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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수함의 영적 덕성을 유지하십시오 (행 6:8-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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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함의 영적 덕성을 유지하십시오
myhome.naver.com/chapelainkhj 천안외대 김홍진 목사
사도행전 6:8-7:60

  교단 이름 중에 '순복음'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순수한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참 좋은 말입니다. 다른 것이 조금도 섞임이 없는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순수합니다. 순수함은 매우 이미지가 상쾌합니다. '순수한 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욕심이 전혀 섞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순수함' 이 말은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순수(純粹)함이란 다른 것이 조금도 섞임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순수하다는 말을 듣고 살고 계시나요? '순수함'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수업 시간에 물었더니 학생이 그래요. '음탕함'이라고. 처음에는 그 사람이 참 순수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순수한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을 듣곤 합니다. 순수함 이것은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는 모든 욕심과 위선과 가식과 더러운 껍데기를 벗어버린 있는 본래의 깨끗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순수한 청년을 보면 참 산뜻하지 않습니까? 왠지 매력을 느끼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고리 따분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사람이 순수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순수함은 감추어진 영적인 덕성이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믿음'이라고 하면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믿음을 말합니다. 정말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살수는 없을까요?

  여러분 성경에서 순수한 사람을 찾는다면 누구를 지명할 수 있습니까? 물론 믿음의 순수함을 지킨 사람이 한 두 명입니까? 신앙의 위인 중에 순수함을 지닌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저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순수한 영적 덕성을 지니고 그 순수함을 마지막까지 잃지 않고 산 사람이 누군가 생각하다가 문뜩 스데반이 생각났습니다. 스데반, 어떠세요? 여러분은 이 스데반의 이름이 순수한 이미지를 떠올려 줍니까? 누군지 감감합니까? 성경 좀 읽어요. "스데반? 설교하다가 돌로 맞아 죽은 사람 아녀?" "맞습니다. 맞고요." 그런데 스데반에게서 그 순수한 영적 덕성을 찾지 못하면 그 사람은 정말 순수함을 상실한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스데반의 모습이 보여준 순수한 영적 덕성은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찾아가 보겠습니다. 자, 순수한 영적 덕성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첫째, 순수함의 영적 덕성은 정직함입니다.
  순수함이란 정직과 진실이라는 말의 함축된 의미입니다. 순수한 사람의 모습은 이 정직과 진실이 베여 있습니다. 정직과 진실이 없이 순수함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에게는 이 정직과 진실을 겸비한 순수한 영적인 덕성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고 곧 바로 초대교회시대입니다. 이 때는 12사도들과 성도들이 전도하기에 열심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성도들을 인도하기에는 손길이 모자라 집사를 세웠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스데반입니다. 8절에 보면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게 행하는 집사였습니다. 당시 회당에서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능력을 행사하니 종교지도자들이 거짓증인들을 세워 스데반을 모략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거짓증인들을 통하여 이 사람이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거슬려 말한다고 거짓 증거 합니다. 이 때 대제사장이 7장 1절에 스데반에게 묻습니다.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심문합니다. 이 대답을 2절부터 53절까지 합니다. 정직과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순수한 영적인 덕성의 특징은 오직 진실할 뿐입니다. 순수한 사람들은 정직과 진실에 깊은 관심을 가집니다. 순수함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에 순수한 영적이 덕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정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순수함은 정직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영적인 덕성으로서 순수함을 가지기 위해서는 진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정직입니다. 진실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은 거짓이며 부정직입니다. 이 것은 삶에서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영적인 덕목입니다. 그러나 싶지 않지요?

  우리가 학교를 다니지 않습니까?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데 학생 때면 누구나 컨닝에 대해서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정직한 A학점보다 정지간 C학점이 낳습니다. 컨닝은 창피한 것 아닙니까? 아멘도 안 하네.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한 학생이 말하기를 교수님, 창피는 잠깐이지만 학점은 영원합니다. 그래요.

  순수함, 이 정직이라는 영적 덕성을 가지기가 싶습니까? 쉬우면 누구나 다 성자가 될 수 있겠지요. 힘들기 때문에 순수함이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 중에 이런 위대한 순수한 영적 덕성을 지닌 분이 있습니다. 폴리갑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은 훌륭한 순교자입니다. "폴리갑을 잡아라"라고 외치는 군중들의 폭동을 진압한 시장은 폴리갑을 구출하기 위하여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86년간 나는 그리스도를 섬겼으나 한 번도 그리스도는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어찌 나를 구원한 그리스도를 욕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폴리갑은 화형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꺼지는 불로 나를 태워 죽이려고 하지만 영원히 까지지 않는 지옥 불을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그리고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이 종을 순교자의 반열에 넣어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이 어려운 잔을 능히 마실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순교자란 이처럼 한 마디의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죽은 사람을 말합니다. 스데반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순수한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직함은 필수입니다. 정직 그 자체가 바로 위대한 영성입니다. 순수함을 유지하는 길은 정직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정직 이것은 크리스찬의 무기입니다. 거짓과 위선은 영성을 파괴하는 사단의 도구입니다. 순수함의 영성을 유지하기를 원하십니까? 정직을 사명으로 삼으십시오. 순수함의 영성을 유지할 것입니다.

  둘째, 순수함의 영적 덕성은 투명함입니다.

  순수한 영적인 덕성의 모습은 투명함입니다. 투명하다는 것은 '속과 겉이 같다'는 말입니다. 투명함은 속이 다 보입니다. 꾸밈도 없습니다. 가식도 없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순수함의 모습입니다. 순수한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투명해야합니다. 투명하다는 말은 진실하다는 말입니다. 그의 삶의 솔직하다는 말입니다. 투명함은 진실 그 자체를 가지고 사는 모습입니다. 진실, 정직, 투명, 솔직 이것은 순수함의 덕목입니다.

  스데반은 순수함 그 자체였습니다. 대제사장이 심문을 합니다. 이 때 스데반은 참 요령도 없습니다. 꾀도 없습니다. 사실을 그대로를 이야기할 뿐입니다. 오직 성경 말씀대로 설교를 할 뿐입니다. 논쟁도 하지 않습니다. 변론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의 말씀을 선포할 뿐입니다. 순수함을 유지하는 길은 투명함입니다.

  투명함은 영적 덕성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삶에 필요한 중요한 삶의 도리입니다. 그러나 투명함이 없기에 삶에 어둠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단체나 정부나 공동체나 교회나 덕성의 기준이 투명성이라는 것입니다. 투명성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베이직입니다.

『CEO가 되는 길』이라고 하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 중에 이런 감동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General electric, 아주 유명한 미국의 큰 회사에 회장 되는 분입니다. 현재 회장으로 있는 잭 웰치 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런 자신이 박사요, 학자요, 그리고 또 이렇게 사업을 잘 경영해서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CEO가 된 그런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의 말속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내가 된 것은" 하고 제일 그 분이 강조하는 것은 투명성입니다. 진실과 투명, 그것으로 오늘의 회사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분 아닙니까? 마태복음 27장 11절에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빌라도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십니다. 더 이상 빼지도 더하지도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선포가 투명성입니다. 거짓도 위선도 가식도 없습니다. 내 모습 그대로 내어놓는 것입니다.

  왜 투명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사람들을 완전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게 판단하십니다. 우리가 투명해야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투명하게 살 수 있습니까? 사람들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살 때 우리는 투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위선도 가식도 포장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그대로 표출할 뿐입니다. 투명함은 속보이는 것이 아니라 속을 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수함의 영성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투명하십니까? 그렇다면 순수함을 얻을 것입니다. 투명한 그 자체가 바로 순수함입니다. 조금 더 투명해 보십시오. 더 이상 투명할 것이 없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순수함을 걷는 것입니다. 투명하여 순수함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이곳이 가장 높은 차원의 영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영성을 유지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투명함으로 순수한 영적 덕성을 유지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순수함의 영적 덕성은 단순함입니다.

  순수한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단순하면 순수한 영적 덕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단순함이란 더 이상 계산하지 않고 현실의 문제를 그대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단순함이란 복잡하지 않고 간단함을 말합니다. 단순함에는 잡것이 섞이지 않고 홑짐의 상태입니다. 단순함에는 꾸밈이 없는 모습입니다.

  단순함은 혹 밋밋할 수도 있고, 상황파악이 늦게 보일 수도 있고, 사려가 깊지 않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함은 순수하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단순한 사람은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매우 올곧고 매끈합니다. 그러기에 단순함은 영적인 삶에 놀라운 능력을 가져옵니다. 복잡하다는 것은 생각이 분열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단순함은 한 가지에 전념하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단순함, 이것은 영적인 능력의 기초입니다. 순수함의 영적인 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단순함은 필수적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스데반은 매우 단순합니다. 스데반의 너무나 단순한 모습에 깨끗함까지 느낍니다. 스데반은 오직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전하는 말씀 때문에 곧 맞아 죽을 상황입니다. 그래도 단순한 모습을 보십시오. 본문 54-56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그럽니다. 

  이 말 때문에 증인들을 세워 놓고 죽이려고 하는데 스데반은 오히려 덧붙여 말합니다. 56절에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라고 말합니다. 조금 상황을 잘 파악했더라면 이 말을 안 하면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그 상황을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단순합니다. 그저 느끼는 데로 보이는 데로 선포합니다. 단순하면 이렇습니다. 더 이상을 생각지 않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만 집중합니다.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변론도 없습니다. 그저 복음을 증거 합니다. 이것이 순수한 영적 덕성의 모습입니다.

  기독교 영성의 대가인 리차드 포스터는 『단순성의 기독교』(보이스사, 210p)라는 책에서 17세기 캄블라이 대주교인 프랑솨스 페넬론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의 순수성을 갖게 되면 남들이 우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 때문에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남이 우리를 좋아하도록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성공에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명예만큼이나 또한 알려지지 않음도 즐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순수함의 영적 덕성을 가진 사람은 단순합니다. 단순한 사람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Simplify, 단순하게 할 때 거기서 순수한 영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단순함이란 트릭이 없다는 것입니다. 위선이나 가식으로 꾸미지 않습니다. 속에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사람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봐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줍니다. 이 단순함은 사람들 앞에서 뿐 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있어야할 영적인 덕성입니다. 

  알렉산더 왕에게 아주 충성스러운 의사가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의사를 시기해서 어떻게 해서든 그 의사를 곤경에 빠뜨리고자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왕이 마시는 컵에 그 의사가 독약을 넣을 것이라는 거짓 편지를 써서 왕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은 왕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 편지를 읽어주면서 자신이 의사를 믿고 있다는 표시로 컵에 들어 있는 물을 단숨에 마셨습니다. 의사에 대한 알렉산더 왕의 믿음은 순수하고 전폭적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도 이러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믿음은 힘을 발휘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단순하십시오. 이것이 능력입니다. 복잡한 세상일수록 단순하십시오. 그것이 경쟁력입니다. 복잡한 사람 관계일수록 단순하십시오. 그것이 생존력입니다. 단순하십시오. 이것이 삶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해지십시오. 일부러 단순해지십시오. 하나님 앞에 어수룩하게 보일지라도 단순해지십시오. 그분을 그대로 믿으십시오. 더 이상 의심의 상상력 속에서 복잡해지지 마십시오. 단순함 이것이 바로 영적인 능력이며 영적이 덕성입니다. 단순함으로 순수한 영적인 삶을 유지하지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순수함의 영적 덕성을 유지하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순수함의 영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인기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순수함의 영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스데반처럼 순교적인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사람의 몸은 죽일 수 있지만 그 순수함은 파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순수함의 위대성입니다. 이 위대한 순수함의 영적 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 순수함을 잃어가고 있습니까? 시대가 복잡해질수록 순수함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해타산으로 묶여 버린 세상 속에서 순수함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가하는 인간 저울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순수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숫자로 평가하는 세상의 평가에 묶여서 순수함을 상실했습니다.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외식의 옷을 입으면서 순수함을 상실했습니다. 욕망의 탈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외식의 쇠사슬을 채웁니다. 그러면서 우리 삶에는 순수함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순수함의 영적인 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 순수함으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원하고 세상의 사람들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순수한 영적인 덕성을 간직한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누구의 눈치를 보느라 구차하게 살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이것이 순수함의 축복 아닙니까? 순수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 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완전하지 않다고 해서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사람들이 편안해 합니다. 이기심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사람은 숨막힐 정도로 자기 자신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구애받지도 않습니다. 순수함의 영적 덕성을 가지고 살면 머리가 아프지 않습니다. 복잡한 삶에 인생이 찌들지 않습니다. 여유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기 위해서 분주하지도 않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앞에서 정직하게 그리고 투명하고 단순하게 살기 위해 애쓸 뿐입니다. 이 순수함의 영성을 회복하십시오. 그리고 이 순수함의 영적 덕성을 끊임없이 유지하십시오. 이 삶이 오직 아름다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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