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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백성을 위로하라 - 사 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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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 40:1-11)


1. 위로가 필요한 때

  지방 국립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의 한 정보기술업체에 취업해 일을 하다가 그만둔 24살의 김모씨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몸은 괜찮습니까? 직장은 알아보고 있는데, 잘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잘 될 것입니다” 아들이 취직을 못해서 걱정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해서 어머니를 안심시켰습니다. 그 청년은 전화를 건 3시간 뒤에 서울 친구의 집에서 목매어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같은 날, 성산대교 북단에서 28살의 윤모씨가 취업을 못한 것을 비관해서 달려오는 자동차와 충돌하고 한강에 빠져 숨진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 전날에는 서초동 우면산에서 27살의 박모씨가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을 쏘아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일본까지 가서 유학을 했던 엘리트였습니다.

  불황이 장기화되고 청년실업률이 상승추세를 보이면서, 취업문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취직은 안 되고 카드빚 등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급증하면서, 작년 한 해만 해도 자살해 죽은 사람이 1만 3천 5십 5명이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자식들도 고생할게 뻔하다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어린 세 자녀와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주부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자살하는 사람들의 추세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고임금(高賃金), 잦은 파업, 각종 규제를 피하기 위하여서 지난 5년 동안에 공장 4천 1백 곳이 해외로 이전을 했습니다. 일자리가 적어지면서 우리나라 남성 근로자의 퇴출 연령이 35세 전후로 낮아졌습니다.
  40대가 아닙니다. 이제 30대, 인생을 시작하는 이 시기에 벌써 퇴출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적 체감 온도가 IMF 때 보다도 더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때보다도 더 많은 노숙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청년 노숙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청년 노숙자까지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쌀이나 생필품 등을 훔치는 생계형 범죄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마트(Mart)에서 쇠고기 두 근을 유모차에 숨겨 나오다가 적발된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실직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9살 큰 아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던 엄마가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트에 가서 고기 두 근을 훔쳐 나오다가 적발되었습니다.

  사회가 불안하고, 경제적인 불황이 계속되고, 계층간의 갈등이 심화(深化)되고, 정치에 염증을 느끼는 40대, 50대 중상류층에 탈출이민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한탕주의가 팽배하여서 선량한 백성들의 마음이 참으로 침통해 있습니다. 지금은 정말 위로받아야 할 때 입니다. 위로가 넘쳐야 될 때 입니다.
  그런데 이런 절망과 자살은 그 뒤에 조종하는 사탄이 있습니다. 자살을 조종하는 영(靈)이 있는데, 그 영을 대적하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낙심해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여서, 그 절망과 그 침통한 상황 속에서 빠져 나오도록 인도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 못지아니하게 유대 백성에게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나라가 바벨론에 멸망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은 인간의 어떤 말로써 표현하기가 힘들만큼 비참했습니다.
  유대나라를 점령한 바벨론은 당시의 왕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의 아들들을 비참하게 죽입니다. 다음에는 이 모습을 보게 했던 시드기야의 눈을 뽑습니다. 그리고 쇠사슬로 결박해서 개를 끌고 가듯이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쓸만한 사람들은 다 포로로 잡아갑니다. 그 자녀들의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돌에다가 마치 개구리를 매어치듯이 그렇게 매어쳐서 죽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왕궁과 성전을 다 불태우고, 성전 안에 있는 기구들을 다 가지고 갔습니다.

  바벨론에서 짐승이하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말씀합니다.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라고 외치라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온 여러 성도님들 위에 하나님의 위로, 위로의 영이 여러분들 가슴 속에, 여러분들의 생활 속에, 가정 속에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가 가슴 속에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과 이사야서를 비교해 보면, 참 절묘한 조화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이 몇 권으로 되어 있습니까? 물론 성경은 한 권입니다만, 성경 안에는 66권의 성경이 모아져서 성경전서(聖經全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가 몇 장으로 되어 있습니까? 66장입니다. 성경이 66권인 것처럼, 이사야서는 6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이 39권, 신약이 27권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이사야서를 보면 1장에서 39장까지는 마치 구약처럼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의 메시지가 주종(主宗)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40장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40장부터 66장까지 스물일곱 장은 마치 신약처럼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40장부터 66장까지 스물일곱 장을 <구약 속에 있는 신약>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40장부터 문체와 내용이 너무 달라지기 때문에 40장부터 <제 2이사야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 2이사야서의 첫 마디가 뭡니까?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입니다.
  위로의 소식은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죄사함으로부터 오는 위로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심판과 정죄의 삶이 지나가고 제 2이사야의 메시지와 같이 위로와 구원의 축복이 시작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정죄와 심판의 시기가 빨리 지나가고 위로와 구원의 시기가 시작되기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심판과 정죄의 시기가 지나가고 위로와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선포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민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민오는 나라가 되고, 세계 열방이 모여드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힘쓸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위로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할 사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서 51장 3절을 보면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같게 하였나니>라고 했습니다.

  51장 12절에는 <너희를 위로할 자 나밖에 또 누가 있느냐,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사람들을 겁내어서 불안해하지 말고, 너희를 위로할 자는 나 여호와 밖에 또 누가 있겠느냐? 나를 의지하라>고 이사야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66장 13절에 보면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제 2이사야서의 메시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위로하라는 테마로 전개되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3,4절에도 보면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이 짧은 구절 안에 <위로>라는 말이 4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냐? 여러 표현들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바벨론의 포로생활 중에 있는 유대백성에게만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우리에게도 위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고, 어떤 사람은 질병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고, 어떤 사람은 자녀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고, 어떤 사람은 가정문제 때문에. 어떤 사람은 배신 당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고, 어떤 사람은 원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고, 어떤 사람은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가 필요한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치 아니하는 사람은 이 땅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된 위로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물론 세상사람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위로가 될 때가 있습니다. 돕는 사랑의 손길도 위로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위로는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절망의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질병의 고통 가운데 허덕이고 있을 때에. 의사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나을 수 있습니다. 며칠 치료받으면 낫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에 대한 보장이 있어야만 참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떠나갑니다. 끝까지 변하지 아니하고 늘 곁에서 위로해 주는 사람이 마음의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근본적인 위로는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이 믿어질 때, 그래서 ‘아, 나는 홀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지금도 내 곁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구나’하는 믿음이 있을 때 진정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위기 가운데 누군가가 보내준 도움이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뿐입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요, 모든 천하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라>고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부유하신 주께서 친히 가난하게 되셔서 <내가 너희를 부유하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내가 너를 책임져 주리라. 내가 흔들어서 넘치게 채워주마>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믿어질 때에 그 하나님의 위로만이 참된 위로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위로, 물질로부터 오는 위로, 환경으로부터 오는 위로는 잠깐 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만이 참된 위로인데, 이런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로의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어떤 형편에 있든지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여러분들 가슴 속에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충만하게 넘치게 될 것입니다.

3. 위로의 출발

  위로의 근본적인 문제는, 죄사함으로부터 오는 위로입니다. 2절을 보면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으니 위로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의 비참한 포로가 되게 한 것이 바로 죄 때문입니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괴롭히는 것도 죄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불행을 가져다주는 것도 죄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도 다 죄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이 말하기를, 육체적인 질병과 정신적인 이상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마음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마음 속에 묻혀 있는 죄에서 오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지은 죄를 내가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전에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 무의식 속에, 내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어서 그것이 때로는 우리의 의식세계로, 때로는 우리의 행동으로 표출되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있는 죄가 육체를 병들게 합니다. 정신적인 이상을 가져오게 합니다. 가정을 파괴합니다.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모든 불행을 가져옵니다. 결국 심하게 되면 마음을 틈타서 죽음의 영, 자살의 영이 들어가서 삶을 파괴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의 포로가 되어서 죄가 시키는 대로, 죄가 이끄는 대로 더 큰 죄를 지으면서 살다가 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의 마음 속에는 두개의 자기가 있어서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자기가 있는가 하면, 죄된 자기가 있어서 죄악으로 끌고가고, 파멸로 끌고가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죄책감 속에서 시달리는 것이 오늘 현대인들입니다.

  심리학자 메닝거(Karl Menninger)는 어느 날 멕시코의 번화가에서 한 신사가 지나가는 대중을 향해서 손가락질을 하면서 “당신은 죄인이요”하고 외치니까 모두가 놀라고, 또 양심의 가책을 받는 표정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12명의 저명인사에게 “모든 것은 드러났다. 빨리 도망가라”하는 전보를 쳤더니,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전보를 받고 다 도망가고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인정하든 안하든,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죄가 인생을 불행하고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근본적인 위로가 절대로 마음 속에 올 수가 없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근본적인 위로는 돈이 아니었습니다. 부동산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하는 위로가 아니라,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는 “이제 해방되었다. 너희 나라에 돌아와서 자유롭게 살아도 좋다”하는 이것이 근본적인 위로의 말이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해방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해방의 길을 열어주어 자유의 몸이 되게 하여서 돌아가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참된 위로가 없습니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죄의 문제를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하나님이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세상에 있는 온 물을 다 동원하고, 세상에 있는 온 세제를 다 가지고도 우리의 죄를 씻을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를 공인(公認)한 콘스탄틴 대제도 가까운 가족들을 죽인 죄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방 종교, 이 종교 저 종교에 가서 “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가”하고 죄사함 받는 길을 구했지만 가는 종교마다 다 거절당했습니다. 우리 종교에는 죄를 사할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결국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를 위해서 구속해 주신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을 깨닫고 난 다음에, 마음의 평안을 얻고 세례를 받아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4. 위로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과 방법으로는 죄를 속하는 길이 없음을 하나님이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할 방법을 마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에게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웠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무리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값을 다 지불해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하는 이 말은 죄값을 다 지불했다는 뜻입니다.
  마치 부도직전에 있는 사람이 불안에 떨고 있는데, 그의 친구가 극적으로 수표를 막아주고 불안에 떨고 있는 친구에게 “내가 너의 수표를 막아주었네”하는 말과 같이, 그 모든 죄값을 다 지불했다는 말입니다.
  <지옥에 가야할 우리의 죄값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지불했으니, 내 백성에게 이것을 알려서 위로하라> 그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의 요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이뤄놓은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어떤 죄 가운데서라도 사함을 받으리라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죄 사함을 받는 사람만이 참된 위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책감 속에서 어두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죄책감 속에서 육체도 병들고, 가정도 파괴되고, 삶을 포기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고민이 지나치면 정신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한 자살이라는 최후의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우리가 해야 될 사명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다 지불해 주었으니, 그를 믿기만 하면 어떤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된다”고 전하는 사명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죄가 십자가에서 이미 사해졌다는 위로의 말씀을 전해야 됩니다. 죄 사함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축복이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됩니다.
  그래서 죄책감에서 이끌어내고, 절망에서 해방시켜내야 됩니다. 우리 자신이 이와 같은 죄사함의 위로를 먼저 경험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죄책감 가운데서 고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죄사함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그들을 위로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고, 이 복음 외에 근본적인 위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위로는 다소 위로가 될 수 있지만 근본적인 위로가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엄청난 희생을 하셨습니다. 아들을 내어놓는 희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백성을 위로하기 위하여서 “너, 1억원의 돈을 가지고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찾아다니면서 위로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 1년을 휴직하면서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다니면서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복역의 때가 다 끝났다. 모든 죄가 다 사해졌다. 십자가에서 다 사해놓았다”하는 사실을 전하면서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갚았으니, 예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모든 가난이 물러간다. 모든 질병이 치료되어진다. 나를 얽어매고 있는 모든 저주의 끈들이 다 풀어져서 죽음에서 해방되어지고, 사탄에서 풀려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모든 저주의 끈들이 다 차단되고 축복의 물꼬가 시작된다. 이 소식을 전하라. 이 소식만이 참된 위로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귀한 사명을 맡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생활고로 인하여서 절망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서 우리 주변에 있는 위로할 자를 찾아보아야 될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서 막다른 최후의 수단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찾아가고 살펴보아서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그들에게 나아가서 아름다운 위로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위로할 자를 찾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실천하여서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잡아주기도 하고, 눈물로 함께 기도해 주기도 하고,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주면서, 이 땅에 사랑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우리 성도들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살도 어렵다고해서 자살하는 줄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렵다고 자살하면 다 자살하게요. 이 세상에 한번도 어려움 당하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살도 자기 마음대로 자살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살의 영이 있습니다. 자살의 영은 사탄이 주는 영입니다.
  몇 년 전에 박효진 장로님을 초청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의 책을 읽어본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인데. 수년 전에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일가족을 다섯 명이나 살해한 이호성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에게 한 영이 들어와서 계속해서 목을 조르면서 하는 말이 “네 가족을 죽여라. 죽여라” 심지어는 죽일 망치가 어디 있는지, 칼이 어디 있는지 그것까지 다 보여주면서 죽이라고 계속해서 들볶았습니다.
  어떻게 아버지를 망치로 때려죽일 수 있겠냐고 하니까 목을 조르면서 계속해서 죽이라고 괴롭히니까, 견딜 수가 없어서 다섯 명의 일가족을 한꺼번에 죽였습니다.
  죽이고 나니까 이 귀신이 얼마나 힘을 주는지, 마당을 파는데 딱딱한 마당을 파는 것이 마치 모래를 파는 것처럼 쉽게 파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찰들이 생각하기를 “이 시간 안에 이 구덩이를 판 것을 보면 절대로 혼자서 팔 수 없다. 적어도 두 세 사람이 함께 판 구덩이지, 혼자서 팔 수 없다, 그러니까 공범이 있다.”고 하여 공범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죽이고 나니까, 이제는 “너는 죽어야 한다. 너 죽어라. 네가 아버지 죽이고, 형수, 조카까지 죽이고 어떻게 살 낯이 있느냐? 죽어라”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향해서 죽으라고 강요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교도소에 들어왔고 박효진 장로님을 만나 기도하여서 자살의 영, 어둠의 영을 쫓아내었을 때 그는 자유한 사람이 되고 예수 믿어서 교도소 안에서 복음전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지고, 세상을 떠날 때 ‘하늘가는 밝은 길이...’ 찬송을 부르면서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가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 땅에 만 명이 넘는 사람이 자살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제 정신으로 그런 것 아닙니다. 그들 마음 속에 자살의 영, 악한 사탄이 자살할 생각을 불어넣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하면 자살의 영에게 명령을 해야 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나라에 활동하고 있는, 부산에 활동하고 있는 모든 자살의 영들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갈 지어다!!” 그렇게 계속해서 명령하며 대적(對敵)하는 기도를 해야만 이런 영들이 점점 물러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여러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살을 마지막 수단으로 씁니다. 그들에게 가서 이야기해야 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죽음은 과정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과정이요, 지옥 들어가는 과정이다. 내가 예수 믿지 아니하고 죽는다고 하면 이 땅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 죽음 다음에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야만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들을 위로하며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죽고 나면 끝나겠지. 나 죽으면 다 해결되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죽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도 보니까 현대 아산의 정 회장의 죽음이 해결이 아니고 더 많은 짐들을 사람들에게 남겨놓고 갔다는 겁니다. 죽음이 인생의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이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답이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마스터키(Master-Key)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사람들이 왜 이렇게 자살하는 줄 아십니까? 자존감(自尊感)이 낮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자존감이 낮습니까? 사람은 우연히 나와서 우연히 살다가 우연히 가는 것, 그러니까 바람같이 왔다가 바람같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죽음으로 끝내자’고 해서 자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이 땅에 사명을 가지고 살다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다가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생명을 마음대로 끊어버릴 수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을 우리 이웃들에게 심어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팽배하게 늘어나고 있는 절망과 자살의 영이 흉흉한 이러한 때에 우리가 위로해야 되는데, 위로는 인간적인 말을 가지고,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가지고 위로할 수 없습니다. 참된 위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충만히 채워져서. 그들 가슴 속에 들어가서 진정한 위로를 받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된 위로는 예수님을 믿어서 죄 사람 받아서 누리는 자유에서 오는 것이 참된 위로입니다. 이 위로를 받아서 경험할 수 있는 우리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이 위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절망하다가 자기의 삶을 끊어버리는 소망없는 사람들에게 참된 위로를 심어주어서 힘차게 승리하며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로할 자를 찾아보십시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했는데, 어떤 자를 위로할 것인가 찾아보고, 그들을 위에 덮혀있는 자살의 영을 명령해서 쫓아버리고,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을 소개하고, 참된 문제해결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소개하여서,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된 위로를 받으며 승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날마다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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