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겟느냐? (눅 10:25 - 37)

  • 잡초 잡초
  • 501
  • 0

첨부 1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겟느냐?
누가복음 10 : 25 - 37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교회관이 갈수록 다양해져 가고 있습니다. 한 성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적 표출이 다양한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기에 나타난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말하기를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이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하셨습니다. 율법사는 예수님께 대답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사의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고 하셨습니다.

이때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율법사는 이웃에 대한 자신의 개념적 의의를 사람들 앞에 과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가 생각하고 있는 이웃의 개념 속에는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이 제외된다는 것을 아시고 강도 만난 자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참 이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Ⅰ.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 려 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불신앙으로 인해 영적으로 죽은 이웃을 강도 만난 자로 비유했습니다.

1)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0장 30절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이지만 여리고는 바다보다 250m 낮은 저지대입니다. 이 길은 강도가 많은 곳이므로 사람들이 습격 당하기 좋은 길입니다. 그래서 이 길을 당시에는 '붉은 길', '피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은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예수는 그의 정체를 밝히지 아니했습니다. 여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것은 곧 죽음의 길입니다.

2) 그는 강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본문 10장 30절에 {…강도를 만나매…}라고 했습니다.
그가 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강도는 사람을 헤치고 물건을 빼앗는 포악한 도둑입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강도를 마귀로 규정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유대인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이 죄악 된 세상에 잡혀서 고통 당하는 장면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역사상에 나타난 강도들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강도 행각을 자행했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로마의 네로, 독일의 나치, 일본의 군국주의, 유물론의 공산주의, 특히 로마 카톨릭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인본주의, 과학지상주의, 무신론주의, 이단사상 등은 현대판 강도들입니다.

3) 그는 강도로부터 옷 벗김을 당했습니다.
본문 10장 30절에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라고 했습니다. {옷}은 인격의 상징인 동시에 신분의 상징입니다. 옷을 벗은 벌거숭이는 수치스럽습니다. 강도를 만나면 우리가 가진 귀하고 소중한 것을 다 빼앗깁니다.
영적 강도를 만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온갖 소중한 것들을 모두 벗김 당하고 빼앗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3장 11절에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3절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입은 옷을 벗길려고 합니다. 불가능한 것에도 도전합니다. 가죽옷입니다(창 3:21). 새 옷입니다(욱 5:36). 구원의 옷입니다(사 61:10). 피에 씻은 옷입니다(계 7:14). 그리스도로 입은 옷입니다(갈 3:27). 주예수 그리스도로 입은 옷입니다(롬 13:14). 흰옷입니다(계 3:5, 18).
마귀가 우리가 가진 것을 벗기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3장 12절에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가 받은 회개의 옷, 감사의 옷, 찬송의 옷, 기도의 옷, 희생의 옷, 전도의 옷, 충성의 옷, 순종의 옷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윤리와 도덕의 옷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면류관을 얻는 옷입니다. 강도는 이 모든 것을 벗기고 벌거숭이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4) 그는 때려 거반(居半) 죽도록 맞았습니다.
본문 10장 30절에 {…때려 거반 죽은 것을…}이라고 했습니다.
강도는 온갖 흉측한 무기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강도 마귀는 우리를 죽이려고 온갖 무기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신론이라는 무기입니다. 우상숭배의 무기입니다. 인본주의 무기입니다. 과학지상주의 무기입니다. 공리주의 무기입니다. 황금만능주의 무기입니다. 절대지식 기반주의 무기입니다. 쾌락주의 무기입니다. 혼합주의 무기입니다. 각종 이단성의 무기입니다. 이러한 흉기에 맞아 인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5) 그는 버림을 당했습니다.
본문 10장 30절에 {…버리고 갔더라}고 했습니다.
강도는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빼앗았습니다. 목숨까지 빼앗을 뻔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빼앗을 것이 없게 되자 거반 죽게된 사람을 그냥 버려 두고 가버렸습니다.
이렇게 여리고행은 사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강도가 매복하고 있는 길입니다. 강도가 즉시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떠나는 참혹한 여정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가는 행로입니다.
마귀는 이 시간도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떠나 모든 것들이 혼재하는 여리고로 가는 우리들의 옷을 벗기기 위해 매복하여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우리의 이웃들은 강도의 위험도 모른 채 여유 있는 모습으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는 거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Ⅱ. 강도 만나 죽게 된 자를 보고 그냥 지 나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1) 한 제사장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본문 10장 31절에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죽은 시체를 만질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민수기 19장 11절에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 일을 부정하리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피하여 지나가고}( , 안티파렐덴)라는 말은 '반대편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도피행각입니다. 제사장은 자기의 의무수행을 위해서 그 사람이 이미 죽었다는 확신 속에 그냥 지나쳤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율법준수 정신 때문이라고 해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가 못 할 입장이라면 일단 생사여부를 확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연락이라도 취해주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배려도 제사장은 할 줄 몰랐습니다. 그 자리를 의도적으로 피해버린 제사장의 행위는 아무런 정당성이나 설득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2) 한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갔습니다.
본문 10장 32절에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라고 했습니다
레위인은 제사장의 성무를 도우면서 하나님과 백성들 앞에 봉사하기 위하여 성별 된 지파입니다. 그들은 제사장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특권층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사장과 함께 레위인 역시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당시의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을 만천하에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도 그곳에서 다시 강도를 만나 죽게 될까봐 허둥지둥 그곳을 빠져 나가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이들은 지나친 호신주의자들이며 극에 달하는 이기주의자들이며 이미 하늘에 사무치는 위선과 권위주의자들입니다. 자신을 유익하게만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정체성마저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는 기회주의자들입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언제나 상황 윤리적 태도를 서슴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이른바 특권층의 도덕적 의무와 책임 즉,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Ⅲ.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입니다.

본문 10장 33절에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라고 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유대인 중에도 유대교 지도자들이었고 세 번째 사람은 사마리아인입니다.
당시에 사마리아인은 이들에 비하면 사람 대우도 받지 못하던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킨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유대주의자들의 교만과 사마리아인의 겸손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역사 깊은 반목(反目)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로 통행하지 않고 먼 베뢰아 지방으로 다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중앙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신 12:4-14).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은 그리심산에 따로 지어서 중앙성소를 삼았습니다(요 4:20). 유대인들이 볼 때 사마리아인들은 상종하지 못할 저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측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말 가운데 요한복음 8장 48절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강도 만나 죽게 된 죄인의 진정한 이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1) 그는 그를 보았습니다.
본문 10장 33절에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라고 했습니다.

2) 그는 죽어 가는 자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본문 10장 33절에 {…불쌍히 여겨}라고 했습니다.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중생받은 인간의 착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오염되거나 퇴색되지 아니한 순수한 마음입니다.

3) 그는 가까이 갔습니다.
본문 10장 34절에 {가까이 가서…}라고 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는 자기가 타고 있던 짐승에서 내려 죽어 가는 자 앞에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 가까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계시종교의 특색입니다. 기독교는 죽어 가는 자를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4) 그는 죽어 가는 자를 살리는 치료하는 의사입니다.
본문 10장 34절에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일단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여기 {기름과 포도주}는 치료제입니다. 기름은 통증을 멈추게 하고 포도주는 살균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평소에 기름과 포도주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는 성도들의 양식을 상징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6절에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감람유와 포도주}는 흑마탄 자가 저울에 달아 나누어주는 양식이 아니라 오직 성도들에게 무제한 예비된 양식입니다. 진정 주님은 우리의 감람유와 포도주가 되십니다.

5) 그는 환자를 정성껏 돌보아 주는 간호자 입니다.
본문 10장 34절에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타고 오던 짐승에 환자를 태웠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섬기는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종의 도를 보이셨습니다(요 13:13-14).
그래서 찬송가 278장에서도 "우리 주님 거룩한 손 제자들의 발을 씻어 남 섬기는 종의 도를 몸소 행해 보이셨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6) 그는 환자의 원상회복을 책임지는 보증자 입니다.
본문 10장 35절에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이튿날}을 '그날 새벽에'라고 된 것도 있습니다. 결코 사마리아인은 할 일 없는 자가 아닙니다. 그는 새벽 일찍이 떠날 만큼 바쁜 여행자였습니다.

여기서 참고로 마태복음 20장 2절에 나오는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그런데 역사가 폴리비우스(Polybius)에 의하면 동시대 이탈리아에서 하루 숙박비가 로마제국 화폐로 1/32 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로마제국 내에서 통용되던 화폐의 가치가 동일하였다고 볼 때 사마리아인이 건넨 데나리온 둘은 약 2개월 동안의 숙박비에 해당합니다. 2개월 동안 숙박비를 주면서 부비(浮費)가 더 들면 돌아올 때에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마리아인은 완전한 치료를 부탁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주고 완전한 치료를 위한 보증자가 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승천하신 후에도 자기 백성들의 치료를 계속되게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영광의 영 곧 보혜사 성령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했을 때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인을 자신에다 비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에게 찢겨 죽게 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이 치료할 수 있습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자들을 찾는 방법은 대단히 힘든 작업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작업입니다. 곧 해산의 수고라고 했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은 사마리아인이라고 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현대인들은 강도 만난 자들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강도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아니하고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도록 맞았습니다(사 1:6).

그리고 내동뎅이 침을 당하고 피투성이가 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이 오늘 인생들의 자화상입니다. 이들을 소생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복음뿐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정확하게 전해야 됩니다. 복음 외에 다른 조작 물을 가지고 복음의 진의를 흐리게 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우리는 지금 한국교회를 어지럽히는 소위 복음주의를 경계해야만 합니다.

①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는 개인적 교회적 분리주의를 취합니다.
② 보수주의적 복음주의는 협동적 복음주의와 모든 복음주의 단체를 포용하고 광범위한 신학적 바탕을 취합니다.
③ 무교파적 복음주의는 교회일치주의와 신약적 기독교의 회복을 취합니다.
그 외에도 재세례파 복음주의, 세대주의적 복음주의, 웨슬리파 복음주의, 성결파 복음주의, 오순절파 복음주의, 전통적 복음주의, 급진적 복음주의, 성령은사파 복음주의, 흑인 복음주의 등 다양한 복음주의가 있습니다.
개혁주의는 곧 칼빈주의는 계약신학과 해석학을 바탕으로 하는 계시의존사색과 하나님 절대주권주의를 취합니다. 개혁주의는 구원받은 데서 머물지 않고 구원받은 자의 윤리적 행위를 엄격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중세교회는 국가 위에 교회가 군림했습니다. 그래서 국왕은 교황의 명령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국가와 교회라고 하는 두 기관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국가와 교회는 엄격하게 분리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국가는 국가대로 교회는 교회대로의 고유한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양심은 교회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교회를 보호함과 동시에 교회에 정보를 제공해야 하고 교회는 국가가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거침이 없는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교회의 활동이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혀서는 안 됩니다. 교회밖에 있는 국민복지 사업은 교회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의 몫입니다. 교회는 국가가 모든 일을 부정 없이 잘하도록 권면하고 일깨워주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국방, 외교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국가를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정확한 뜻을 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국가가 정한 법률에 의해 적용 받아야 될 것은 솔선수범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흔쾌히 사회적일 때는 이미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핍박받는 단체라는 명제는 성경적 명제인 동시에 주님 오시는 날까지 변함없는 명제입니다.
교회가 자의로 사회복지에 관계한다든지 자의로 도시환경 미화에 개입하는 것은 국가 공무원들을 무시하는 일인 동시에 국가에 대한 작으나마 월권입니다. 초법일 때는 어떤 경우에든지 선(善)이 아닙니다. 교회와 정부가 국민들 앞에 저급한 목적을 가지고 선(善) 게임이나 대중들 앞에 인기게임을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대사회적 봉사에 엄격하고 분별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무해야만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수단으로서 사회적 봉사나 공무원들의 공무집행에 물질로 편의를 제공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복음 전하는 일 외에는 헌금사용을 엄격하게 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의 모든 일은 정부가 할 일입니다. 지역구에 돈이 없으면 중앙정부에 돈을 풀어서라도 해야 됩니다. 같은 서울에 살면서 자기 지역만 잘 되면 된다는 이른바 집단이기주의적 생각은 민주시민이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작금에 일어나는 정치인들의 불법으로 운영되는 수백억의 정치자금을 보노라면 국가가 이런 일을 하고도 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복음 전하는 일만해도 돈이 모자랍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전도의 수단으로 베푸는 일을 미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제 국가적 이데올로기가 성숙되지 못한 미개국이 아닙니다. 각 분야에 규범이 입법화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연말을 맞이하여 국가가 교회에 기대를 하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이나 기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단체에 구제 차원의 봉사는 반드시 해당관청과 의논해서 가야 합니다. 교회나 사회단체에서 도와주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국가가 하고 있는 한 정작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만 피해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도움을 주는 단체는 항구적이지 못하고 형편이 되면 하고 형편이 안 될 때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사회단체의 도움이 없어도 도움을 받아야 될 자들이 도움을 받도록 해야만 합니다. 특히 한국 교회는 전도니 구제니 하는 미명아래 세상에 인본주의적 의로움을 들어내기를 경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가 무슨 구제를 할 때는 마태복음 6장 1-4절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한 말씀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교회가 구제는 할 수 있는 한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은밀하게 해야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작은 교회, 많이 모이지 아니하는 교회는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역사까지도 열등하게 생각하는 세인들의 가치관의 허무한 명제를 따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앞서간 지도자들은 교인들이 많고 적음이나 건물의 크고 작은 것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지 아니했습니다. 교회 부흥은 때가 될 때 오히려 그 후배들이 더 크게 부흥시키는 것을 저와 여러분은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간적인 연약으로 인한 실수도 하나님 앞에서는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어떤 신앙을 계승하고 갔느냐, 그 목사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다가 갔느냐가 중요합니다.
과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이 되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우리의 이웃입니다.

- 아 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