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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의 믿음 - 지팡이 머리에 의지한 경배 / 히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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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히브리서 11장 21절
제 목 야곱의 믿음 - 지팡이 머리에 의지한 경배 


여러분은, 신앙인으로서 당신이 살아온 일생 중 제일 믿음이 아름다웠던 때를 손꼽는다면 어느 때를 손꼽고 싶습니까? 왕년엔 참 신앙 좋은 때도 있었지.. 이런 분은 오늘 각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분은 행복한 분일 것입니다.

저희가 믿음을 배우기 위하여 오늘 주목해 보고자 하는 인물은 야곱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야곱의 일생을 짧게 요약하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죽을 때의 모습을 제일 믿음이 아름다웠던 모습으로 손꼽았습니다.
죽을 때의 야곱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죽을 때에 야곱이, 아들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하는 그 장면,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하고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는 그 마음을 야곱의 믿음이 제일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았습니다.

이게 어찌 믿음이란 말이냐? 이런 회의를 갖을지 모르겠는데...  오늘 히11:21절 말씀, 중간에 다 빼고 동사만 남겨 놓고 읽으면 이렇게 되지요? "믿음으로 야곱은 축복하고 경배하였더라"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마음이 믿음의 진수, 아름다움입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빌어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와 자기 가족이 복받을려고 애쓰지 다른 사람 복받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야곱은 형의 복을 사기쳐서 가로채기까지 했던, 더욱 자신이 복받기 위하여 온갖 지혜와 노력을 다했던 사람으로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습, 죽을 때에지만, 이 모습이 야곱의 일생에서 제일 아름다운 모습, 믿음의 모습입니다.

야곱은 이 믿음을 죽을 때에야 배웠습니다. 자기 복받기 위하여 별 짓 다했던 놈이 다른 사람에게 축복하는 아름다운 믿음을 보이기까지... 사연이 많았겠지요? 그래서 야곱의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마음이 왜 믿음의 진수(眞髓)인지 제대로 알기 위하여는 야곱의 일생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야곱이 어떤 사람인지는 대충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야곱 하면 여러분 어떤 장면에 떠 오르십니까? 형 에서를 간교하게 속인 장면, 돌베개베고 자는 것,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수일처럼 봉사한 날들, 자기 재산 모으기 위하여 유전자 조작을 하여 살찐 양은 자기 것 삼은 것, 얍복 강가에서의 씨름, 형 에서를 다시 만났을 때 한없이 우아한 모습...등등

야곱의 일생에서 중요한 순간이 세 번 있습니다. 야곱은 그의 일생에서 세 번 중요하게 하나님을 만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이 세 번의 만남이 있을 때마다 야곱의 마음이 변하고 생각이 깨우칩니다. 믿음이 성숙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인생의 행복, 하나님이 주신 복이 무엇이냐는 행복에 대한 야곱의 관점이 바뀝니다. 
<창28장>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외삼촌 집으로 피신가는 첫 날밤, 돌베개 베고 자는 밤.
<창32장> 형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 얍복 강가에서
<창35장> 딸이 강간당하고도 분연히 일어서지 못하고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신 장면.
이렇게 세 장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야곱의 일생에서 중요한 만남입니다. 이 세 만남을 통해서 야곱의 인생관이 성숙하고 야곱의 믿음이 성숙해 갔습니다.
첫 번째 만남은 형 에서의 살의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향하여 떠나는 첫 날 밤, 험난한 인생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듯, 돌베개를 베고 자야하는 그 밤에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축복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 축복은 새로운 축복이 아닙니다. 이미 그의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복을 하나님께서 다시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고 하였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하나님의 아름다운 축복의 뜻이 있어서 이 땅에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민족이 너에게서 나오고 너희 후손을 번성케 하리라는 약속입니다. 사실 이 복의 약속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을 이어 계승되어 온 약속입니다.
돌베게 베고 자는 벧엘의 밤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네 인생길이 지금은 내가 약속한 복과 정반대로 가는 것같지만, 그러나 네게 약속한 나의 축복의 비젼은 반드시 성취된다고 확인해 줍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야곱, 한결 강건해진 마음으로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라반의 집에서 경쟁에 익숙한 도전자, 승부근성이 뛰어난 승부사, 아무에게도 지지 않는 놀라운 집착력의 사나이로서, 야곱은 자신이 야곱임을 유감없이 보여 주며 부와 재산을 모읍니다.
이쁜 아내를 얻기 위하여 기뻐이 14년을 수고하기도 하고 자기 것 챙기기 위하여 신풍나무로 유전자 조작을 하기도 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죽을 지도 모르는 스릴을 즐기면서까지 외삼촌 가문의 보배, 드라빔을 훔쳐서 나오기까지.. 그렇게 해서 자신이 챙길 것 다 챙겨가지고 나오는데...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형 에서가 사병 300명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에 20여년을 수고하여 모은 재산이 한순간에 다 날아갈 것같은 위기에 직면합니다.

야곱의 일생에서 두 번째 중요한 순간,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 때 이루어집니다. 형을 만난다는 생각에, 자신이 애써서 모은 재산과 처자들 뿐만이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도 한꺼번에 다 날라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떻게 잠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 때에 야곱의 심정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In great fear and distrss)<창32:7> 또 <창32:13> 야곱이 거기서 그 밤에 경야했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뜬 눈으로 밤을 새고 있는, 잠 못 이루고 밤새 뒤척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듯이, 그 밤에 야곱은 자신의 재산과 처자를 얍복강을 다 건너 보내고 이제 강가에 홀로 남아 있던 때, 자신만 건너면 형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겠다는 주사위는 던져지는 순간에,
성경은 불쑥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찾아와 야곱과 밤새 씨름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그 자신도 밝히지 않았고 성경도 밝혀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밤새 씨름하던 그 밤에 야곱은 이 사람을 이겼고 이긴 야곱을 향하여 이 사람은 야곱에게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이겼다"는 뜻으로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바꾸어 줍니다. 이스라엘, 하나님과 싸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밤새 씨름하여 이겼지만, 야곱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그 밤에 새겨집니다. 붙잡고 놔주지 않는,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야곱을떼어 놓기 위하여 이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엉덩이관절을 칩니다. 엉덩이뼈 관절이 부숴져서 야곱은 그 때부터 평생토록 똑바로 서려면 지팡이에 의존해야만 하고 걸으려면 절뚝거려야만 했습니다.
그가 씨름한 얍복강가, 야곱은 그곳을 브니엘이라 불렀습니다. 성경의 아주 탁월한 문학적 표현 중의 하나가 <창32:31>입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힘있게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의 마지막 장면이 이 장면을 연상한 것입니다. 야곱의 일생의 단면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장면입니다. 브니엘을 지나면서 그의 일생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햇살이 함께 하였고 그러나 그는 절면서 나아가야 하는, 영광의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 "그가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더라" 이 묘사와 그 의미가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 브니엘의 체험 이후, 그리고 이후 형 에서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는 체험 이후 야곱의 마음에 큰 변화가 있습니다. 인생의 행복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복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야곱의 관점이 크게 변합니다.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것, 돈이든 양이든 소이든 마누라든 제일 이쁘고 제일 크고 제일 많이 가지는 것, "더 크게, 더 빨리, 더 높이" 움켜 쥐는 것이 복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온갖 지혜와 수고를 다하여 성취와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것들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 있다는 세상의 진실에 직면하고 나서, 그 시리도록 차가운 세상의 진실에 지치도록 마음고생을 한 이후, 야곱의 마음에는 "세상에 마음 편한 것이 최고의 행복이구나, 외적인 환경, 여건이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심령이 썩어지는 일없는 것, 뼈속 깊이까지 속을 뒤집고 후비고 아리도록 고통을 주는 일이 없이, 마음에 즐거움의 노래를 부를 수 있고 평안을 누릴 수 있고... 속 편한 것, 마음의 평안이 제일이구나" 이렇게 깨달았습니다.

환경적 풍요가 행복, 축복이 아니고 심령의 평안이 진정한 행복이구나 깨달은 것입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축복관이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의 삶에서 야곱은 그렇게 다른 사람 이기려고 자기 것 챙기려고 아웅다웅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을 주는 아들, 특히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 요셉이 커가는 것을 보는 재미로 삶의 낙을 삼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지어 입히지요.
이처럼 야곱의 축복관이 확연히 바뀌었음을 나타내주는 한 사건이 <창34장>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족속 추장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난 다음의 일입니다. 지고 못사는 야곱의 성깔로 보면, 절대로 가만히 안있어야 하는데, 야곱은 전혀 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디나의 오빠들, 누가 야곱의 아들들 아니랄까봐, 이 분개하여, 세겜 족속을 속여가지고 다 할례를 받게 하고서 잘 움직이지 못하는 때에 가서 세겜 남자들을 다 죽여 버립니다.
다 죽여 가지고 통쾌하게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아들들에게, 야곱이 "어 통쾌하다, 장하다 내 아들들아!" 말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왜 화를 끼쳐 냄새를 내게 하여 나로 죽게 하느냐" "왜 벌집을 쑤셔 놔 가지고 시끄럽게 하느냐, 이것들아 제발 좀 조용히 살자" 고 합니다. 그러자 아들들이 "아니 아부지, 우리 누이를 창녀취급했는데 그것을 그냥 용납하라구요, 참을 게 따로 있지요?" 대꾸하지요.
야곱, 늙었다라기보다도 그의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지지 않는 것보다, 이기는 것보다, 떵떵거리고 사는 것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가는 것보다.. 마음 속 편한 것이 행복이구나 그의 관점이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은 뭐가 더 행복의 조건일 것같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벌고 더 잘 나고 더 있어보이게 사는 것이 행복일 것같습니까?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제일 행복일 것같습니까?

성경적 해답을 말씀드리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둘 다 아닙니다. 이제부터 말씀드리는 세 번째가 인생의 지고의 가치이며 인생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이 때에 야곱의 일생에서 중요한 세 번째 하나님과의 만남, 제일 중요한 한 만남이 있습니다. <창35장> 이렇게 소시민적 삶이 행복인양, 현실도피와 개인의 무사안일에 치우쳐 있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서 네가 처음 형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네 내가 너를 만나주었던 그곳에 다시 서라"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 때의 야곱의 반응은 이전과 사뭇 다릅니다. 이번에는 그는 하나님께 나아갈 준비를 하고 나아갑니다. 그냥 일요일이면 예배드리러 그냥 간 것이 아니라 이때부터는 준비한 것입니다. 옷도 제일 깨끗한 옷 입고 일찍 가기 위하여 토요일은 일찍 자고 헌금도 깨끗한 돈으로 준비하고...
야곱의 마음에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실재적으로 되어진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의 지나간 삶의 과정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 벧엘에 다녀온 이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을 거쳐 내려온 가문의 축복을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창35:10-13절>
야곱은 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비전의 약속, 축복의 약속을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그의 일생에서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 최선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그는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 이후의 삶에서 야곱의 심령은 그렇게 크게 요동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후의 야곱의 삶, 보잘것 없습니다. 애지중지 한 아들, 요셉은 잃어버렸지요, 흉년이 들어서 재산은 고사하고 먹을 것도 하나도 없지요, 양식 구하러 아들들 보냈더니 여차여차해서 베냐민마저 떠나 보내야지요, 이 베냐민을 떠나 보낼 때 야곱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
왕년의 야곱같지 않은 모습입니다. 이제는 삶의 여건에 따라, 자신의 마음에 찾아오는 고락에 따라 그의 심령이 크게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신을 기다리고 말년에, 하나님의 약속과는 다르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가서 애굽에서 일생을 마칩니다.

그의 행복관, 인생관이 또 한번 바뀐 증거가 애굽에서의 그의 모습입니다. 말년의 야곱, 재산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의 일생에 평탄하게, 평안하게 산 것도 아닙니다. 지나간 날들 생각하면 참 험악한 세월 보냈습니다. 그가 이전에 생각했던 행복관, 인생의 행복은 이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 그래서 집착하여 매달렸던 것, 하나도 노년의 그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심령이 소위 천추의 한에 맺혀서 암에 걸렸다거나 다른 사람을 향한 원망과 질시로 마음에 독기가 서렸다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노년의 야곱의 모습, 자약(自若)의 상태임을 여러 증거로 보여줍니다. 이제는 집착에서 초월하여 소유가 있든지 없든지 인생의 길이 희락의 길이든 분노와 슬픔의 길이든 초연한, 초월한 자약의 심령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야곱이 자기 열 두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장면에서 나타납니다. 그 중에서도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하는 장면에서 나타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이라 말씀하셨는데 자신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도리어 애굽 땅에서 임종을 맞이해야 합니다. 무슨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 원망과 회의가 자연스럽겠지만.. 야곱은 그렇지 않습니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통하여 야곱이 깨달은 인생의 최고의 행복, 인생의 최고의 가치, 제일의 축복은 소유의 명예의 많고 적음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항상 이기는, 더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언제나 마음이 평안하고 즐거운 상태를 지키는 것만도 아님을 그는 알았습니다.
소유와 명예의 많고 적음, 사람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그는 경험으로 알았습니다. 또 인생의 길이 누구나 희노애락을 경험한다는 것도 그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축복을 받았다고 항상 희희낙락한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의 약속을 받았어도 인생의 오향(五香), 단 맛, 짠 맛, 신 맛, 쓴 맛, 매운 맛 다 경험하는 것이 인생의 실재임을 그는 마침내 저는 다리로 알았습니다.
그러면 야곱이 깨달은 인생의 지고의 가치, 인생의 최선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그가 마침내 깨달은 인생의 지고의 복,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시는 최대의 축복, 인생의 지선의 가치는,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의 비전의 약속이 계승되고 하나님의 비전이 성취되는 한 통로가 되었다는 것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일생에 유형, 무형의 소유의 많고 적음이나/ 평탄하게 사느냐 고민하며 사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런 것은 다 지나가는 것, 사람이 아웅다웅해서 붙잡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도 하시기도 하시고 저렇게도 하시기도 하시는 것... 정작 중요하고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미천한 자신의 인생이 쓰임받는 것, 내 일생에는 아무런 성취가 없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체인 가운데 한 고리가 되는 것.." 이것이 영원의 관점에서 최고의 가치임을 깨닫고/ 그는 죽을 때에 평안한 마음으로 맞이하고 후손들에게 축복합니다.

그래서 그는 평안한, 자약한 마음의 상태에서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합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하나님의 비전을 이제 자약한 마음으로 그의 후손들, 손자들에게 기쁘게 물려 줍니다.
(흥미로운 것은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할 때, 인간 야곱의 모습이 또 나타납니다. 므낫세가 형이고 에브라임이 동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드립니다. 경배드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경배 드린다, 어원적 의미로는 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경배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여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야곱,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는 경배입니다. 재산도 명예도 하나도 없고 평안한 것이 아니라 험악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러나 야곱은 자신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심에 감사함으로 경배드립니다.
지금 가진 것 하나도 없고 마음 평안하게 순탄하게 살아오지 못하고 제일 험악한 세월을 보냈을지라도, 또 자기 시대에 하나님의 비전의 완성을 전혀 보지 못하였을지라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 부르듯이 자신의 일생도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이 계승되고 증거되는 통로, 한 연결고리가 되었음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경배드립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지는 경험을 통하여 이것이 진정한 축복임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렇게 삶의 진실을 깨달아 알았을 때, 그는 불구의 몸이 되어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만 설 수 있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후손에게 축복하며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내 다리 이렇게 불편하게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해야만 되는 것에 대하여 야곱이 추호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이 장면이 야곱이 자발적인 경배를 드린 최초이자 최후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전에는 뭔가에 자신의 마음이 쫓겨야만 하나님을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온전히 순종하며 마음으로부터의 경배를 드립니다.
이처럼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더라"는 야곱의 삶과 야곱의 믿음을 함축하여 잘 표현해 준 어구입니다.
예) 일본의 하천풍언 목사의 간증.
하나님의 축복은, 인생에게 베푸시는 최고의 영광의 축복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켜 가시는데 나의 일생이 작은 고리로라도 쓰임받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최선의 삶, 최선의 가치, 최선의 축복입니다.

당신은 무엇이 인생의 최대의 축복이라고 여기십니까? 소유의 많아짐, 세상에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것, 제일 뛰어난 명예 이런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겨지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면 당신은 아직 돌베개 잠을 더 자봐야 합니다. 시리도록 차가운 세상의 현실 앞에서 밤새 잠 못이루고 뒤척이는 날들을 더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부자이지 않아도 좋다, 떵떵거리며 살지 않아도 좋은데 마음의 즐거움과 평안, 제발 내 심장 떨리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 심령의 즐거움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겨지십니까?
유감스럽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예수님 믿는다고 심령의 평안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역시 아직도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관점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야곱처럼 도리어 마음 무너지는 경험을 몇 번 더 할 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살아가는 날 동안 형통한 일과 곤고한 일은 함께 경험되어집니다. 하나님의 복은 당신의 심령의 위안부, 위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그렇게 참을 수 없는 가볍고 천박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축복은 당신의 일생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비전이 성취되는 통로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믿음의 계승자들..이들에게 계승된 하나님의 약속의 놀라운 영광과 축복은 이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의 약속을 따라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위하여 이들은 중요한 한 연결 고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주는 말씀이 <히11장>의 결론부분, <39절>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들은 그들 당대에 약속의 실현을 못 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증거를 받은, 이들의 믿음의 삶을 따라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 보내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비전이 실현될 것이라는 증거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세상에서 잘 살게해주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혹시 그런 기대와 소망으로 예수님 찾아왔다면 빨리 꿈 깨십시오. 복음은 그런 천박한 미신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축복이 어느 지경에도 당신의 마음이 평안하게 지켜주겠다는, 고통과 슬픔이 없게 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당신 마음의 위안부에 불과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때때로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사 이런 은혜의 부스러기들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영광스러움은 예수 그리스도와 열 두 제자로부터 시작하여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기까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의 증거자로서, 증인으로서 우리의 일생의 쓰임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하나 낳았고 이삭은 둘 낳았고 야곱은 열 둘 낳았지만, 그렇다고 야곱이 더 12배의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누가 아들을 많이 나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하나님의 비전과 약속의 계승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진정한, 영광스러운 복이듯이 당신의 오늘 살면서 영적으로 얼마나 영향력이 큰 사람이 되느냐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당신의 인생도, 하나님의 나라의 한 연결고리가 되어 하나님께 쓰임받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 말씀하시듯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약속을 붙들고 이 하나님의 비전에 순종하여 응답을 드린 믿음,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때까지 나의 인생이,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평탄한 나날을 보내든 험악한 날들을 보내든, 하나님의 나라의 한 연결고리로써 쓰임받는 그것이 영원한 축복이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축복입니다.
믿음은 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응답이며 계승입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축복하였으며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은 이 믿음을 드리기 위하여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설 수 밖에 없는, 험악하게 깨어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비참하게 깨어짐을 당하였을지라도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의 영원함과 영광스러움을 보았을 때, 야곱은 자신의 불구를 전혀 원망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자약한 마음으로 후손들에게 아낌없이 믿음을 계승을 당부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내려 주며 그리고 경배드립니다.
한 때는 자신의 욕망의 성취를 위하여 떼써서 매달려 보기도 하였습니다. 순복음교회 신앙처럼, 이 정열의 매달림도 믿음의 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때는 조용히 묵상하며 주어지는 현실의 모든 것을 용납하여 마음의 호수를 잔잔케 지켜 보려고도 하였습니다. 장로교회 신앙처럼, 고난도 수치도 품는 아름다운 수용도 믿음의 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서 제대로 인식하고 영원한 가치와 소망으로서 바라보고 인정하여 경배드림,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당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은 당신의 일생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한 연결고리로서 영광스럽게 쓰임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이 역사에는 반드시 종말의 때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선포하시며 완성의 때가 있습니다.
그 날, 당신도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의 날에 당신의 일생도 예수님의 생명의 통로가 되어서 영광의 잔치에 참여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그 소망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이 인생의 최고의 가치, 최고의 행복입니다.

당신은 이 하나님의 축복에 경배드릴 수 있습니까?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평탄하게 사느냐 험난하게 사느냐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과연 나의 인생의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에 쓰임받느냐, 하나님의 비전의 성취에 내 인생이 작을지라도 한 연결고리로서 드려져 있느냐 이것이 영원의 가치임을 알고 최고의 영광임을 아시고 "하나님, 그렇습니다. 제 인생의 당신의 비전에 쓰임받게 하소서" 경배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도 믿음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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