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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빈 집 - 그 위기 / 눅 11: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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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그 위기
누가복음 11:24-26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알기 원하여 이 자리에 나오신 구도자 여러분, 명절에 고향을 잘 다녀오셨습니까? 오랜만에 부모님을 뵙고 친척들, 어른들도 만나는 좋은 시간을 가졌을 법합니다. 그러다 보면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오고 불신 어른들께서 여러분들에게 할법한 충고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러분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말리다가 마지못해 허락하면서 했을 법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되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라는 충고입니다.

그런 말씀은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볼만합니다. 먼저 신앙에 깊이 빠진다는 것을 그 분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이단 집단이나 사교에 빠져서 가족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 주위에는 있습니다. 또 집을 나가서 집단생활을 하며 집문서, 땅문서 모두 바쳐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도를 통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고 신앙에 깊이 빠진다고 하면 정말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깊이 빠지는 것은 그만두고 아예 시작하는 것도 말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깊이 빠지지 말라고 했을 때에 어떤 배경이 있을까요? 저는 신학생때 합천의 어느 시골에 가서 복음을 전했던 적이 있습니다. 거기는 시골이라 그런지 세월이 흘러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에 무슨 조합을 하는 조합장 아들이 우리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일 때문에 제가 그 조합장을 만나야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까, 그 분 이야기가 자기는 무슨 당에 가입한다든지 교회 가입한다는 것은 절대 말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게 동학군이라든지, 천도교라든지 이런 영향들이 휩쓸고 지나가면서백년의 세월이 흘러갔는데도 아직까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교회 잘못 가담하면 끝난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양문화에서는 일반적으로 유교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유교를 믿는 사람들은 중용의 도를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열중할 필요도 없고 또 지나치게 냉담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남이 하는 만큼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이나 생각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능동적이며 적극적이어야 할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동양문화권의 철학적인 배경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 상 우리는 쉽게 믿을 기독교를 선호합니다. 사실 그런 어른들의 충고가 없어도 우리는 본성상 충돌과 분리를 싫어합니다. 가급적이면 양편을 다 만족시키기를 원합니다. 우리 속담에는 소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쪽을 선택하기를 원합니다. 어느 쪽이든 극단을 싫어합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도 결단을 강요하며 부담을 주는 설교보다 평안한 마음으로 부담 없이 앉았다가 일어설 수 있는 쪽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어떤 본성보다도 우리의 문화적인 영향보다도 우리는 성경의 교훈,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옳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은 그 시작부터 중립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과 태도는 미지근해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 미지근하면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런 상태를 싫어합니다. 차라리 바울이 사울이었을때처럼 화끈하게 반대하려면 하든지 믿을려면 딱부러지게 믿든지! 그렇게 주님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적 신앙은 철저한 결단과 철저한 헌신을 요구합니다. 그 때 신앙은 제 값을 합니다. 결단 없는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헌신 없는 신앙생활은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구도자 여러분, 유보적인, 타협적인, 반신반의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늘과 세상을 동시에 사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물질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무어라고 말하든지 상관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더라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결단 없이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미지근한 교인은 세상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도 없고 칭찬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전적 헌신만이 주님이 바라시는 신앙인의 수준입니다. 전적 헌신만이 여러분과 제가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신앙 생활하는 길입니다.

지난주일 우리가 살핀 주님의 마지막 도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달리 말해서 -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23절)

결코 중립적이거나 중용적인 입장에 설 수 없음을 주님은 선언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관계를 맺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위험을 “빈집”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십니다. 들어보십시오.

더러운 귀신이 한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그 귀신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다가 얻지 못하고 다시 자기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이 깨끗하게 소제되고 수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들까지 집에 데려와서 거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서 이 집을 점령하니 그 사람의 나중 상태가 처음 상태보다 훨씬 심각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빈집의 비유를 통해서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신앙의 필요를 주님은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살펴봅시다. 첫째 회개는 했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믿음이 없는 마음은 빈집과 같습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그 출발점이 회개와 믿음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시면,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설교자들의 외침이 들리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그렇게 설교했고 예수님도 그렇게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도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죄로부터 돌이키게 만드는 사건이라면, 믿음은 죄에서 돌아선 다음에 내가 새롭게 믿어야 할 분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 분과 더불어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 분과 더불어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나라에서는 예수님보다 앞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를 가르켜서 세례자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요한의 설교는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보통 설교를 듣고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계층들까지, 군인들, 무슨 세리들, 아예 그 사회에서는 종교적이라고 취급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증거했던 그분, 자기보다 뒤에오시는 훨씬 탁월한 그 분 예수를 믿는데까지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 비유의 빈집과 같은 상태의 사람들입니다. 더러운 빈집은 청소했지만 새로운 주인을 모시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 아침이 되면 교회에 나옵니다. 어떤 날은 특별한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죄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잘못을 뉘우치고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계속 살아서는 안되지, 이 죄에서 떠나야 해” 때로는 과거의 죄에 대한 아픔을 느끼고 눈물도 흘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특별한 감동을 받습니다. 마음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삶을 계속 살지 않고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기도하고 아멘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버리면 큰일납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음 아파했습니다. 뉘우쳤습니다.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심도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납니다. 예배가 끝났습니다. 집회가 끝났습니다. 그만입니다.

사흘이 못되어 옛날 생활로 돌아갑니다.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 같습니다. 돼지가 씻고 나서 더러운 구덩이로 다시 돌아가 그 자리에 눕는 것과 같습니다. 단순한 뉘우침, 죄에 대해서 아파하는 마음은 있지만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모신 적이 없습니다. 그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는 삶으로 연결되지 못합니다. 본문은 이런 상태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그들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신 예수님 앞으로 나왔지만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지 않습니다. 예수와 더불어 새로운 삶을 출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 상태는 일시적인 귀신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나 빈집에 불과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나갔다가 안식처를 얻지 못해서 다시 돌아왔을 때 청소된 집을 바라보면서 혼자 말을 합니다.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34절) 그 집을 보고 내 집이라고 합니다.

귀신은 아직도 이 집을 자기 집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사람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그런데도 귀신은 내 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빈집이기 때문에… 청소만 되었지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 주인이 들어 오셔야 합니다. 그 집의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령이 내 집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게 하십시오.

새 주인이 없으면 더러운 귀신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것은 내 집이야 교회에는 나와 앉아 있지만 너는 아직도 내 처소야”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집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무언가 심상찮구나 위기를 느끼고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서 순식간에 악령의 처소로 만들고 맙니다. 신앙생활하다가 다시 타락한 사람들 보셨습니까? 얼마나 그 결과가 비참해 지는지. 교회를 나온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나와서도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고 미워하고 이런 상태에 있다고 하면 그건 더러운 영의 활동 무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러운 귀신의 활동이 계속되면 정신이 황폐해지고 영혼이 파괴되고 삶은 철저히 약탈을 당합니다.

둘째로 죄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은 마치 빈집과 같습니다. 회개하려다가 마는 자리에서 끝난 것 아닙니다.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한 잘못에 대해서 더 이상 여간해서는 그 잘못을 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래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지 않는 것, 그것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동입니다. 소극적인 종교 생활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제가 처음 시간에 연주하시는 분들을 봤습니다. 모르긴 해도 내가 악보를 틀리지 않고 연주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고 하면 우리 울산교회의 관현악단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틀리지 않는 것, 곡 틀리지 않는 것 그것이 연주하는 사람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찬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찬양하는 사람들의 목표는 마음에서부터 기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때에 그게 목표 달성하는 겁니다. 연주하면서도 내게 주신 재능가지고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노력하는 그 소원을 담아낼 수 있어야 그게 제대로 된 성가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작년 1년 돌아보면서 아이구! 난 특별히 적자 보지는 않았어. 작년까지 어려울 때야 그러고 지나갈지 모르겠습니다. IMF시절이었으니까. 그런데 10년씩이나 나는 적자는 안봤어. 그러고 사업을 하고 있다면 그런 대리점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내가 본부장 같으면 적자 안내는 대리점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흑자를 내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뭘 안했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무엇을 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보통 신앙 생활할 때 그럴 때가 있어요.

“나는 저 세리처럼 간음하지도 않았습니다. 도적질도 안했구요. 나는 저 죄인처럼 살인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특별히 어릴 때부터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난 분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착해 보입니다. 착한 죄인들입니다. 여간해서는 나쁜 짓을 안하니까요.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교회를 다니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살인하지도 간음하지도 도적질하지도 않았을지 모릅니다. 아니 그 보다 더 적극적인 삶을 사셨다구요? 이레에 적어도 두 번은 교회에 출석하고 -여기에 한번 나오는 사람들도 있지요- 소득의 십일조도 정확하게 나는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혹시 그래서 생각하는 분 있습니까? 그게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전부입니까?

아니면 종교적인 규칙을 지키고 종교인으로서 의무를 다해왔지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뭔가가 이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돼라는 안타까운 생각은 가져 보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의 의에 목말라 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갈망하지는 않습니까? 무엇을 안 했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사역하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주일날 와서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 지난주일 무사히 잘 보내서 별일 없어서 감사합니다. 정말 별일 없었던 것도 감사한 일은 맞습니다. 사건 사고가 많은 세상에 살면서 별일 없었던 것도 감사할 일이 틀림없지만 노상 보고라는 것이 별일 없어서 감사합니다. 내가 그런 사람 사장이라고 하면 그만둬. 딴데가봐. 그러겠어요. 그렇죠? 별일 좀 해봐. 별일. 나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해봐. 하나님이 그러시지 않겠어요. 언제나 큰 잘못 범하지 않는 것만 가지고 만족하는 상태에서 이제는 조금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안했다는 것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조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보고를 받을 때마다 안타까울 것입니다. 무엇을 하려고 갈망해 왔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쏟아 주신 사랑에 보답하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도 ‘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에 무엇을 하라고 일러주어야만 아이가 진취적이 되는 겁니다. ‘하지 말라’고 그러고 그것도 잘못하자마자 ‘하지 말라’고 그러면 주눅이 들죠. 잘못하는 것이 있더라도 가르킬때는 무엇을 하지 말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5절 이하를 보십시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 버려야 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참된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버리는데서 중단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진실한 말을 사람 가운데서 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언제 거짓 말쟁이가 거짓 말쟁이를 면합니까? 거짓말을 안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잠시 거짓말을 안하고 있다고 거짓 말쟁이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한 순간은 거짓말을 중단하고 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순간 또 필요하면 언제 거짓말할지 모릅니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쟁이를 면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제 새롭게 참말을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버리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서로에게 말해야 합니다.
계속되는 바울의 교훈을 하나 더 살펴봅시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28절) 도적질하던 사람이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 다시 도적질을 하지 않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도적질은 더 이상하지 않지만 거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번 것으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손으로 수고하여 자기가 벌은 것으로 남에게 베푸는 구제하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전에는 남의 것을 훔쳐서 사는 삶이었지만 더 적극적인 삶으로 열심히 일해서 내가 가진 것으로 남에게 주는 삶으로 나아갈 때 그가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없이는 그저 눈에 보이는 곳을 청소만 해 놓는 격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구도자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혹시 교회에 발을 디딘 후부터 두 갑 피우던 담배를 한 갑으로 줄였습니까? 아니면, 왠만해서는 화를 내거나 더러운 욕설을 입에 담지 아니하려고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집사라고 알려진 이상 속이 썩어도 참고 지냅니까? 죄를 안 지으려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열매가 풍성해야만 합니다. 벌레 먹은 열매가 더 이상 달려 있지 않았다고 좋은 과목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가 좋은 나무라는 것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좋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릴 때입니다. 하나님 나한테는 나쁜 열매가 하나도 안보여요. 그렇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셋째 주님과의 관계는 맺어졌지만 적극적으로 주님의 지배를 받지 못한 마음은 빈집과 같습니다. 요즈음 시골에 가면 빈집이 많습니다. 저는 경상북도 예천 어느 마을에 갔더니 마을이 150호 되는데 알아보니까, 마을에 거의 반이 비어 있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주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주인이 살고 있지 않기에 비어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집을 자주 돌아보지도 못하고 보살피지 않으면 비록 주인이 있어도 빈집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집들은 주인이 다 있는 집들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살지 않기에 빈집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교인들이 의외로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구주라고 고백하며 한때 주님을 영접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 삶을 주장하는 주인 노릇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새생명 훈련받으신 분들은 마음을 표시하는 그림을 알고 계시지요. 주님이 들어오시기는 했는데 마음의 왕좌에는 아직도 누가 앉아 있습니까? 내가 앉아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주인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누가 주인이 되어 있어요?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딸 시집보낼 때도 자기 마음대로, 아들 대학 보내는 것도 자기 원하는 데로 그저 주님이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의 왕좌에 앉아 있는 내가 결정해 놓은 일을 뒤치닥거리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대우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마치 알라딘 램프에 나오는 시종 같습니다. 램프를 비벼 대면 나와서 예. 주인님 뭘 도와 드릴까요?라고 말하는 시종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신앙은 그런 신앙 아닙니까? 모든 중요 결정은 여러분들이 다 하시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결정 뒷바라지 해주는 것 밖에 없다고 하면 여러분은 아직도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 아닙니다. 성경 말씀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말씀이 주인이 아닙니다.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전에는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결코 아무도 다스리지 않는 비무장지대처럼 비워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으로 충만함을 받지 못하면 별수 없이 이 집은 다시 더러운 귀신들의 처소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 상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나의 주인 노릇을 하고 계십니까? 주님의 주권을 마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지배하도록 나를 맡기고 있습니까? 그 분의 거룩한 영으로 내 마음과 내 생각을 지배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시기에 감히 더러운 귀신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이 되었습니까?

아직도 기도를 가르쳐 주신 다음 주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3절).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예수께서 약속하신 가장 좋은 선물이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주님 자신의 거룩한 영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당신의 거룩한 영을 마음속에 부어 주시길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능력 가운데 걸어가십시오. 성령의 깊은 강물 속에서 헤엄치며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은혜 속에 잠겨 이 악한 세대를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오.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주 성령을 부어 주시기를 사모하십시오. 충만한 은혜가 여러분의 영혼에 부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주 예수만 여러분의 힘이 되고 여러분의 만족함이 되도록 소원하십시오.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한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부활, 승천하셔서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하신 가장 큰 사건은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준 사건입니다. 거룩한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셔서 우리가 그 영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을 능력과 그 영광스러운 삶을 성경은 어떻게 그 비결을 공개하고 있습니까? 33년 짧은 기간 동안 사시면서 3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사역했지만 인류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많은 진리를 가르치시고 위대한 표적을 행하실 수 있던 비밀을 이렇게 성경은 밝힙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그 비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그 엄청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므로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가는 곳마다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들을 고치실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주 예수그리스도께서도 사역하시면서 성령의 기름 부음을 필요로 했다면 여러분과 저는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이 거룩한 성령의 부으심을 사모하십시오. 이 부으심을 받아야 악한 세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승리하는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성령의 부으심을 얼마나 사모하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이 성령의 충만함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십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성령에 의해서 새사람이 되지만 모두 다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당연히 성령께서 그 마음에 들어와 계시지만 누구나 다 자동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주님이 도전하셨습니다. 약속을 믿고 간구할 때에 주님께서는 성령을 부어 주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시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우리는 생기가 넘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사람의 생각을 초월한 평강이 우리의 마음에 자리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우리는 말할 없는 기쁨을 체험합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나아가서 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먼저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을 구하라고 명합니다. 이 능력이 없이는 이 악한 세대를 승리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거룩한 능력의 부으심이 없이 우리의 마음 상태는 유령 같은 빈 집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성령께서 내 속에 충만하게 임재하시면 주님께서 원치 않는 것들을 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내 속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아니 적극적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들,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들을 내가 찾아서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삶을 다스립니까?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십니까? 성령의 충만함이 여러분의 마음과 삶을 장악하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더러운 귀신이 다시금 접수한 집처럼 더 심각한 자리로 전락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심각한 영적 도전을 합니다. 하나님께 철저하게 돌아오지 않고서 약간의 변화에 만족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에 나옴으로 약간의 변화가 주어지죠. 주일에는 전에 없이 일찍 일어나서 머리도 빗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도 나오고 구역예배도 참석하고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만족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으나 아직 성령께서 들어가서 다스리지 아니하는 마음 상태는 폭풍 전야 같습니다. 겉모습 가지고는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옛삶을 청산하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새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죄 짓기를 그치는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관계를 이제 맺었다는 것에 머물러 있지 말고 그 주님의 기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이제 주님이라고 불렀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셔야 합니다. 독일에 옛성당에는 그런 기록이 있다고 그러죠.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 불렀지만 한번도 나를 주인 대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날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리라’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이제 주님으로 섬기는 자리에 나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새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성령의 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서 우리는 더러운 귀신이 범접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새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소제되고 수리된 정도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새로운 주인을 모시고 철저하게 새 주인의 지배를 받을 때에 여러분이 변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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