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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역류하는 그리스도의 청소년들 / 단 1:3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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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역류하는 그리스도의 청소년들 / 단 1:3 - 8

[10]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십 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 이지 아니 하느냐
[16] 그러면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사방에서 힘들어하는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실타래가 얽히듯이, 밧줄들이 얽히듯이 2003년 가을의 한국 사회는 사방으로 복잡하게 얽혀가고 있습니다. 대통령 재 임기 문제, 북한 핵 폭탄 개발 위협, 재독 북한 위장간첩 입국, 대기업의 천문학적 정치 뇌물제공, 경제 침체로 말미암는 심각한 청년 실업현상, 신념과 철학 부재투성이 위정자들을 먹여 살리기에 탈진해버린 국민. 지금 우리 사회는 좀체 풀리지 않는 매듭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처럼 이런 와중에 힘없는 서민들만 죽어납니다. 생활고로 투신자살하는 가장들과 주부들이 있습니다. 수능시험 압박감 때문에 목숨을 포기하는 학생이 있는가하면 카드 빚을 해결할 수 없어 살인강도를 저지르는 범죄가 멈추지를 않습니다.

복잡한 인간관계와 사회구조 속에서 성격, 양심, 능력 등의 이유로 적응하지 못하여 너무 너무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절규가 심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탈출을 시도합니다. 도피를 꿈꿉니다. 때로는 극단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수많은 속박들로부터 벗어나고자 울부짖고 있습니다. 고달픈 매임 들로부터 풀려나기를 눈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속박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의 여인을 두고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1. 자신의 육체적인 한계입니다.

육체적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앞에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질식하고 있습니다. 너무 너무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산다라기 보다 어쩔 수 없이 연명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 앞에 놓여 있는 한 여인을 보세요. 참으로 민망스럽기 그지없는 가련한 여인입니다. 18년 동안 온 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합니다. NIV를 보니 “She was bent over and could not straighten up at all for eighteen years"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꿋꿋이 서 있을 수 있고, 꼿꼿이 등과 허리를 편 채로 걸어 갈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18년 동안 온 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펼 수 없습니다.

2. 자신의 지쳐버린 내면 세계입니다.

사람의 정신력은 육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던 사람도 장기간 투병생활을 하게 되면 정신력 또한 약해지게 되는 법입니다. 18년 동안 신체적 질병을 심하게 앓고 있는 이 여인의 내면 세계는 비참하게 일그러져 있습니다. 찢기고 망가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내면 세계 속에 갇혀 버린 이 여인을 누가 어떻게 풀어 줄 수 있을 것입니까?

3. 이 여인을 속박하고 있는 세 번째 사슬은 사탄 즉 귀신(더러운 영)입니다.

참으로 가련한 여인입니다. 귀신까지 들려 있습니다. 귀신 또는 사탄은 인간을 철저히 파괴하는 자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여지없이 망가뜨려 버리고 비웃습니다. 육체적으로 온 몸이 꼬부라지고 조금도 펴지 못한 채 18년을 지낸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속박이요, 형벌입니다. 여기다가 더럽고 파괴적인 귀신이 그녀를 18년간이나 정복하고 있으니 이보다 가련한 사연이 또 있겠습니까? 오늘의 인간 고통도 동일합니다.

4. 여인을 속박하고 있는 네 번째 사슬은 차디찬 세상의 이목이었습니다.

사람은 냉정합니다. 잠깐 병들었거나 투병할 때는 관심과 동정과 애정을 보여 주지만 투병 생활이 조금 길어지면 무관심하거나 냉정하게 되고 노골적으로 귀찮아합니다. 그래서 장기 환자들에게는 병 자체보다 사람들의 차디찬 시선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 더 큰 고통이라고 합니다. 이 여인의 가족들, 친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종교지도자들 마저 집에서 키우는 소나 나귀에게는 관심과 호의를 보이면서 이 여인에 대해서는 차디찬 눈길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에게로 눈을 돌려봅시다. 예수님의 움직임을 살펴봅시다.

1. 예수님은 이 여인을 주목하셨습니다.(사람 대접을 하셨습니다.) 10-12절

예수님의 시각/ 관점/ 관찰력을 보십시오. 안식일 날 유태인 회당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잘 난 사람, 유력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주목하게 됩니까? 화려한 사람, 유명한 사람을 주목합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신다”고 성경구절을 외우고, 기도하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외모지상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자신을 향해서는 ‘하나님 제 외모를 보지 마시고 중심을 보아주세요’ 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외모로 판단합니다. 결혼 이야기를 할 때도 ‘마음씨 좋으면 된다. 심성 착하면 된다. 신앙 좋으면 된다’ 해 놓고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외모가 조건 1순위로 올라서 버립니다. ‘머리(두뇌) 나쁜 것은 용서하지만 얼굴 못 생긴 것은 용서 못한다(?)’ 과거에는 이 말이 정말 농담으로 끝났는데 요즘 신세대 세계에는 진담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들 세대는 그래도 외모보다는 마음 중심, 선량함을 보고 결혼하였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 여인을 부담스러운 존재, 무의미한 존재, 포기해도 괜찮은 존재로 보지 않았습니다. 12절, “여자여!”하고 불러 주십니다. 정상적인 한 여성으로 대접하고 계십니다.(할렐루야) 더 나아가서 16절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소개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18년 동안 귀신 들려 있고, 병들어 있고, 온 몸이 꼬부라지고 펼 수 없게 되어 있지만 이 여인을 사람 대접하고 계십니다. 전혀 차별하지 않습니다. 소중한 한 여성으로 보시며, 소중한 아브라함의 딸(후손)로 보고 계십니다.

저는 믿고 싶습니다. 이 여인은 설령 치유되지 않았더라도 남은 세월은 놀라운 자유를 맛보면서 살아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정상적인 한 인간으로 보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때로 나보다 힘없는 사람을 무시하는 과오를 많이 범하였습니다. 이 죄를 회개합시다. 약한 사람, 약한 사람, 병든 사람,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예수님의 시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대해 줍시다. 따뜻한 말 한마디, 격려의 전화 한 통화, 사랑이 담긴 편지 한 장을 보내 보십시오. 나 겸일목사가 중병 걸려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 실에 누워 있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가망이 없어 의사들이 교회 장로들에게 장례준비를 하라고 귀뜸 하였습니다. 와중에 대장 의사가 수하의 의사에게 여전히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나 목사를 가리켜 의식이 갔다고 보고 ‘저 것 (영안실 대기실)을 옮길 준비를 시작하라고 지시하는데 혼수상태 속을 헤매던 중의 나 목사가 그만 들어 버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섭섭하고 얼마나 분하던지 기력이 다 빠져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나 목사는 속으로 ’뭐, 날 보고 저 것이라고!‘ 저 사람, 저 분. 아니면 목사님이라고 하면 안되나 뭐 저것이라고? 나중에 살아나면 한 번 보자. 가만두지 않을 거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데 너무 섭섭하여 오래 오래 울었다고 합니다.

2.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안수하셨습니다. 안수하심으로 여인의 병은 고쳐지고, 매인데서 풀려납니다.(할렐루야)

18년 동안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하고, 소외당하고, 격리 당하였던 이 여인입니다. 얼마나 사람의 따뜻한 손길, 따스한 말 한마디를 그리워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여인의 병든 몸에 손을 얹었습니다. 철없는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이나 노리개 대신으로 18년 동안이나 천대 받아온 그녀에게 예수님은 긍휼과 사랑이 가득한 눈길로 안수해 주셨습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할 소중한 사람, 우리 중의 한 사람으로 품어 안으시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제도를 악용하는 인간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14-17절)

제도를 잘못 해석함으로 악용하는 사례들이 인류 역사상 너무나 많습니다. 회당, 회당장, 안식일...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제도들 아닙니까? 이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잘 보살피고 도와주라고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제도들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즐겁고 좋고 복을 받아야 할 안식일에 회당장(종교 지도자들)이 회당에서 이 여인을 두 번, 세 번 죽이고 있습니다. 안식일 성수를 자기들 자존심 측면에서 억지 해석합니다.(14절) 사람을 자기들 집에 있는 가축보다 무시하고 내 팽개치고 있습니다.(15절) 예수님은 이들을 외식주의자라며 준엄하게 책망하십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가치를 해석합니다.(16절) 교회, 목사, 장로, 집사..... 주일 모두 묶여 있는 사람, 매여 있는 영혼들을 풀어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대통령, 정부, 국회, 관공서.... 모두 국민을 편안하고, 평안하게 잘 살도록 해주라고 세워놓은 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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