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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손길 / 시 1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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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손길
본문: 시139: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가이드포스트에 실린 글입니다. 내가 여섯 살 때 우리는 오클라호마 시에 살았는데 동네에서는 언제나 밤이면 문을 잠그고 빗장을 질렀습니다. 뒷문으로 나가기 위해서 아버지는 안에서 질러진 빚장을 열기 위한 특별한 열쇠를 가지고 다녔다. 어느 날밤 나는 천둥과 번개 소리와 쏟아지는 빗소리에 놀라 갑자기 잠이 깨었다. 복도를 지나 부모님이 계시는 방으로 달려가는데 거실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와 불길 때문에 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 집이 벼락을 맞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밖으로 나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 불길 때문에 앞문으로 갈 수 없었고 뒷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습니다. 공포가 엄습해오려 할 때에 난 어둠 속에서 따스한 아빠의 손이 복도 아래로 날 이끌어 뒷문을 통해 뒷마당으로 인도해주어 저으기 안심이 되었습니다. 쏟아지는 빗속에 서 있는데 그분은 손을 놓고 사라져 갔습니다. 겁이 난 나는 집을 향해 되돌아섰습니다. 그때 엄마가 "메이시! 메이시!"하고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엄마! 여기 밖에 나와 있어요" 나는 대답했습니다. 엄마는 내게 달려왔고 우린 함께 집 앞으로 갔는데 거기에는 아빠가 아기 동생 켄트와 세 살짜리 여동생 에이미를 데리고 서 있었습니다. "메이시, 무사했구나"하고 인도의 한숨을 쉬며 아빠는 말씀하셨습니다.
"널 데리러 가려 했는데 불길 때문에 건너갈 수가 없었어."
아빠는 나를 복도로 이끌어 주지 않았고 뒷문에 질러진 빗장을 열어주지도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가 벌써 12년 전의 일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지내오는 동안 그때 나를 인도해주었던 그 손의 따스한 감촉을 잊지 못합니다. 그 손은 오늘도 어둠 속에서 나를 이끌어주십니다.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신31:8)
중국 화동지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그들의 불법집회를 허용할 수 있었소? 지금 곧 당의 지시에 따라 일을 처리하여 위법적인 불법집회를 못하도록 집회를 폐쇄해버리시오"
그 지역의 정부관리는 하급관리에게 사방으로 나가서 가정교회를 조사하여 집회를 금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집회의 책임자가 여러 차례의 권유와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신도들과 함께 예전과 다름없이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러자 간부들은 업무회의에서 이 집회점을 어떻게 처리할까 의논하던 중에 어떤 고위간부가 "여러 번 권유했는데도 고치지 않는다면 그곳을 엄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그 집회점을 해체하면 이후에는 골치 아프지 않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토론을 거쳐 그 안건을 통과시키고, 해체시기에 따라 징계를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회점의 해체 며칠 전에 그 안건을 낸 고위간부가 갑자기 죽었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마다 신에게 노여움을 산 것이라는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징계를 실시하기 위해 또 다른 한 간부가 집회점의 지붕에 올라가서 손수 십자가를 떼어내려고 했을 때 이 간부의 목이 갑자기 굽어져서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그의 목이 굽어진데 크게 놀라서 황급히 그를 데리고 진찰을 받아보았으나 병명을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여러 의사들도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그의 목이 돌아간 것은 목의 신경계통에 이상이 생긴 것일 겁니다."라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이상할 것이 없지, 하나님을 모독하고도 어찌 재앙을 받지 않겠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 년 후 그는 여러 차례 병원에 가도 낫질 않자 희망을 잃고 마침내 이 크고 두렵고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나중에 그가 다시 십자가를 집회점의 지붕에 설치했을 때 그의 굽었던 목이 정상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18:10)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동자같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일제가 한국의 젊은 여성 수천 명을 강제로 군위안부로 삼은 끔찍하고 서글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안타까운 사실을 알리기 위해 한 화가가 포스터 제작을 맡아 어떻게 표현할까 고심했습니다. 그 결과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생존한 한 할머니의 손을 그리기로 했습니다. 그 할머니의 손, 험한 주름살과 혈관이 뒤엉킨 그 손만큼 인권 유린과 한의 역사를 웅변적으로 대변할 더 이상의 표현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손을 가리켜 ‘인체의 마술사’ 또는 ‘역사의 주름잡이’라고 말했습니다. 착한 일도 손이 하고 못된 짓도 손이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손으로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고 원죄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내려오는 원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손으로 행하는 결과에 따라 삶의 질과 무게가 결정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손은 어떠한 손일까요?

1. 창조하시는 손입니다.
이사야 48장 12-13절에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일제히 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손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어느 예수 믿는 대학 교수가 제자에게 전도를 하면, 그 제자는 꼬치꼬치 따지면서 천지만물이 우연히 거저 생겼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어느 날 그 교수가 자기 집 지하실에 해와 달과 별들의 형상을 만들고 지구가 공전하고 자전하는 모형을 만들어 놓고 그 불신 학생을 불러다가 그 우주의 모형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여 주며, “야! 참 이상하지. 내가 하룻밤 자고 나서 내려와 봤더니 이런 소우주가 생겨났어. 참 신기하지?” 그랬더니, 그 학생이 “교수님, 저를 놀리십니까? 이게 어떻게 그냥 저절로 생겨납니까? 교수님이 다 만들어놓고 괜히 저를 놀리시려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라고 하더랍니다. 그 때 교수님이 “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이 작은 우주의 모형도 저절로 생겨났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 이 보다 더 위대하고 더 섬세한 해와 달과 별들 우주 만물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하느냐?”고 했더니, 항복하고 말더랍니다. 이사야 45장 12절에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수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 징계하시는 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이 잘못할 때 회초리를 들어 때리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의 자녀들이 잘못할 때 물질로나, 질병으로나, 전쟁을 통해 때리시고 징계하시는 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난 9.11 미국의 테러 사건 때, 처음에는 왜 이런 불행이 왔나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악마같은 빈 라덴을 통해서 미국을 징계하시고 때리신 하나님의 손길이었다는 것을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최강의 군사력만 믿고 또 물질 만능만 믿던 미국사람들이 눈물 흘리며 교회로 교회로 모여들어 겸손히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며, 중고등 학생들의 총기난사로 수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며 각 학교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옛날처럼 학교마다 채플에서 예배를 드려야하며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고 외치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미국을 사랑하셔서 그 손으로 빈 라덴이라는 몽둥이로 후려치신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거듭난 기독교인들은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꼭 보아야 합니다. 우리 60억이 넘는 모든 사람의 머리터럭 하나까지 셀 수 있는 하나님이시므로 적은 것 하나라도 우연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3. 보호하시는 손
하나님의 손은 징계하고 채찍질하는 때만 쓰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녀들을 보호하시는데도 사용하십니다. 시편 10편 12-14절에 보면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글을 읽어보면, 북한에서 목회 하시다가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몹시 낙심이 되어서 손 하나 까딱하기가 싫어서 “이제는 목사 사표를 내고 목회를 그만둬야겠다”하고 엎드려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자기가 험악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이더랍니다. 너무너무 피곤하여 오른쪽으로 쓰러지려고 하는데 갑자기 큰손이 나타나서 일으켜 세우더랍니다. 또 험악한 길을 걷고 있는데, 이번에는 왼쪽으로 쓰러지려고 하니까 다시 큰손이 나타나더니 일으켜 주더랍니다. 또 죽을힘을 다해 걸어가다가 이번에는 앞으로 쓰러지려고 하니까 두 손이 나타나더니 일으켜 주더랍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험악한 길을 걸어가다가 눈을 번쩍 떠서 보니까 잠잔 것도 아니고 생시도 아닌데 역력한 환상을 보았는데 그 때에 “내 힘으로 목회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구나”라고 깨달으시고 그 험악한 목회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몇 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한 목사님만 능력의 손으로 붙드실까요?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를 능력의 손으로 그때그때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핏덩이같은 어린 아기가 엄마의 손이 아니면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돌보시고, 보호하시는 손길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5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며 아우성쳤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 사정을 아뢸 때 하나님께서는 “염려하지 마라 내가 너희 코에서 냄새가 나도록 고기를 먹여주겠다”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한 달 동안 싫증이 나도록 먹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 모세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장정만 60만이 넘는데 하늘에 창을 내신들 가능하겠으며 소 떼와 양떼를 몰아 오신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고 반문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고 말씀하신 후 “내 말이 네게 응하는 것을 보게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오는데 어마어마한 메추라기 떼를 몰고 와서는 이스라엘 진중에 떨어져 내려앉았습니다. 메추라기들은 몇 일씩 날아가다가 힘들면 내려앉아 몇 일씩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잠을 잔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진중에 겹겹이 내려앉아서 실컷 고기를 먹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으로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에스라 7장에 보면 학사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출발하여 5월 초하루에 도착했는데 7장 9절에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5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능력의 손으로 보호하시는 것을 믿고 기도하며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0장 27-29절에 보면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능력의 손으로 붙잡고 계시므로 악한 마귀가 절대로 빼앗아 갈 수가 없고 해칠 수가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손, 하나님의 손은 마귀보다 강하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 힘이 있으므로 그에게 의지하면 염려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심령도 여러분의 생활도 가정도 다 우리 아버지의 손에 맡기십시오.험악한 인생길에 연약한 자신을 믿지 말고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그 능력의 손에 의탁하시기 바랍니다.
4. 주님의 손은 긍휼을 베푸시는 손입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께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막 1:40∼42)
병자를 만지는 것은 위생상의 문제일 뿐 아니라 당시 율법이 금하는 범법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생상의 문제나 율법의 문제보다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우선이셨습니다. ‘민망히 여김’이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손이었습니다.

5. 주님의 손은 허물을 가려주는 손입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4∼5) 이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9)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0∼1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가려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손은 남의 허물과 죄악을 가려주는 용서의 손입니다. 이웃의 허물과 실수와 약점을 덮어줘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평화와 기쁨, 행복이 넘칩니다.
6. 주님의 손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샌들을 신고 다닙니다. 조금만 걸어도 발은 온통 먼지투성이가 됩니다. 그래서 나갔다 돌아오면 반드시 발을 씻고 들어갑니다. 당시 이스라엘 풍습은 자기 발을 자기 자신이 씻지 않았습니다.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겨 주고 종이 없으면 서로 씻겨줍니다. 이렇게 서로 상대의 발을 씻겨주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발을 먼저 씻겨주었습니다. 종이 행하는 일을 바로 스승이신 예수님이 먼저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3∼15) 이것은 겸손함과 이웃을 섬기는 봉사의 삶을 실천하신 귀한 교훈입니다. 겸손한 자세로 이웃을 섬기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인격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 전 먼저 섬기신 손이었습니다. 섬김은 성경이 말하는 높아짐의 지혜이며 비결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4)
오래 전 교육전도사로 초등부 어린이들을 섬길 때였습니다. 500여명의 초등부 어린이들이 있었는데 항상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여름에는 밖에서 뛰어 놀다 들어온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면 손이 끈적거릴 정도였지만 아이들의 머리를 만져주는 것이 좋았습니다. 아이들도 이를 알아서 아예 저를 만나면 머리를 쑥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고아원에서 온 아이들 가운데는 머리를 만져주려면 빠져나가고 도망가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사랑 받기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받기를 어색해 하는 아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져주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지지 않아도 될 것도 만지십니다. 만지지 말아야 할 것도 만지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만지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이 없습니다. 만짐은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었습니다. “많은 사랑은 혀끝에 있고 참사랑은 손끝에 있다”고 합니다.

7. 주님의 손은 치유의 손입니다.
중국 외교부 관리를 역임한 90대 노인이 뼈의 질환으로 심한 고통을 겪다 못해 중국 지도부 앞으로 탄원서를 보냈습니다. "너무 아파서 앉지도 눕지도 못합니다. 잇몸질환으로 이가 모두 빠졌습니다. 청력도 없었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합니다. 그러니 제발 빨리 죽을 수 있도록 안락사를 시켜 주십시오." 그러나 중국에서는 안락사가 불법이기 때문에 지도부는 그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낙심한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살하기 위해 침대에서 여러 번 떨어졌습니다. 결국 그는 안락사를 요구한지 14개월만에 심한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영혼들이 상한 육체를 부둥켜 않은 채 울부짖고 있습니다. 아무리 발달한 것 같은 의학도 무용지물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었던 그 곳에 예수님의 손길이 임했습니다. 그 손길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오늘도 상한 영혼과 육체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은 친히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능력 있는 주의 손길을 꼭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지라(마8:3)
우리 모두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점점 어두워만 가는 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본분입니다.
밀림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처는 철학, 신학, 음악, 의학의 네 개 부문에서 박사입니다. 참 훌륭한 분입니다. 그 분이 아프리카 원시림에 가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는데, 여기를 방문했던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같이 훌륭한 사람이 이렇게 고생스럽게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지 않은가? 얼마든지 명예스럽게 화려하게 살 수 있는데 하필이면 왜 그런 데 가서 그 고생을 하고 사느냐 - 이상할 수밖에. 그는 대답합니다. "나를 그렇게 안쓰럽게 보지 마십시오. 주님의 손이 되어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손이 되어 일한다는 것, 그 얼마나 귀합니까?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9-10)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교 총장까지 지냈던 유명한 석학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원래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사회적 명성이 높아지면서 점점 하나님을 멀리 했습니다. 그리고 부와 명예와 지식으로 교만하다 폐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폐병이 점점 심해져 요양소로 격리되었습니다. 그는 요양소에서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여러 번 자살의 충동을 느꼈습니다.
어느 따뜻한 봄날, 그가 침대에 누워 창 밖을 보고 있었는데 한 마리의 나비가 창문 틈새로 우연히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곧 나비는 밖으로 나가려고 창문 틈으로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스러워서 그는 나비를 잡아 밖으로 날려보내려고 하는데 나비는 자기를 죽이려는 줄 알고 자꾸만 그의 손을 피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는 나직한 울음과 함께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는 저 나비와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평안과 안식의 장소로 인도하시기 위해 선한 손길을 펴시는데 난 얼마나 그 손길을 피해 다녔던가요?" 인생들이 하나님의 손에 잡히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의 손에 잡힌다면 그것은 가장 슬픈 일이지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잡히는 것은 가장 기쁜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을 참으로 사랑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줄기차게 인생들에게 뿜어내고 계십니다.(시55:22, 사43:1-2)
"내가 주의 법도를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시119:173)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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