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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도망자의 신앙을 극복하라 (욘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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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의 신앙을 극복하라
요나 1:1-10

오래 전 ''도망자(fugitive)'' 라는 외국 영화가 시리즈로 TV에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리차드 캠볼''은 의사로서 아내를 죽인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아 교도소롤 행하던 중 버스전복으로 탈주하게 됩니다. 그 후 주인공은 ''샘 제라드''라는 형사의 끊임없는 추적에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개봉 당시 연속 4주 동안 흥행 성적 1위를 기록했고 우리에게도 인기 있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도망자의 삶을 그렸습니다. 도망자의 삶은 힘들고 고통스럽고 불안한 것입니다. 도망자의 삶은 참된 자유와 평화가 없고 기쁨과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밋대의 아들인 선지자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니느웨 성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이르렀으니, 그 큰 성 니느웨로 가서 40일이 지나면 하나님이 니느웨성을 멸망시키실 것(욘3:4)을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성으로 가지 아니하고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도망자인 요나는 마음이 편안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러한 자신에 대하여 진실하지 못하고 그 자신을 감추고자 배 밑층에 내려가 잠들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죄책감의 답답함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도망자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삶을 살면서도 참된 자유의 기쁨과 평화를 잃어버리고 어두운 영혼을 가지고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도망자인 요나는 도망자의 자리에 있는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도망자의 신앙의 삶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사람

도망자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도망자 요나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도망자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자 했습니다. 도망자의 특성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것입니다.

처음인간 아담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의 모든 실과는 따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은 금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만지지도 말과 먹지도 말라고 금하신 그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아담은 감히 하나님의 낯을 대할 수 없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그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어두운 영혼 속에 사는 도망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을 거절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기대하시는 뜻은 요나가 죄악이 가득한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함으로 회개시켜 그 성을 멸망에서 구원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니느웨성을 멸망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요나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과 다를 때,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린 요나에게 나타난 행동의 특성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뜻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느웨 성의 좌우를 분변 하지 못하는 십이만명의 어린아이들을 멸망시키실 수 없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던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기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과 조화되는 것입니까? 때로는 우리의 잘못된 기대에서 오해된 신앙의 역사를 만드는 것을 봅니다.

분만실 앞에서 네 명의 남자가 부인의 분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간호사가 나와 첫 번째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축하합니다. 귀여운 쌍둥이 아빠가 되셨어요." "정말 우연의 일치군요. 나는 LG 트윈스(Twins)팀에서 일하고 있어요." 되돌아간 간호사가 다시 나와 두 번째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세 쌍둥이 아빠가 되셨어요." "아니! 이런 우연이 있단 말인가! 나는 삼성(Three Stars)에서 일한단 말입니다!" 세 번째 남자에게 온 간호사가 말했습니다. "어머, 기네스북 감입니다. 일곱 쌍등이가 나왔어요!" "세상에 설마 했는데. 나는 칠성(Seven Stars)사이다에서 일해요" 그런데 갑자기 네 번째 남자가 기절을 했습니다. 그가 정신이 든 뒤에 간호사가 물엇습니다. "왜 그러세요? 뭐가 잘못되었나요? 뭐가 잘못되었느냐구요?" "나는 119 구조대에서 일한단 말이예요!"

이 이야기는 우리 안에 잘못된 기대감이 만들어내는 것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기대하는 것과 다를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낯을 돌리는 신앙의 삶을 만들어 냅니다. 내 뜻이 하나님의 뜻과 대립될 때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뜻에서 벗어날 때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도망자가 됩니다. 도망자의 삶은 실패자의 삶입니다.

성서는 모세에 대하여,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신34:10)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말씀하실 때에, 얼굴을 마주 바라보시면서 명백한 말로 말씀하셨고(민12:8),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말씀하셨다(출 33:11)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뜻에 따라 신실했기에 항상 하나님의 낯을 대하고 살았습니다.

모세의 하나님을 대신하는 능력과 이스라엘 백성을 40년간 이끌어간 위대한 지도력은 하나님의 낯을 대하고 살아가는데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낯을 대하듯 그리스도와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낯을 대하고 살아가는데서 아름담고 축복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저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히12:2)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낯을 대하기에 즐겁습니까?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믿음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혹이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사이에 숨었던 아담과 같이 하나님이 두렵고 부담스럽게 느껴지십니까?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심장을 살피시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의 행실대로 보응 하시느니라"(렘17:10)고 했습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자로 남지 마십시오. 아무리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갈 지라도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라"(시139:9-10)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지 마시고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뜻으로 돌아서시고 그 뜻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그러므로 도망자의 어두운 영혼에서 밝은 영혼의 사람이 되십시오.

깊이 잠든 자

도망자는 깊이 잠든 사람입니다. 도망자는 깊은 영적 수면에 빠진 사람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함으로 찾아오는 양심의 괴로움에서 도망하고자 했습니다. 마음의 불편함에 진실하게 반응하기보다는 그곳에서 도망가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돌아가기를 바라는 내면의 음성인 불안감에 대답하기보다는 그곳에서 도망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 방법은 깊이 잠드는 것입니다. 무감각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 깊이 잠들었습니다. 풍랑이 일어나 배 안이 소란해 졌음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깊은 잠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는 영혼은 깊은 영적인 수면에 빠집니다. 영적인 불감증에 빠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당연히 느껴야 할 양심의 괴로움이나 아픔에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하여 무디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주시는 참 기쁨과 평강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는 독수리과에 속하는 ''세크타리''라고 하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다른 여느 새와는 특이한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새가 날개를 펴고 날기 시작하면 새 중의 왕으로서 아무도 그 새를 쫓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 반면에 이 새가 날개를 움추리고 자리에 앉아 있으면 그 두뇌가 둔감해진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땅에 앉아있을 때에 다른 동물이 와서 잡아먹으려고 해도 도망갈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다가도 이 새가 날개를 펴기만 하면 얼마든지 높은 하늘을 날아가기도 하고 그 높은 곳에서도 땅에서 다니는 어떤 작은 짐승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눈이 밝다고 합니다.

인간은 ''새크타리'' 새와 같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고귀하고 무한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잠에 깊이 빠져 버리면 사단이 와서 농락해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낮 짐승과 같은 더럽고 무력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고 하시면서, "너희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5:8)고 했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이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자"(롬13:11-14)고 했습니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신앙의 역사입니다. 이 잠에서 깨어나야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무의식과 무감각의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은혜 받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잠들어 있는 도망자의 신앙에서 벗어나 깨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풍랑을 일으키는 자
도망자는 풍랑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안겨주는 사람입니다. 요나 때문에 배는 풍랑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불순종하는 요나를 하나님의 뜻에 돌이키기 위하여 대풍을 내리셨습니다. 다시스로 향하는 요나를 니느웨로 향하게 하시고자 바다에 큰 풍랑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는 요나를 돌아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큰 풍랑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는 인간의 뜻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큰 풍랑입니다. 큰 풍랑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깊이 잠들어 있는 요나를 깨우는 방법입니다.

도망자의 삶은 풍랑을 일으키는 삶입니다.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고 고통을 안겨주는 삶입니다. 요나 때문에 배의 사람들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도망자는 나 하나만의 도망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풍랑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사건에 사건을 만들고 문제에 문제를 만들어 내어 고통과 괴로움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목회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바둑을 배웠습니다. 목사님은 바둑이 너무 재미있어서 자나깨나 바둑, 어디서나 바둑, 바둑 생각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주일이 되었는데도 예배 시간 전까지도 바둑 생각만 하다가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의자에 앉은 성도들의 머리가 전부 바둑알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검은머리는 검은 돌, 흰머리는 흰 돌, ...... ''이러면 안 되는데'' 마음을 고쳐먹고는 예배에 집중하여 목사님답게 눈앞의 바둑알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아무런 사고 없이 예배를 마치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는 아멘, 하려고 하는데 그만 아멘 대신 ''아다리!''하고 만 것입니다.
선장은 큰 풍랑 중에도 깊이 잠들어 있는 요나를 깨우면서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배안의 사람들은 풍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요나가 뽑혔습니다. 요나는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음을 자백했습니다. 요나는 큰 풍랑은, 자기가 하나님의 뜻과 기대를 저버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도망자가 됨으로 찾아온 것임을 말했습니다. 풍랑의 원인은 하나님을 등지 도망자에게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도망가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역사는 풍랑의 역사인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삶의 역사는 무엇입니까? 부정 부패의 풍랑, 폭력과 파괴의 풍랑, 갈등과 자살의 풍랑들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가는 인간들의 역사가 만들어내는 모습들입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러자 풍랑은 잔잔해 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요나의 뜻을 지배하자 풍랑은 잔잔해 졌습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 배속에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토하게 하여 다시 니느웨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선 요나는 도망자에서 자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나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성이 망하리라고 외쳤습니다. 이 외침을 듣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대로 니느웨성은 왕으로부터 온 백성이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성을 멸망에서 구원시키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도망자의 신앙의 모습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신앙인이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아서십시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와 얼굴을 마주 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맞이하시는 하나님께 돌아서서 그 분의 얼굴을 대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영적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풍랑을 일으키는 믿음의 삶을 살지 마십시오.
도망자의 신앙을 극복함으로 하나님고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축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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