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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맡은 소임에 충실한 삶 / 롬 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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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은 소임에 충실한 삶
롬12:6-8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에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미국의 대 사업가로서 자선사업을 많이 했던 앤드류 카네기의 일화입니다. 흔히들 그를 가리켜서 강철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철강의 제조에 관련해서는 별반 아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는 많은 기술자들을 고용해서 그들을 통해서 철강회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 회사에서 철강 제련 기술이 가장 뛰어난 기술자 한 사람을 자기 방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일렀습니다.
"여보게, 자네는 자타가 공인하는대로 우리회사에서 가장 훌륭한 기술자임에 틀림이 없네. 그래서 내가 자네를 지금 공석중인 우리회사의 사장으로 임명하려고 하네. 그러니 자네가 그 자리를 맡아서 충성을 다해 주게나."
그러자 그 기술자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정중하게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회장님, 회장님의 호의는 무척이나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그 자리에 적임자라고 생각되지를 않습니다. 저는 회사의 경영에 대해서 전연 아는 바가 없는 문외한이기 때문입니다. 회장님의 호의가 고맙지마는 저는 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카네기는 의외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타일렀습니다.
"여보게, 회사의 경영이라는 것은 차츰 배워 나가면 되지 않겠나? 그러니 자네가 그 자리를 좀 맡아주게나."
그러자 그 기술자는 다시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회장님!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다고 봅니다. 제가 제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압니다. 저의 재능은 기술이지 경영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가 가진 재능대로 회장님을 섬기며, 회사를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네기는 그의 말을 듣고서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기술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알겠네. 내가 자네 뜻대로 하겠네. 그 대신 자네가 나와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어야 할 것이 있네. 자네는 명실공히 철강계의 대통령임에 분명하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내가 자네에게 대통령과 맞먹는 급료를 지불하겠네. 그 한 가지만큼은 자네가 거절하지 말았으면 좋겠네."

그 후 카네기는 약속대로 그 기술자에게 대통령과 맞먹는 급료를 계속해서 지불하였습니다. 물론 그 기술자도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가 맡은 소임에 더욱 충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일에 고무되어서 회사의 전 직원은 자신이 맡은 소임에 충성했습니다. 그 결과 카네기 철강회사는 명실공히 세계에서 제일가는 철강회사로 발돋움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매사에 이와 같은 자세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그 분야의 제 일인자, 그 분야의 대통령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서 크신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길 때도 같은 자세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각자가 맡은 소임에 충성해야 합니다. 각자의 재능이 다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은사도 다르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재능과 은사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쉽게 설명하자면 이러한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선천적으로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타고난 재능입니다. 재능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의 좋은 목소리로 성가대에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은사입니다. 은사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영적인 선물을 가리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적합한 직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분만 주시지 않고, 그 직분을 효율적으로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은사도 함께 주십니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수의 일을 맡겼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맨손으로 일하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십니다. 목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연장도 함께 주십니다. 톱도 주시고, 대패도 함께 주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연장이 바로 은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간에, 우리는 그 은사를 소중히 여기면서 받은 은사대로 맡은바 소임에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교훈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잠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은사의 다양성입니다. 사람마다 그 은사가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둘째로, 은사의 소중성입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은사라도 우리가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셋째로, 은사의 섬김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 은사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다른 지체들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말씀을 통해서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든지 간에, 받은바 은사대로 맡은 소임에 충성을 다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써 은사를 주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게 될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 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은사의 다양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6절 상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각각 다릅니다. 예를 들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큰 선물 보따리 하나를 주셨습니다. 그 선물 보따리의 이름은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보따리를 풀어 보니까, 그 속에는 각종 작은 선물상자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상자에는 몸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 곧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 작은 선물 상자의 이름이 곧 은사라는 것입니다.
은사는 다양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구체적인 실례로서 오늘 본문에서 일곱 가지 은사를 열거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은사는 6절 하반부에 있는 예언입니다. 흔히 예언이라고 하면 미래를 앞당겨서 말하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적인 의미와 전연 관련이 없습니다. 미래의 일이든지, 현재의 일이든지, 과거의 일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 바로 예언입니다. 따라서 이 예언은 설교자들에게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둘째 은사는 7절에 있는 섬기는 일입니다. 봉사의 은사입니다. 영어의 deacon, 곧 집사라는 단어가 바로 여기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몸으로 교회를 섬기는 집사들에게 주어진 은사입니다.

셋째 은사는 7절 하반부에 있는 가르치는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었습니다. 책이 따로 없었습니다. 따라서 교사 역할이 그만큼 소중했습니다. 교사들에게 주어지는 은사가 바로 가르치는 일입니다.

넷째 은사는 8절에 있는 권위하는 일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지체들을 찾아가서 말씀과 기도로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오늘날의 권사들에게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다섯째 은사는 구제하는 일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습니다. 고후8장을 보면 마게도냐 교회들의 성도들이 그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근도 많았고 핍박도 많았습니다. 따라서 구제의 은사가 절실하게 요청되었을 것입니다.

여섯째 은사는 다스리는 일입니다. 다스릴 治, 그러니까 치리의 직무를 맡은 장로들에게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마지막 일곱째 은사는 긍휼을 베푸는 일입니다. 예컨대 가버나움에 한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의 종이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드러누워서 꼼짝도 못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백부장의 마음은 몹시 아팠습니다. 때마침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찾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백부장은 자기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손수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긍휼의 은사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하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일곱 가지의 은사들을 열거했습니다. 그런데 고전12장에는 은사들이 아홉 가지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은사의 숫자에는 제한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사는 이외에도 얼마든지 더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말하는 의도는 은사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든지 간에, 받은바 은사대로 각자가 맡은 소임에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당나귀가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서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때마침 그 집의 강아지가 주인의 무릎에 앉아서 재롱을 떨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당나귀는 샘이 났습니다. 자기는 뼈 빠지게 일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강아지는 일도 하지 않고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나귀는 자기도 주인의 사랑을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주인은 마당에 홀로 앉아서 한가하게 부채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강아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틈을 놓칠세라 당나귀는 주인에게로 얼른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강아지처럼 자기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그 육중한 몸을 날려서 주인의 무릎 위로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가련한 당나귀는 영문도 모른 채 그 날 주인에게 죽도록 얻어맞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괜스레 다른 사람의 은사를 흉내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간에, 받은바 은사대로 각자가 맡은 소임에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은사의 소중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실 때 마구잡이로 무턱대고 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라고 했습니다.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적합한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직분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가장 적절한 은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은사라도 우리는 결코 소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일곱 가지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가를 일일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첫째,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이상이면 거짓 예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하이면 자기가 맡은 소임에 불충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똑같은 단어를 반복했습니까? 설명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섬김의 정신이 변질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섬긴다고 하면서 자기가 드러난다든지, 또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섬김은 어디까지나 섬김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가르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르치는 자가 잘못 행하는 것처럼 배움을 받는 자도 역시 잘못된 길로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넷째,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잘못이 무엇이었습니까? 욥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를 위로하러 왔습니다. 위로하러 왔으면 위로해 주어야지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욥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말았습니다. 권위하는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권위하는 일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다섯째,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해야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물질의 주인이 아닙니다. 물질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뜻대로 성실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마치 자기가 물질의 주인인 것처럼 받는 사람을 깔본다는지, 또는 인색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될것입니다.

여섯째,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스리는 자는 본이 되어야합니다. 다스리는 자가 부지런해야지 함께 일하는 사람도 역시 부지런할 수 있습니다. 그저 팔짱만 낀 채 말로서만 지시하려고 들어서는 안 될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솔선하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일곱째,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악 가운에 있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높고 높은 별을 넘어서 낮고 낮은 이땅으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억지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책임감 때문에 마지못해서 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일일이 설명을 했습니까? 은사는 하나같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여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가 없습니다. 똑같이 소중합니다.

어느 괘종시계에 달려서 움직이는 시계추의 이야기입니다. 오래 전에 그 시계추가 다른 부품들과 함께 조립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책상 위에는 여러 부품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때마침 그 시계추 옆에는 그와 함께 일하게 될 큰 톱니바퀴가 서 있었습니다.

시계추는 그 큰 톱니바퀴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 큰 톱니바퀴가 다 달아서 없어질 때까지 내가 계속해서 움직여야 할 텐데. 도대체 내가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해야 될까? 일 분이면 60번, 한 시간이면 3,600번, 한 달이면 그것의 24배, 일 년이면 또 그것의 365배… 아이고, 끔찍해! 나는 도무지 지겨워서 그런 일은 못 할꺼야!'
그러면서 시계추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시계주인은 시계추의 한숨소리를 듣고서 시계추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시계추야, 너무 끔찍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네게 한 가지만 물어보겠다. 할 수 있는지 한번 대답해 보아라. 네가 움직일 때마다 그저 딱 한 번씩만 똑딱거리는 소리를 내 줄 수 있겠느냐?"
시계추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시계주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시계 주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래, 네가 하는 일은 그것만 하면 돼. 그러면 너의 일로 인해서 시계 전체가 언제나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그 때부터 시계추는 괘종시계에 달려서 움직일 때마다 딱 한 번씩만 똑딱거리는 소리를 내었습니다. 시계추의 똑딱거리는 소리에 시계 전체는 언제나 활기차게 움직일 수가 있었습니다. 시계추도 그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금도 변함없이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서 충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괜스레 이것 저것 생각하면서 지레 짐작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간에, 맡은바 소임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하는 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전체가 언제나 활기차게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맡은 소임에 충실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어딘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받은바 은사대로 각자가 맡은 소임에 충성을 다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은사의 섬김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은사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다른 지체들을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일곱 가지 은사들을 살펴보면 다 섬기는 것입니다. 예언은 말씀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섬기는 일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르치는 일도, 권위하는 일도, 구제하는 일도, 다스리는 일도, 긍휼을 베푸는 일도 궁극적으로는 모두 다른 지체들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어느 농가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농가의 주인이 칠순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잔치를 며칠 앞두고서 집안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주인의 잔칫상에 올라갈 동물을 뽑기 위함이었습니다. 순교할 동물은 과연 누구인가? 그것이 그 날의 의제였습니다.
의장 동물이 먼저 개에게 물었습니다.
"얘, 멍멍아! 요즈음 들어서 주인의 기력이 몹시도 쇠하여진 것 같은데, 네가 주인의 보신을 위해서라도 탕으로 올라가 주면 어떻겠느냐?"
그 소리를 듣고 개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주인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것은 좋은데, 내가 없으면 누가 이 집의 재산을 지켜 주겠니? 주인을 도둑으로부터 보호해 줄자가 누구겠어? 그러니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의장동물은 개의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닭에게 의향을 물어보았습니다.
"얘, 닭아! 네가 삼계탕으로 주인을 좀 대접해 드리면 어떻겠느냐?"
그러자 닭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없으면 누가 매일 알을 낳아서 주인의 영양을 보충해 줄 수 있겠어? 그리고 내가 없으면 누가 주인에게 일어날 시간을 가르쳐 줄 수가 있겠어? 나는 안 돼!"
어쩔 수 없이 의장동물이 이번에는 소를 향해서 말했습니다.
"얘, 소야! 아무래도 네가 갈비로 주인을 대접해 드려야 하겠다. 그래도 잔칫상에는 소고기가 제일이지 않느냐?"
그러자 소도 역시 변명을 들어놓았습니다.
"내가 없어봐. 이 집의 이 많은 농사를 누가 짓겠어? 나는 안 돼!"
다른 동물들 역시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희생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동물은 돼지밖에 없었습니다.
의장 동물은 마지막으로 돼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얘, 돼지야! 네가 삼겹살로 주인을 대접해 드리면 어떻겠느냐?"
그러자 돼지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비장한 각오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꿀꿀, 알겠다. 죽을 놈은 나밖에 없네. 알았으니까 가마솥에 물이나 끓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을 어떠합니까? 우리도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며  섬김의 자리를 피하려고 들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자신을 희생하는 일, 섬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사와 관련해서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은사의 다양성입니다. 은사는 모두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둘째로, 은사의 소중성입니다. 은사는 소홀히 여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똑같이 소중합니다. 셋째로, 은사의 섬김성입니다. 은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젠가 우리는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하나님 앞에 서야합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처럼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든지 간에, 받은바 은사대로 맡은 소임에 충성합시다. 그리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착하고 충성 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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