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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삶] (엡 5: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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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엡5:15-21)
                                                 

[1]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원리를 말하고 그것을 생활에 적용해 나가는 데 있어서 역시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늘 강조한 것처럼 기독교는 하나의 생명이 살아가는 것이지 무슨 철학적인 관념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주신 말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원리적인 면에서 접근해 가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문제를 기독교 진리의 총체에 비추어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성령 안에서 사는 생활입니다. 로마서에도 그 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 말했습니다.
예수님도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6:6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지혜있게 세월을 아끼라

  오늘 주신 말씀 15절을 보세요.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고 했습니다. 바울은 제일 먼저 우리에게 지혜롭게 행하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시 면서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 말씀에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 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은 이 지혜에 대해서 언제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사물의 변별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교훈을 부딪쳐 오는 삶의 환경 가운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시키는가 하는 문제와 연관된 능력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보아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매사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 중에 지혜를 구해서 가장 귀하게 축복을 받았던 사람이 누굽니까?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어려서 이스라엘 나라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서 너는 무엇을 구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솔로몬은 제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 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라며 지혜를 구 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너는 재물도 장수도 원치 아니하고 지혜를 구하니 내 마음에 합하도다. 이제 나는 너에게 지혜를 줄 뿐더러 네가 구하지 아니한 재물도 장수도 주리라 했습니다.

  솔로몬이 쓴 잠언의 가장 중요한 주제도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롭게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계획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월을 아끼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세월을 아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잃어버린 시간들을 바라보게 될 때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시간은 돈과 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입니다. 돈은 은행에 맡기면 이자라도 나옵니다. 많이 맡기면 이자만 가지고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은행에 맡길 수 없습니다. 계속 지나갑니다. 반복되지 않습니다. 한 번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사 남은 날을 계수할 수 있게 하소서. 우리가 인생에서 소유하고 있는 시간이란 것이 생각해 보면 얼마나 짧습니까? 이 짧은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발자취를 남겨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왜 세월을 아껴야 합니까? 때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악한 세상에 살면서, 악한 세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정말 의미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쓸데없는 것에 생명거는 악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시대적 정황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시간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세월을 아낍니다.

2. 주의 뜻을 무엇인가 이해하라 (큐티 생활의 절대 중요성)

  그리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7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세월을 아끼라 는 말 다음에 나왔습니다. 시간을 아껴 쓸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달려간 수고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한 결과인 헛수고 인생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 그 하나님의 뜻대로 시간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부딪쳐오는 바쁜 일들이 반드시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의 차이를 헤아려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저마다 바빠합니다. 그러나 바쁜 일이 반드시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은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바쁘게 살았나 하는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쁘게 살면서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허락한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는 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우리가 해야 할 많은 일들의 우선 순위를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 경건의 시간을 가지고 하루의 삶을 계획할 때 오늘 내가 해야 할 일,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붙잡고 묵상해 보십시오. 그 날ㅇ의 성령의 생각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것을 먼저 하세요. 바쁘긴 하지만 바쁘게 뛰어다닌 그 일이 무가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일은 뒤로 미루거나 잘라버리십시오. 나에게 영적 유덕함이 없는 것은 묵상하며 가차없이 쓸모없는 가지를 잘라 버려야 합니다. 영적 가지치기를 해야 귀한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기 위해서, 그래서 인생을 좀 더 질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르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 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은 필수입니다. 우리 삶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서 무가치하게 낭비하고 있는 것들을 여지없이 잘라 버리고 하나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우선 순위를 중심으로 시간을 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무엇이 제일 중요합니까? 누구와의 관계가 제일 중요합니까?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 내가 주님을 더 깊이 알고,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주님을 더 깊이 신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 읽고, 기도하고,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루의 생활에서 무엇이 제일 먼저 와야 할까요?
경건의 묵상시간입니다.

  마틴 루터가 고백한 말을 기억하시지요? 아, 나는 너무 바쁘다. 그러니까 나는 더욱더 기도해야 되겠다. 루터는 바쁠수록, 그래서 시간을 더욱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3. 성령충만을 받으라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해해서 그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문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그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이 뒤따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알고 이해한 하나님의 뜻을 내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에서 오나하는 해답이 나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절을 보십시오.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했습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여기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명령형입니 다. 성령 충만은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받아야 되는,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명령은 계속적인 명령입니다. 성령 충만은 한 번 충만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순간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또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성령충만 받는 길은 무시기도를 통하여 항상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시고 의지하는 간절한 자세 밖에 없습니다.
  성령 충만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향한 명령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명령입니다. 오직 너희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너희 라는 말은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입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 충만이 필요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더구나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문법적으로 말해서 수동태입니다. 성령 충만하라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는 것이 이 명령입니다. 이것은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원하는 것보다 성령이 나를 충만하게 하시기를 더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나를 지배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은 나를 다스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보혜사 성령), 환영하고 모시고 의지하기만 하면 성령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러 오셨다고 성령의 감동으로 선언했습니다(마3:11).
예수님도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눅11:13). 또 에수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라고 성령의 불을 붙이러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다스리시고자 하시는, 그리고 나를 충만케 하고자 하시는 이 성령의 역사를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이것은 성령 충만을 위한 권면이요 명령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이 명령과 연관해서 이런 말씀 을 아울러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소극적으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 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 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에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 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다스리시고 지배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의 삶 가운데 죄가 들어오면 근심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화는 소멸되고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직감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죄가 우리 삶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죄를 범하게 되면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 하지 마시고 즉각 자백하고 그 죄를 버려야 합니다. 영적 쓰레기인 죄를 빨리 뽑아내어야 성령의 감동 감화력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내 삶 속에서 성령의 충만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기만 하면 성령은 쉽게 나를 충만케 하십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은 수동태가 된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 중에 에베소서와 가장 비슷한 편지가 골로새서입니다. 그래서 이 둘을 가리켜 쌍둥이 서신 이라 고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9∼21절의 말씀을 보세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 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했습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3장 16∼17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에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이 있는데 골로새서에는 없습니다. 대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내 속에 거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시편 119 편 11절에 보면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말씀을 어떻게 우리 마음에 둘 수 있어요?
  말씀을 암송하고, 암송한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을 생활 속에 적용시키고, 또한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쓰는 것들이 다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과 성령은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역동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영이시오 말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분론적으로 주장하고 이해하면 안됩니다.

  오직 말씀이 최고라고 주장할 때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분법적 주장으로 하나님을 왜곡시킬 수 없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신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가장 기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아는 것만으로는 실천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서 성령의 불을 받아야 강력한 두나미스 폭발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핵심인 순복음 교회의 5중 복음과 3중 축복의 복음에 대한 말씀을 당연히 알아야하고 그 복음의 말씀에 성령의 불을 붙이는 5중 복음 두나미스 폭발력을 가지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역사는 막연한,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 말씀을 보세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말씀이 거하고, 이 말씀대로 살기를 참으로 원하고, 말씀을 생활 속에 적용시키기를 원하면 말씀을 붙잡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내 안에 있는 그 말씀을 사용해서 나를 지배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4.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이 충만하면 우리의 삶 속에 어떤 변화가 따릅니까?
성경은 이제 성령 충만한 삶이 이루어져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장으로 가정에서의 부부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종과 상전의 관계로 이어집니다. 요샛말로 표현하면 우리의 직장 생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맨 먼저 가정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영적인 삶입니다.
 
  영적인 삶이란 것은 그저 경건하게 앉아서 기도하고 성경만 읽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삶은 구체적으로 올바른 가정 생활, 올바른 직장 생활, 올바른 사업 경영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우 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사모해야 합니까?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에 충만하여 매사에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하면 당신은 반드시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3] 결 론

  오늘날은 리모델링 시대입니다. 기존의 것을 헐지 않고 새로 단장하는 것을 리모델링이라고 합니다. 요즘에는 사람들도 리모델링을 합니다. 피부 관리, 머리 염색 등으로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여성들은 아예 얼굴을 뜯어고치는 리모델링까지도 합니다.

  이제는 신앙도 리모델링해야 합니다. 신앙도 오래 그냥 놔두면 구태의연해집니다. 새롭게 리모델링해야 합니다. 말씀을 회복하고, 예배를 회복하고,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감동없는 예배는 형식입니다. 죽은 예배입니다. 감동없는 찬송은 소리에 불과합니다. 성령의 감동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똑 같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찬송할 때 애국가 부르듯 부동자세를 취합니다. 그래야 경건한 것처럼 오해합니다. 신앙이 굳어서 그렇습니다.
  교회당은 천막으로 지어도 괜찮습니다. 다만 그 안에 감동이 있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 회복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일어났던 것입니다.  '내가 10편의 아름다운 시를 쓰느니 내 일생을 아름다운 시로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답게 생명있는 크리스챤으로서 아름답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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