하고 실천하라는 명령이며, 거기에 전력을 다하고 거기에 헌신하라는 간곡한 권면과 교훈인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우리 성경이 전심 전력(全心全力)하라고 한 것도 상당히 강력한 표현입니다. 전심은 마음을 다하는 정신적인 최선을 뜻하고, 전력은 힘을 다하는 육체적인 최선을 의미합니다.

이 세성에서 자기 가정의 생계와 민족과 국가 사회의 향상 발전을 위해서도, 정치 ∙ 경제 ∙ 교육 문화 ∙ 국방 등 각 방면에서 최대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지 않고서는 생존 경쟁에 승리할 수 없다고 하면, 하물며 교역자 자신과 그 지도를 받는 모든 신자들의 영원한 생명을 구원하는 (16절) 목회 사역을 승리적으로 완수하기 위하여, 전심 전력을 다 기울여 최대 최선의 헌신과 노력을 다하므로 말미암아 참된 목자는 끝없이 진보하여야 하며, 그 진보를 그의 교우들이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뜻에서 표준 새번역 성경은 15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들을 실천하고, 그것에 전심 전력을 다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대가 발전하는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게 하십시오.”
결과적으로 교인들이 볼 때, 교역자가 더 신령하고 은혜롭게 전진하고 향상하고 발전하는 것을 알고 좋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교회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는 동시에, 교회에 대한 봉사 곧 주의 일에 더욱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처지를 바꾸어 놓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교역자에 그 교인이라는 격으로, 교역자 편에서 교인들을 볼 때, 장로 ∙ 집사 ∙ 권사 등 항존직을 비롯하여 성가대, 교회학교 각 부서의 직원들이 각자 맡은 직책과 봉사 활동에 있어서, 괄목(刮目)할만한 진보와 향상 발전을 가져온 것을 깨닫고, 목회의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교역자와 평신도들이 손에 손을 잡고 더욱 주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충성 봉사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이번 미국 뉴욕에 가서 느낀 것은, 총신 1회 동창의 한 분인 박 치준 목사님이 일찍이 그 곳에 이민 가서, 한인 교회(뉴욕 남교회)를 개척하고 전심 전력 목회에 노력한 결과 많은 성장 발전을 가져와, 정년 퇴임과 동시에 원로 목사로 추대되면서 그의 자제 박 상일 목사님이 계승 담임하여 더욱 부흥하여 뉴욕 남부 지역 번화가에 큰 성전을 건축하고, 단독으로 우리 동창들을 초청하여 졸업 50 주년 희년 기념대회 2차 모임을 은혜롭게 끝마치게 될 때, 그들 목회의 진보 향상을 역력히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귀국 후 본 교회와 신학교 일을 계속하는 가운데, 지난 10월 9일 신학교 경건회 시간에 송 기장 목사님(통영 남부교회 담임)이, 강사로 매우 귀한 은혜와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을 듣고, 그 진보 향상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본 부산 기독 신학교 제1회 졸업생인데 저렇게 실력 있는 목회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7. 결론

10월은 혁신의 달입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ur, 1483-1546)가 1517년 10월 31일 95 개조의 논제를 제시한 것이 그 개혁사업의 발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교황 정치를 비롯한 교권주의로 타락되고 말씀에서 이탈하여 부패한 것을 개혁하여 말씀 중심의 개신교로 혁신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금년은 종교개혁 486 주년으로 개신교가 너무 많은 교파로 분열되고 사이비한 종파들도 출현하여, 오늘의 교회가 교리적 또는 세속적으로 타락하는 경향이 노출되고 있어, 순수한 초대교회로 돌아가기 위하여 은혜와 진리로 혁신되어야 하겠다는 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 혁신은 과거와 같이 어떤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교회 전체 즉 교역자와 평신도들 모두가 연합하여 오늘의 교회를 새롭게 해야 된다는 뜻에서, 평신도 신학과 운동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성령의 충만한 운동이 크게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우리 부산 영락교회가 목회 서신에 나타난 교훈을 따라 이를 실천하여, 교역자는 물론 일반 평신도들이 모두 진실한 복음적 신앙과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교역자는 평신도의 본이 되고 평신도는 불신자의 본이 되며, 매일 성경 읽기와 기도에 힘써 성령의 충만함으로 신앙생활과 교회 봉사 특히 복음 전파에 전심 전력하여, 우리의 진보 향상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본 부산 영락 교회와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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