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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기억하는 사람 / 행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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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0:1-4
하나님이 기억하는 사람

우리 인간에게는 남의 기억함을 받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고, 남이 나를 인정해 주고, 남이 나의 가치를 존중해 주기를 누구나 바랍니다. 이 본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삽니다. 부지런히 노력합니다. 이름을 남기려는 수고를 합니다.

역사상 그 이름이 기리 기억되는 사람은 참 아름다운 일생을 살다 간 분들입니다. 남보다 탁월한 능력과 공헌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나 다 남의 기억함,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혹 다른 사람의 기억함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퇴직하면 곧 내 자리는 다른 사람이 채우며, 나의 존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질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몇 몇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겠지만, 아마도 수십 년 세월이 지나 한 두 세대가 지나면 나의 존재는 인간 세상 속에서 기억함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렇게 허무한 것이 우리 인생이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기억하심입니다. 세상이 나를 잊어도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신다면, 나는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세상이 나를 버려도 하나님이 나를 붙드신다면 나는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세상이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신다면 진정 우리는 고독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4절 후반절 말씀을 보면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고넬료라는 사람은 참 복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의 생애도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생애가 되시기를 진정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고넬료라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는가,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 이 경외라는 말은 공경한다,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고넬료는 당시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있는 로마의 군인이었습니다. 피점령지인 이스라엘에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 나라 사람들이 믿는 종교를 믿었습니다. 즉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우위에 있지만, 종교적으로는 유대 사람들이 옳다는 것을 알고 믿은 것입니다. 또 믿되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사실 군인은 두려워하는 것이 없습니다.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용기가 군인의 최고의 덕목입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적은 두려워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두려워했습니다. 참 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군인, 바로 여기에 고넬료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곳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분 인줄 몰라 요즈음 세상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대로 이기적으로 살고, 물질적으로 살고, 방탕하게 삽니다. 사람들이 제 멋대로 사는 이유를 살펴보면 그 근본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정치 경제가 어려운 이유의 근본은 하나님을 사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기 때문이 그 근본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군인이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니, 참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무서워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더 높은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높아지고 높아지면, 거룩함의 속성을 배우게 되고, 그럴 때, 진정한 두려움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누군가를 사랑하면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두려워합니다.

내가 정말 남편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저녁에 들어오는 남편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기분이 어떤지, 피곤한지 어떤지, 사랑하는 사람의 이것저것을 다 생각하고 나면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두렵고 공경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하루는 수험생 어머니가 제게 부탁하기를, 내 아이가 무슨 대학에 가려 하는지 좀 물어봐 다라고 합. 직접 물어 보시지요 했더니, 그것 참 어려워서 못 물어보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참 신경이 예민한데, 덮어놓고 물었다가, 생각보다 낮은 학교 가야하면 자존심 상할 것이고, 실력보다 높은 학교 가려면 스스로 괴로울 것이니, 아이에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어머니는 아들의 자존심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학교에 입학원서를 낼 것인지를 선뜻 묻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두려움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갖는 두려움입니다. 그 인격을 사랑하고, 그 자존심을 사랑하고, 그 기분을 사랑하고 보니, 자기 아들에게도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두려움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런 두려움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특별히 24절에 보면 고넬료는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까지 다 모아들여 기다렸다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온 집안으로 더불어 그런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온 집으로 더불어 믿는 것이 아름다운 경건입니다.

둘째는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했습니다. 선한 일에 힘쓴 사람입니다. 4절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합니다. 고넬료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위로는 하나님께 경건함으로 마음을 열고, 옆으로는 어려운 이웃을 향해 구제로 마음을 연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고넬료는 점령국의 고급 장교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이 생활화하면서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피 점령지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비참한 사람들을 기억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어려워지면서 우리는 이웃을 외면한 채 오직 내 한 심령과 가정의 구원만을 위해 기도하고 열심을 품는 개인주의적 경건만을 추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된 경건은 언제나 이웃을 바라보며,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구제는 하나님께서 꼭 기억하시고 알아주시는 일임을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도덕적 향락주의자들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보다 약한 사람을 동정하고 도와주지만, 그 목적이 주는 자로서의 기쁨을 누리려는데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때론 남이 나의 선행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저 사람은 은혜도 모른다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구제가 오히려 갈등의 원인이 되고 스스로 교만에 빠지는 함정이 됩니다. 이런 구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경건에서의 선행이 아닙니다. 또 구제받는 상대방을 위한 선행도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자기만족을 위한 선행일 뿐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참된 구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행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이웃을 도와주기를 원한다면 행동하기에 앞서 구제의 동기가 진정 이웃을 위한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남은 몰라도 세상은 몰라도, 하나님은 진정한 구제를 기억하십니다.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고넬료를 향해, 네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넬료를 기억하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을 하면서 이번 사업의 초점을 남을 돕는 일에 두었습니다. 지역 사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이나, 북한의 굶주린 어린이들에게 분유를 보낸 일이나, 중국 조병산시에 교회를 세운 일이나 참 귀한 일이요 복된 일을 우리가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여전도회에서 바자회를 개최해 그 수익금으로 아직도 태풍 매미의 피해를 벗어나지 못한 지역과 교회를 방문해 직접 그들을 도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선한 일을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은혜를 알지 못한다고, 고마움을 모른다고 우리가 섭섭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제의 상급은 우리가 다 까먹는 일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것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 큰 구제를 할 수 있도록 더 큰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여건과 상황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는 줄 믿습니다.

고넬료는 어쩌다 한 번 구제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고넬료에게는 구제가 일상적인 삶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자신이 넉넉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축복을 나누고 싶어서 끊임없이 도울 사람을 찾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아름다운 마음을 꼭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니 그 구제에 응답을 하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성도님들, 성도님의 이웃을 향한 사랑과 구제와 선행이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받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더욱 사랑의 손길을 넓게 펼쳐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받는 교회로 세워지도록 힘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고넬료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2절 말씀을 후반절을 보니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정 기도에 힘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고넬료의 기도와 기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기도의 뜻 중 하나는 “하나님과 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여 얻는 것도 물론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기도의 참 뜻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 하나님이 내 삶의 등불이며 소망이며 근원이며 내가 돌아가야 할 내 영혼의 고향 같은 분이라면, 그 분과 함께 있는 시간은 참 즐겁고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고넬료가 무슨 제목으로 기도했을까 하는 것이 궁금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추측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고넬료는 출세하게 해 주세요, 돈 좀 많이 벌게 해 주세요,잘 되게 해 주세요,기도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이런 짐작이 맞을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모르는게 너무 많습니다. 아무쪼록 잘 가르치는 좋은 지도자를 보내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밝히 깨달아 알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런 기도였을 것이라 상상합니다. 내가 지금 경건하게 살고자 애쓰고 있으니 좀 더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게 해 주세요, 이것이 그의 기도 제목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후의 말씀을 보면 고넬료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사의 지시를 받자 즉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청했으며, 베드로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여기에 고넬료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또한 고넬료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참으로 겸손한 모습으로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은혜 받을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44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가운데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구원이 그 집에 임했습니다. 크신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고넬료는 기도의 사람이었기에 그 기도가 하나님의 기억함을 받아 그 가정 전체가 구원을 얻는 놀라운 축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사실 나의 지식, 나의 사회적 지위, 나의 경험, 나의 물질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사는 사회에서는 중요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교만이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겸손하고 낮아진 고넬료의 가정에 놀라운 성령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은 고넬료가 기도의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기도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입는 존재들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 소개함으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커다란 유리병을 갖다 놓고 그 안에 제법 큰 돌 몇 개를 아구까지 채웠습니다. 그리고 이 병이 가득 찼습니까,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그 병에 작은 자갈을 넣으니 한참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묻습니다. 이 병이 이제는 다 찼습니까, 사람들은 예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니 다시 그 병에 모래를 가득 채우고, 다시 그 병에 물을 부으니 모래도 물도 한참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한번 더 질문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제가 뭘 말하려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항상 더 집어넣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득 차 있어 보여도 얼마든지 더 쑤셔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목사님은 고개를 저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많이 넣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큰 것부터 병 속에 넣지 않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무슨 일에든지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우선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입니다. 기도 생활입니다.

내가 시간이 있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남아서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할 일이 없어서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이요, 가장 중요하기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성도님들 기도에 힘쓰시기를 진정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기도로 이루어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꼭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 경건하고, 구제와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받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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