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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면류관 / 살전 2: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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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전서 2:17-20
우리의 면류관

오늘 본문은 짧은 말씀이지만 우리 기독교 신앙의 종말 사상을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되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각자의 행 한대로 상급과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여기 면류관이란 승리한 사람의 머리에 씌워주는 일종의 모자입니다. 상급, 영광, 자랑, 기쁨 등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받게 될 면류관은 특별한 것일 것 같습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에 그가 누리던 이 세상의 면류관을 쓰레기처럼 다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달려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바울의 면류관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그가 싸운 선한 싸움을 싸우며 그가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달려가는 오늘 우리들의 면류관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면류관은 첫째로 하나님이 주신 자녀들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믿음으로 자라나고 있는 우리 자녀들이 곧 가정의 면류관이요, 우리의 면류관입니다.

옛날 로마의 귀부인들은 서로 집을 방문하며 그 가정에 비장하고 있는 보물을 감상하고, 자기들이 지닌 보물을 자랑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코르네지아의 집에 모여 최근에 구입한 패물을 각기 경쟁이나 하듯 자랑하던 귀부인들이, 이 코르네지아의 집에 비장된 보물과 패물을 보여 달라고 졸랐습니다. 쾌히 승낙한 이 집의 여주인은 잠시 후 어린 아들과 딸의 손을 잡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정의 보물은 바로 이 아이들입니다.”

얼마나 귀한 말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더 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우리 가정의 보이지 않는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이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가 곧 우리의 면류관입니다.

잠언서 17장 6절에 보면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또 시편 127편 3절 말씀에는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가 주신 상급”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6장 7절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하나님의 법도를 자녀에게 가르치되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강론하고, 에베소서 6장의 말씀처럼 그 자녀들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총애를 받을 수 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부모들은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보다 더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그들로 인하여 우리 인류와 사회가 복을 받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자녀는 문제아로 내버려 둔 채 패물 따위나 몸에 달고 다니며 대단한 신분이나 되는 듯이 의기양양하여 자랑하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바람직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할 수 있을 때 그 자녀는 부모의 면류관이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을 마친다면 반드시 낙심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녀가 없거나, 있어도 참으로 자녀로 인하여 큰 고통을 당하는 분들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망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나로 인하여 예수 믿고 구원받은,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의 면류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미혼자이었기 때문에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로 인하여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전도의 열매는 참으로 많았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전도의 열매를 가리켜 자기의 면류관이라고 오늘 본문 1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4장 1절에서도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없는 분들은 그것을 안타까워 할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힘써 전도하여 열매를 맺도록 할 일입니다. 또 자녀는 있지만 그 자녀가 문제아일 경우도 그 때문에 낙망하지 말고 잘 이끌도록 하면서 믿음의 자녀들을 많이 얻도록 복음 전도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 생전에도 우리의 기쁨과 자랑이 될 것이며, 후일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영원한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디모데 전서 2장 4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최대의 소원은 곧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는 것임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디모데 후서 4장 2절 말씀처럼, 우리의 최대의 과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하기를 힘쓰는 것과, 모든 족속으로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일에 주력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이 책망하신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천국 문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또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두루 노력은 하지만 얻으면 자기보다 배나 더 악한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이들 또한 없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베다니의 나사로는 자신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했습니다. 나 하나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분들이 우리 기독교 역사상에는 무수히 많습니다.

오늘날 나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누구누구입니까? 몇 사람이나 됩니까? 우리 한 번 헤아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이 곧 우리들의 면류관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실망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전도는 힘써 했지만, 아직까지 전도의 열매라고 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실망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또 하나의 면류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면류관은 곧 하나님 자신입니다.

중세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꿈속에서 주의 사자나 나타나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여, 주께서 너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니 너의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인가?” 물었을 때 아퀴나스는 서슴없이 “주여, 저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소원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참 열심 있는 교회라고 자타가 인정합니다. 예배에도 열심, 기도에도 열심, 헌금 생활에도 열심, 전도에도 열심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교회가 아퀴나스의 대답을 하기에는 좀 먼 거리에 있지는 않은가 여겨집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복 내려 주시옵소서,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간구하지만, 하나님 자신이 바로 우리에게 복이요 상급임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속한 다른 그 무엇을 찾고 간구할 때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창세기 15장 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산업이요 나의 잔의 소득이십니다”라고 시편 16편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교를 위한 제단에 자신을 번제물처럼 온전히 바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보상은 무엇입니까? 가난과 질병, 멸시와 천대, 핍박과 환난으로 만물의 찌꺼기처럼 취급되었고, 말년의 현주소는 바로 로마 감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항상 기뻐하고 기도를 쉬지 않으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옥중의 생활이었습니다. 또 감옥 밖에 있는 신앙인들도 그렇게 살기를 바란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에게 있어서 최상의 복과 상급과 면류관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현대를 사는 오늘 우리 신앙인들은 혹시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며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고, 너무 많은 것을 누리려고 하기 때문에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하는 찬송의 참 뜻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풍요 속에서도 빈궁하며, 부유함 속에서도 불만족스럽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릅니다.

자, 과연 나의 면류관은 과연 무엇입니까? 무엇이 나의 기쁨이며, 자랑이며, 소망입니까? 우리 한 번 돌이켜 볼 일입니다. 성경 말씀처럼 나의 자녀들이 나의 면류관이며, 나의 전도의 열매가 나의 면류관이며, 하나님 자신이 나의 면류관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이 진리의 길, 축복의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일행은 지난주일 중국 조병산 공인가 교회 헌당예배를 드리고 왔습니다. 참으로 이 교회는 창립 30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의 면류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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