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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당할 수 있는 시험 / 고전 1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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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감당할 수 있는 시험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0:10-13


설교내용  남자와 여자에게는 유사점도 있고 구별성도 있습니다. 남자는 오래 입은 옷을 자랑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내 양복은 10년 되었다’ ‘선친이 물려준 옷이다’ 이렇게 남자들은 자랑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오래 입은 옷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이렇게 남녀간에 심리적인 차이, 사건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 나타나는 반응도 남자와 여자가 차이가 있다고 분석합니다.

  오늘 우리는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감화와 큰 감동으로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우선 시험은 고통스럽고 무겁고 힘듭니다. 시험이란 고난을 말합니다. 모든 고난은 다 힘듭니다. 그래서 사람은 시험이 없기를 바랍니다. 심리적으로 내게는 고통이 없었으면, 장애물이 없었으면, 모두가 그렇게 바라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홀로 이 시험을 직면하고 감당하고 이겨 가는 면역을 가져야 합니다. 시험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은 극복하면 우리에게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인간으로서 시험을 당합니다. 오늘 본문에 표현된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라는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시련을 당합니다. 소나 돼지나 말이면 결코 시험을 당할 일이 아닌데 인간이기 때문에 시련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 가지 편견

  첫째는 좋은 환경은 시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은 축복이다, 몸이 건강하고, 사업이 제대로 되고, 가정이 평안하고, 사회적으로 지위와 명예를 얻고, 내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없이 편안하게 사는 그것을 우리가 ‘복’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좋은 환경은 더 큰 시험이 도사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 큰 죄에 빠집니다. 나는 여유가 있다고 하는 그 환경에서 더 큰 시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배운 사람들은 그 배움에 정비례하는 시험이 옵니다. 가진 사람들은 가진 것에 정비례하는 시험이 옵니다. 더 비윤리적입니다. 한 피의자는 IQ가 160으로 소개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IQ는 거의 천재와 같습니다. 컴퓨터를 전공한 사람이 컴퓨터 범죄를 저지릅니다. 갖춘 사람들이 더 악랄하고 더 비윤리적이고 더 큰 시험에 빠지는 현상을 우리가 많이 보고 있는 것입니다.

  ‘나쁜 환경은 시험이고 고난이다’ 라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이것이 시험이다 라고 규정을 하여 열등감에 빠지고, 좌절하고, 절망에 빠지는 이것은 정말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시험이 되고 맙니다. 우리 안에는 분명히 상황이 나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나쁜 환경이 곧 시험이고 고난이다, 이렇게 규정을 하면 그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시는 그 손길을 멈추게 하고 맙니다.

  우리가 아들을 얻거나 딸을 얻으면 축복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축복으로 알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그렇게 축복을 받고 컸던 아들, 딸들이 부모를 망가뜨리고 가정을 망가뜨립니다. 우리가 성공이라 했던 그 성공 때문에, 내가 그렇게도 집착하고 자랑했던 그것 때문에 나를 망가뜨리는 가시가 될 줄 누가 압니까?

  우리 사회는 나쁜 환경도 시험이 아니고, 좋은 환경도 축복이 아니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난을 거울로 삼으라, 경계로 삼으라, 즉 시험을 시련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시련은 우리에게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성도가 겪는 고난은 꿈이 아닙니다. 사건이요 사실이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과 육에 실제로 다가오는 사건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모르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지 않고 있는 것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얕은 믿음의 자리에서 깊은 믿음의 자리에 나아가라고 하나님이 훈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3절에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시험 자체를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고 시험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경륜과 그 분의 뜻을 깨닫는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깊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시험의 유익

  첫째는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어떤 성도가 세 번이나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갈등에 빠졌습니다. 수술은 한번 받고 안 받아야 합니다. 같은 병으로 세 번이나 수술을 받고 병실에 누워 있는 이 사람은 자기 속에 원망과 울분이 가득 차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수술을 한 번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무엇 때문에, 무엇이 잘못되어서 세 번이나 수술 받는가? 의사도 원망스럽고 병원도 원망스럽고 병원을 소개해 준 친구도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그런 가운데 이 사람이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나 가졌습니다. ‘왜 내가 세 번이나 수술을 받는가?’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려고 내게 고난을 주시는가?’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자신이 원망과 낙심, 열등감, 자학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볼 때 그는 하나님 밖에서 살았고 한 번도 하나님을 의지 해 본적이 없고 자기 힘으로 잘난 척 하고 살았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그 추함, 못남, 망가져 있는 모습, 수술만 세 번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엉망으로 망가져 있는 내면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원망하고 짜증 부리던 그 병상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회개하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성도는 영과 육이 회복을 받는 축복을 입었습니다.

  시험은 첫째로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너희는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원망은 끝없이 남을 깔보고 자신의 교만함을 집착하는 것입니다.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게 만듭니다. 시험 당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시험당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세로 돌아서면 희망이 있습니다. 시험을 당했는데도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을 줄 모르면 점점 더 악화됩니다. 그리고 버릴 것을 버리고 붙잡을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육의 것을 버리고 영의 것을 잡아야 합니다. 세상 것을 버리고 살아 계신 여호와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마지막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밤에 제자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주님이 기도하시는 그 지점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를 데리고 갔습니다. 주께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이 있는 곳을 와 보니 졸고 있었습니다. 흔들어 깨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가서 기도하고 돌아와 보니 또 졸고 있었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깨어 기도하라” 또 깨웠습니다. 다시 나아가 기도하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졸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혹시 우리의 신앙생활 하는 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일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주일날은 내가 깨어 있는 것 같은데 평일은 내가 졸고 있지 않는가? 주님이 오셔서 깨울 때는 깨는데 주님 가시고 나면 또 졸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 신앙생활의 자화상이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실제적으로 의지하고 사는가? ‘나는 하나님과 멀어지면 한순간도 견디지 못합니다’ 라는 영적인 긴장이 과연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절실합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온갖 시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시험 중에 시험에 들지 말라

  외과의사로 특히 암 수술 전문가인 장로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암이라는 병도 검사를 해서 제대로 발견해서 정확하게 치료를 하면 대부분은 다 치료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병을 키운다는 것입니다. 아주 기막힌 현실은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도 자기 말을 안 듣고, 친척 말 듣고 친구의 말을 듣는답니다. 자기 말대로만 하면 분명히 치료의 길이 있는데 암 걸렸다가 나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전문치료를 거부합니다. 그것을 빨리 말해주면 괜찮은데 한참 악화된 다음에 말합니다. 그러므로 병이 났을 때 병에 맞는 약이 투입되고 맞는 치료가 되면 우리 사람의 몸에는 자생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면역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병이 난 거기서 한 단계 악화된 병은 회복하는데 열 배의 힘이 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면 힘듭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시험 당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붙잡지 않고 땅위의 것을 붙잡고 해결하려다가 합병증만 일으켜 하나님도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가는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시련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시련은 이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험당할 때 감당하게 하시고 피할 길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초등학생에게 대학국어를 읽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초등학생에게 대학영어를 읽으라 하지 않습니다. 수준에 맞게 시험을 주십니다. 우리 믿음의 분량대로 시험을 주십니다.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습니다. 시험을 당해도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십니다. 그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길이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그 좌절과 낙망이 문제이지 앞이 막혀도 하나님은 길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미국 알라바마주는 땅콩이 유명합니다. 특히 미주에서 나는 땅콩 중에 질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래 알라바마주는 목화로 유명한 곳입니다. 특히 엔터프라이즈 카운티에 목화가 유명합니다. 어느 해인가 해충이 생겼습니다. 이 바구미 벌레라는 것이 생겨서 이것이 날라 다니면서 목화가 피기 전에 다래를 전부 갉아 먹어버렸습니다. 아무리 방지를 하고, 아무리 대비를 해도 바구미 벌레가 너무 극성이 되어 목화농사를 전부 망쳐버렸습니다. 몇 번 당하고 나서 그 지역 주민들이 모여서 “자, 이제 목화농사는 끝났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땅 밑으로 들어가는 땅콩을 심자” 그래서 땅콩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 토양과 땅콩이 절묘하게 적토성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땅콩 산업이 번창하게 되고 땅콩 때문에 부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엔터프라이즈 카운티에서 비석을 세웠습니다. 곤충 비석을 세웠습니다. 목화 농사를 안 되게 했던 그 곤충이 고맙다는 것입니다. 그 곤충들의 해충 때문에 땅콩농사를 하게 되고 우리가 부촌이 되었다는 곤충기념비가 있다고 합니다.

  시험 중에 길을 내신다

  시험은 감당하면 우리에게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은 피할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홍해를 보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하히롯에 서서 뒤를 보니 애굽의 군대가 보이고 앞을 보니 홍해가 보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뒤를 보아도 길이 없고 앞을 보아도 길이 없는데 하나님은 홍해의 길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생애도 길이 안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길은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이 열게 되어 있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을 믿어야 되고 그 길이 열리도록 우리가 순종해야 합니다.

  저는 영화보기를 좋아합니다. 근간에는 영화를 보지 못했습니다. 영화 중에서 서부활극을 좋아합니다. 모험영화도 재미있지만 모험영화는 메시지가 약합니다. 그러나 서부활극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이 눈’ ‘셰인’ ‘빅 컨츄리’ ‘오케이 목장의 결투’ ‘황야의 무법자’ 등 서부활극은 라스트 3분 속에 강렬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잘 음미하면 서부활극에 매료됩니다. 이 서부활극에는 첫째, 주인공이 죽지 않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통쾌한지 모릅니다. 그 다음에 선한 사람은 반드시 악한 사람을 이깁니다. 처음에는 악인 때문에 곤욕을 치릅니다. 하지만 끝에 가면 선한 사람이 이기도록 각색이 되어 있습니다. 언젠가는 복수를 할 것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영화가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서부활극은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이 세 가지 때문에 저는 서부활극이 좋습니다. ‘하이 눈’ ‘셰인’ 같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언제 보아도 감동적입니다. 문제를 다 해결하고 주인공이 떠납니다. 우리는 떠나는 것이 이별이지만 서부활극에서 떠나는 것은 새 출발입니다. 그들은 문제를 다 해결하고 떠납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떠나니까 비극입니다. 문제 해결하고 떠나는 것은 희망입니다. 그들은 문제를 다 해결하고 또 다른 문제를 해결하러 떠나는 개척자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해결하고 떠납시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영화는 픽션입니다. 허구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생애는 픽션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을 삽니다. 역사를 삽니다. 우리의 생애는 꿈이 아닙니다. 사실, 역사입니다. 이 역사 속에 우리의 생애가 새겨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입니다. 주인공은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붙잡고 나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도 주인공은 죽지 않습니다. 의가 불의를 이깁니다. 성도의 생애는 마지막이 해피엔딩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겼기 때문에 예수님과 하나된 나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가 부활 하셨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나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성도의 영광과 축복과 영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종착점은 영원한 영생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해피엔딩입니다.

  맺는 말

  그러므로 시험당할 때 절망하지 마십시오.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소망의 근거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 시험은 오히려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의지하게 하고, 피할 길을 열어주시고, 그 길을 발견할수록 우리 믿음이 강건해지고, 그 길을 통과할수록 우리가 주 앞에 한 단계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그것이 시험 당한 우리 성도를 향하여 이루어 가시는 성취입니다. 감당치 못할 시험은 없습니다. 시험 중에 우리가 성숙한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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