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버지의 마음 / 눅 15:11-20

  • 잡초 잡초
  • 268
  • 0

첨부 1



아버지의 마음
누가복음 15:11-20


누구나 인생 살 동안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우리 ‘부모’라는 데 주저 않고 동의할 것입니다. 그 중 어머니에 대한 연구는 많이 있었고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녀의 삶에 얼마만큼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이 연구되지 않았습니다. 최근 들어 활발해지기 시작했는데 연구 결과들을 정리해보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 자존감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정도, 일을 이루어내고자 하는 목표의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미국 정신건강학회 로렌 모센(Loren Moshen) 박사는 청소년들의 음주와 관련해서 미국 인구를 조사한 결과 가정에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 빈곤보다 더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1948년부터 64년 사이에 존 홉킨스 대학 의사들을 중심으로 조사했는데 부모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것이 고혈압, 동맥관상의 질병, 악성종양, 자살의 공통된 요인이라는 것도 조사했습니다. 예일 대학교 행동과학자들은 전세계 48개 문화권에서 음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없이 어머니에게만 교육 받고 자란 아이들이 후에 성인이 되어서 범죄자가 될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고 보고합니다. 한 가지 더 말씀 드리자면 아만드 니콜라이(Armand Nicholi)라는 사람의 조사에 의하면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의 정서적, 신체적 영향에 대해서 ‘낮은 성취욕, 낮은 자존감 그리고 나중에 받을 상을 바라보고 현재 하고자 하는 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 동료들의 압력에 쉽게 굴복하고 쉽게 유혹에 약하고 청소년의 음주에 원인이 된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1976년도 한국인 최초이자 시각장애인으로 박사가 된 강영우 박사를 여러분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박사님의 ‘아버지와 아들의 꿈’ 이라는 책에 장남 진석군이 하버드에 지원할 때 받은 질문과 그에 답한 글이 있습니다. 당신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준 사건이나 경험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진석군의 글은 대학입시 관계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글은 이렇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육안이 없이도 볼 수 있는 세계를 보여주신 맹인 아버지를 가지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가를 깨닫게 된다. 두 눈을 뜬 내가 두 눈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안내자가 아니라 맹인인 아버지가 정안자인 내 인생의 안내자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나도 성장하여 대학에 진학할 나이가 되어 많이 변했다. 그러나 그러한 세월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잠자리에서 읽어주신 이야기들이 내게 미친 영향이다. 아마도 그 영향은 영원할 것이다. 그로 인해 내 상상의 세계는 넓어졌고 창의력은 개발되었으며 비전은 선명해졌다. 또한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배웠다. 아버지로 인해 나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도전하며 편견과 차별이 없는 사회건설에 기여할 의욕을 갖게 되었으며 누구나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삶의 태도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 이야기에도 아들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한 아버지를 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아버지는 어떠하셨습니까? 우리 인생과 운명을 더 나은 삶으로 바꾸어 주셨던 아버지였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오늘도 가슴의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도록 깊은 고통을 준 분이었습니까? 제가 소개하기를 원하는 아버지, 성경에 보이는 이 아버지는 아들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파멸로 가는 아들의 삶을 새롭게 돌이켰습니다. 바로 이 아버지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성경에서는 이 아버지를 인격적인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떠난다고 했을 때 끝까지 기다렸고 강제로 막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자기 길을 결정할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그 가는 길에 어려움과 고생이 있을 것을 알았고, 고독과 외로움이 지배하리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또 마음은 몹시 슬프고 인생이 어떠하다는 사실도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쨌든 최종적인 결정은 아들에게 맡겨두는 인격적인 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비인격적인 순종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왜 이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려 했을까요? 배경을 알기 위해 이야기를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픔을 주는 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라 표현합니다. 이 표현으로 봐서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요청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이제 제가 아버지 곁을 떠나야겠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면 주실 유산을 미리 좀 주시지요.” 이야기의 배경인 당시 유대에 있어서 이와 같은 요구는 아버지보고 빨리 돌아가시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아버지 곁을 떠나려고 한 이유를 15장 1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여기서 무엇이 강조되고 있습니까? 반복되는 단어가 아니겠습니까? 내게, 내게……내게 달라. 마음대로 한번 살아보겠다는 의식이 가득합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의 사랑도 가정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 인생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인생이 처음 타락할 때도 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먹지 말라고 그랬느냐?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따먹으라. 그것을 따먹으면 너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

청소년 보호 위원회에 따르면 가출 청소년들의 가출 이유가 34%는 부모와의 갈등 때문이었고, 13.4%는 공부에 대한 부담감, 7.7%가 부모의 지나친 기대, 학교 생활 싫증이 3.7%나 된다고 했습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만 이 모든 이유의 근본을 조용히 살펴본다면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부모가 간섭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학교에서 이것 해라 저것 해라 간섭한다는 것입니다.

뜻대로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게 만드니까 그 환경을 떨쳐 버리고 인생의 주인이 되고 하나님 되기 위해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싫습니다. 아버지는 마음 아프고 가슴에 울음을 참으면서도 아들의 결정을 따라 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들의 행위를 따라 아들을 대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어떻게 하던지 아들의 필요를 따라 날마다 공급해 주며 아버지 자신의 사랑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은 이렇듯 인격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아버지는 어떠했나요? 아버지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고함치고 매를 들어서라도 강요했던, 그래서 자식들 마음에 상처와 아픔을 남겼던 아버지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버지 보기에 옳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가 하고 싶어하는 일이 좌절되어 상처 받은 영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어떤 아버지입니까? 자녀들을 그 행위를 따라 대하지 않고 인격과 사랑으로 인내하며 기다려 주고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는 아버지입니까? 우리가 바라기는 이런 아버지를 원치 않겠습니까?

둘째로 이 아버지는 조건 없이 아들을 받아주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은 받은 재산을 가지고 먼 곳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허비합니다. 둘째 아들 때문에 상처 입은 아버지는 그러나 아들이 나간 때부터 용서하고 문밖에 서서 돌아오기 만을 기다립니다. 마음에 아픔으로 기억되는 이 아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발의 동기가 좋지 않으면 과정이라고 해서 좋을 수 없습니다. 아들이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다 허비했을 때 그 땅에 흉년이 왔습니다. 그리고 청년의 인생에도 흉년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청소년 보호위원회가 2003년 7월 전국 중고 남녀 학생 1만 3천 5십 1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중 ‘가출한 이후 무엇을 하였느냐?’라는 질문에 대부분 공원벤치나 공중 화장실 등을 배회했고, 서울지역에서는 두산타워, 밀레오레등 대형상가가 밀집해 있는 동대문 일대나 한강일대를 배회했다고 답했습니다. 응답자의 23.4%가 가출한 이후 여관이나 여인숙에서 잠을 잤고 길거리나 빈집, 길거리에서 밤을 보낸 청소년도 무려 9%나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친구집, 유흥업소, 노래방이나 찜찔방, 혹은 비디오방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대한 가족 복지협회가 지난 5월 선도 보호시설에 입소한 10대 여자 청소년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86%가 가출한 이후 성관계를 하고 임신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허랑방탕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가출한 인생, 아버지 곁을 떠난 삶은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었습니다. 아들은 자유를 찾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돼지와 함께 우리에서 거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심지어 돼지가 먹는 음식도 먹지 못해 굶주려 죽게 되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떠났지만 빈곤과 비참함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뜻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고 지쳤고 몸에는 냄새가 났으며 신발은 다 떨어졌습니다.

그럴 때 한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가면 일꾼들도 풍족한데 집으로 돌아가야지.’ 돌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성경을 보니 이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 아들의 방황을 알았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돼지우리에서 함께 먹으며 흐느꼈을 아들의 흐느낌을 알았습니다. 지치고 힘들고 외롭고 고독했던 아들, 밤하늘 별을 보면서 홀로 외로이 울었던 그 울음을 아버지는 알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냄새 나는 그 아들을 품에 안았습니다. 받아주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조건 없이 품에 안아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아버지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얼마 전에 충격적인 사건을 접했습니다. 6년 동안 희귀병으로 전신이 마비된 채 인공 호흡기에 의존해서 살던 20살 된 딸의 가망없음을 듣고 인공호흡기를 떼어 딸을 죽인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이 사건에 깊이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 상황에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아버지와 달리 별다른 수가 있었을까요? 별다른 수가 없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듯 세상의 아버지는 기다리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받아줌에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에 맞지 않으면 거절하는 것이 세상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는 조건 없이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끝까지 인내했습니다.

셋째 이 아버지는 탕자를 여전히 아들로 여기고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켜준 아버지였습니다.
아들은 이미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는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써 주십시요.” 라고 말한 것이지요. 아버지는 이 아들을 여전히 아들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4절 이 아들을 죄인이나 품꾼의 하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는 기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억은 경험에 의해 형성됩니다. 주로 극단적인 감정의 경험을 겪고 나면 기억으로 오래 남습니다. 이 기억에 따라 사람을 대하기도하고 일을 풀어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속에 남겨진 아들에 대한 기억은 어떠했을까요? 떠나기 전에도 아들은 아버지의 기억 속에 죽은 아들과 마찬가지였고 떠날 때도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기억 속에 용납할 수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의 죄와 허물을 따라 기억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아버지 마음속에는 아들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들을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존재, 여전히 인도가 필요한 존재, 여전히 사랑 받을 만한 존재로 그리고 상속자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신발을 신겨주고 새 옷을 갈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아들로서 위치를 회복시켜 주어 다시 시작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아버지는 이런 아버지가 아닐까요? 이런 아버지를 만난다면 삶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 품에 얼마든지 안겨서 엉엉 울고도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 아버지의 품. 그런데 우리 아버지의 품은 왜 그리 좁았던가요? 왜 그리 차가웠던 가요? 이런 아버지를 만났더라면…… 탕자에게만 필요한 아버지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아버지가 아닐까요?

우리에게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탕자는 왜 이렇게 살았을까요? 둘째 아들은 왜 이렇게 살았을까요?

최근에 나온 존 맥스웰의 저서 ‘생각의 법칙 10+1(Thinking for a change)’ 라는 책이 있습니다. 부제는 ‘당신의 생각이 인생을 결정한다’ 입니다.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생각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가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는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돌아온 아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요? 아들의 머릿속에 있던 행복에 대한 정의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는 물질이 풍성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가족의 따뜻한 사랑을 그는 잊어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인도함과 가르침, 사랑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물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랑보다도 물질만 요구하고 나갔던 것입니다.

또 인생의 행복은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할 때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이 좌절될 때 참 많이 괴롭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의 기초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을 잡으려고 하고 돈을 가지려 합니다. 마음대로 하기 위해 지식을 쌓습니다.

그러나 권세를 가지면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권세를 누렸던 사람들, 그들은 지금 역사의 한 모퉁이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이 가하지만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그 아들은 몰랐습니다.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그 음식 중에는 몸에 유익이 되는 것과 독이 되는 것이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아들은 즐기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은 행복하고 기쁘게 살기 위해 허랑방탕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이 어땠습니까?

야망도 젊음도 있었기에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아들의 행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까? 돈을 다시 주면 행복해질까요?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다시 행복해질까요? 마음껏 쾌락 속에 살면 행복해질까요?

아들의 행복은 아버지 안에 있었습니다. 아버지 안에 그의 행복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안에 그의 쉼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안에 그의 미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아버지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전에는 몰랐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둘째 아들을 통해서 오늘 나 자신을 발견할 순 없습니까? 내 살아온 인생의 한 진실이 담겨 있지 않습니까? 한 때 푸르른 꿈, 야망이 있었습니다. 물질도 있었습니다. 마음먹은 것을 할 수 있는 의욕도 있었습니다. 즐거움을 쫓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마음대로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지금 내가 진정 바라던 모습과는 영 다르다면 탕자 속에서 우리 자신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인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바로 탕자가 돌아갔던 아버지 품입니다. 성경은 이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강제로 열어젖히지 않습니다. ‘나를 아버지라 믿어’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던 아버지를 무시했던 아버지를 몰랐던지 간에 끊임없이 사랑해 주십니다. 오늘 이 사랑과 공급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공급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누구에게든지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사랑을 공급해 주십니다. 죄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아버지는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아들의 회복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리라’ 결단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는 연습이 없습니다. 오늘이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 마음대로 뜻대로 살아왔는데 변화가 없었다면 인생의 궤도를 수정해야 될 때가 아니겠습니까? 그대로 살아가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가는 인생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십시오. 주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떠나 우리 마음대로 살 때에, 여기에 행복이 있다 저기에 행복이 있다고 방황하던 지나간 모습을 알고 계십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서 흘리던 눈물을 하나님은 알고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품에 안아주신다고 약속합니다. 쉴 틈 없었던 인생, 기관차처럼 달려왔던 인생, 피곤한 몸 한군데도 기댈 곳 없었던 내 인생을 주님께서 그 품에 안아주신다고 약속합니다. 젖 먹는 아이가 엄마 젖을 충분히 빤 후 품에서 느끼는 그 평안함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 맞습니다. 내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내 행복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내 행복은 바로 아버지 앞에 돌아갈 때 있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그 결단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결단하지 못하면 일평생 이 기회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