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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슬픈 잔치, 분노의 잔치 / 눅 15: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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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슬픈 잔치, 분노의 잔치
본문 : 누가복음 15:25-32


  지난주에 재미있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평생 살아가면서 어떤 잔치를 주로 맞이하는가. 인터넷을 뒤져봤더니 다양한 잔치 종류가 있었습니다. 백일잔치, 돌잔치, 회갑잔치, 칠순 잔치 등 연령에 따른 잔치가 있습니다. 노래잔치, 춤 잔치, 꿈 잔치, 재롱잔치, 밥상잔치, 면접잔치, 부모초청잔치, 경로위안잔치, 술잔치, 직급잔치, 경품잔치, 꽃 잔치, 치아사랑큰잔치, 결혼잔치, 학급마무리잔치 등 행사의 성격을 표현하는 잔치도 있었습니다. 말 잔치, 돈 잔치, 빚잔치, 부자들의 잔치, 투기잔치 등 시사성을 띤 표현도 있었습니다. 그 중 약간의 조롱과 외면하고 싶은 모습을 표현한 잔치가 있는데, 바로 ‘그들만의 잔치’입니다.

이렇듯 잔치 종류가 참 많고도 다양합니다. 우리를 즐겁게 하기 위한 잔치는 이토록 많은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는 분노할 일과 슬픈 일들이 왜 이렇게 많습니까. 잔칫집 다니며 즐거워해야 할 인생에 즐거움 보다는 고난과 어려움, 슬픔과 눈물, 탄식의 시간이 많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소개해 드리려는 한 잔치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어떤 가정에 아들 둘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작은 아들은 그 가정에 어려움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달라하여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나버렸습니다. 아들이 떠난 후 아버지 마음은 온통 아들에게로 향해 있었습니다. 아들이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그러던 어느 날 비록 가져갔던 재물은 다 썼지만 아들이 건강하게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아버지는 ‘죽었다 다시 살아난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때 밭에서 돌아오던 큰 아들이 잔치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그 내용을 알고 난 다음에는 몹시 분노합니다. 아버지가 이 소식을 듣고 나와서 큰아들을 달랩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오히려 아버지께 항의하면서 잔치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베풀었고 동생이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장남이자 형은 분노하여 참여치 않은 슬픔의 잔치가 되었다면, 큰 아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같은 한 가족이면서도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없었다면 이 잔치는 무엇인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지난 부활절 이후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한 영혼을 품고 오랜 시간 잔치 준비를 했습니다. 1,585명이 4,251명의 영혼을 위해서 그 동안 기도해왔습니다. 정작, 잔치가 있었던 지난주에는 새 가족이 273명 참석했습니다. 그 중에서 172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귀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형제는 예배 후 인사하기 위해 뒤에 서있는 제게 와서 그날 나눠드린 책을 들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있었어요.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었어요. 오늘 메시지는 저를 위한 것이었어요. 다시 시작할게요.” 이렇게 말끝을 흐리는 그 눈에 어려오는 눈물을 저는 볼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되찾고, 무너진 자신의 내면 세계를 회복하고, 상실했던 인생 길을 발견하는 놀라운 감격의 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기쁨을 주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큰아들처럼 ‘그들만의 잔치’로 지나갔을지 모릅니다. 큰아들이 잔치의 즐거움에 기쁨으로 참여하지 못한 이유가 어쩌면 이 시대에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우리 가운데 같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즐거워해야 할 마땅한 잔치를 슬픔과 분노로 혹은 무관심으로 지나친 바로 그 이유가 내 안에 있었다고 인정하신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 잔치에로 여러분을 다시금 초청합니다. 기쁜 잔치에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큰아들이 아버지가 베푼 잔치임에도 불구하고 분노하고 서운하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큰아들은 아버지와 관심이 달랐습니다. 25절 말씀, 맏아들이 밭에서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집안에서 나오는 흥겨운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한 종을 불러서 무슨 일로 집안에 잔치가 벌어지는지 자초지종을 캐물었습니다. ‘물은 되’ 라는 표현은 ‘누가’ 만이 쓰는 독특한 표현으로 사도행전에 7번 정도 나옵니다. 이 표현은 지속적이고 꼼꼼하며 확실하게 계속해서 묻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종을 불러서 무엇 때문에 잔치가 벌어지느냐, 잔치의 규모가 어떻게 되느냐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난 후에 아들은 분노하여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나와 권면합니다. 32절 말씀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그러나 오히려 항의하면서 잔치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어떤 주석 학자들은 여기 ‘마땅하다’는 단어 앞에는 반드시 ‘네가’ 라는 단어를 첨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네가’ 이 잔치에 진정 기뻐하고 즐거워야 할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관심은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의 관심은 밭에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관심이 생명에 있었다면 맏아들의 관심은 밭의 소출인 물질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며,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얼마를 생산해 낼 수 있으며, 어떤 영향력이 있는가?’ 아버지의 관심이 건강하게 돌아온 아들에게 있었다면 맏아들의 관심은 둘째 아들의 허물에 있었습니다. ‘저 녀석이 와서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다시 돌아왔는가, 저 녀석은 아버지의 재물을 창기와 함께 써버린 자식이 아닌가.’ 그리고 맏아들이 동생의 과거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면, 아버지의 관심은 이제 모든 것을 극복하고 돌아온 아들의 미래에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큰아들의 말 속에 ‘내가’, ‘내 친구와’, ‘나’라는 단어가 짧은 문장 속에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가 보기에 좋아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합당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큰 아들의 관심은 ‘나’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관심은 아들에게 있었습니다. 둘 중에서도 어떤 아들에게 있었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하고 아버지의 위로가 필요하고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한 그 아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관심사가 다를 때에 어떤 일을 보는 기준이 다르게 되고 따라서 기쁨과 분노의 기준도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꾼이라고 할 때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이 있는 그곳에 우리 눈길과 손길과 발길이 닿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관심으로 나타나는 우리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8절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그대로 그냥 두면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 마음이 내 마음에 머무는 것을 싫어합니다. 내 좋은 것, 내가 보기에 옳은 것을 봅니다. 쉽게 말하자면 맏아들이 가졌던 관심, 그 사람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하는 것들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허물, 죄가 무엇인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적인 마음입니다.

여러분, 지난주 새가족 초청의 날에 우리 관심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자기자신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질문으로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 잔치 기간 중에 우리 마음은 큰아들처럼 내 일과 내 목표, 내 기준의 밭에 관심이 머물러 있지는 않았습니까? 아니면 아버지 집을 다시 찾은 사람들에게 있었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초청의 말을 들으면서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방황했던 둘째 아들이 지나간 날을 청산하고 아버지 집에 돌아와 ‘아버지, 제가 돌아왔습니다.’ 할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들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 저 사람이 아버지 앞에 돌아왔습니다. 저 사람에게 새 삶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의미가 필요합니다. 저이를 도와주십시오. 인생의 길을 잃지 않도록 주님 도와주십시오.”하는 간절한 마음이 일지 않았다면, 오늘 내 관심은 아버지와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달랐다면, 지난 주 잔치는 여러분에게 ‘그들만의 잔치’로 끝났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잔치가 왜 중요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왜냐하면 아버지의 그 마음이 또한 나를 살렸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행위와 죄와 허물을 따라 나를 보셨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를 떠나 인생의 길에서 방황할 때 아들이 아버지 집을 생각해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를 반역하여 그 가슴에 못 박았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용기를 주고 미래를 생각해준 아버지의 관심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도 그와 같습니다. 아버지의 집의 따스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 때문에 내 인생을 새로이 찾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이 마음이 없었더라면 주님의 관심이 없었더라면, 만약에 아버지가 큰 아들과 같은 관점으로 생각했더라면 저와 여러분이 구원 받은 백성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나를 살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빌립보서 2장 1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권면합니다. 이 마음이 나를 살렸습니다. 이 마음이 내 가정을 살립니다. 우리 민족을 살립니다. 교회를 살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 하나님의 관심이 있는 곳에 내 손길과 발길과 눈길이 머물 때에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감격이 우리 감격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올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만의 잔치로 무관심하게 보냈다면 여러분을 살리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외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금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관심을 다시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에 잔치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로 맏아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할 잔치에 분노한 이유는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큰 아들이 참으로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29절, 맏아들이 화를 내며 아버지에게 항의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한일이 없더니’ 여기서 ‘섬겨’ 라는 단어는 종이 주인을 섬길 때 쓰는 말입니다. 계약을 맺은 직원이 사장을 섬길 때 쓰는 단어입니다. 지금까지 아버지를 섬겼다는 것은 아버지로서 편안하게 즐겁게 진심을 다해 섬긴 것이 아니라, 계약대로 종으로서 율법을 따라 아버지의 명령을 지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8절에 ‘노하여’ 라고 번역된 단어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다’ 에서 왔습니다. 일시적인 분노에서 온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쌓인 깊은 노여움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이유가 누가복음 11장 1절, 2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시에 창기나 세리, 죄인들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가 그들을 죄인으로 보고 상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희망이 생깁니다. 가치 없던 존재가 새로운 가치를 부여 받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존귀한 백성이라는 마음이 생기니까 살맛이 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세리와 창녀 그리고 죄수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때 2절 말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님이 죄인과 함께 지낸다고 비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첫째 이야기는 99마리의 양과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의 마음에 대한 것입니다. 둘째는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오늘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잃어버린 탕자를 찾는 아버지의 마음을 말씀해주십니다. 세 이야기는 모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맏아들은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종교적으로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씩 금식합니다.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합니다. 구제 했습니다. 거룩하게 정결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이 정말로 알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시키는 것을 잘 지키고 감당하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정말로 바란 것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나간 후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어디서 고생하는지 고민하고 찾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네가 얘야, 밭에 나가서 일하는 것도 좋아. 중요하단 말이야. 하지만 지금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오면 안되겠니? 내가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내 마음이 몹시 괴롭구나.”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고 싶었던 명령이 아니었겠습니까. 또 하나,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동생이 돌아왔구나. 둘째가 마음을 잡고 집안에서 잘 성장하고 자기 삶을 가꿔갈 수 있도록 네가 좀 사랑해 주지 않겠니?” 하는 명령이 아니었을까요? 큰아들은 아버지 명령을 지키기는 지켰는데, 정말 지켜야 될 명령은 무시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랍비여. 하나님의 계명 중에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고 기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 너희들이 장로하는 것도 중요하다. 목사하는 것도 중요하다. 성가대하는 것도 중요하다. 교사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 중요하다. 그러나 내 마음을 좀 알아주겠니? 나를 떠나서 방황하는 저들을 기다리는 내 마음을 알아주겠니?”

“주님 나 성가대원하기 때문에 못 갑니다. 설교준비하기 때문에 안됩니다. 예배 안내 봐야 하기 때문에 못 갑니다. 하나님, 나는 집사이기 때문에, 장로이기 때문에, 권사기 때문에 이 직분 감당하기 위해서 못 갑니다.” 라고 한다면 우리는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날 여러분들이 했던 많은 일들이 어디에 초점이 있었는지, 무슨 명령에 순종하고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우선되는 명령이 무엇이었을까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은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잘 지킨 것 때문에 본질과 핵심을 놓쳤습니다. 사랑과 영혼을 구하는 전도에 대한 초점을 놓쳐버렸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두 가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는 각자에게 주신 다양한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는 비유라면, 모든 종들에게 똑같이 나눠준 열므나는 어느 상황,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사명을 가르쳐주는 비유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탕자를 하나님 품으로 불러들이는 일입니다. 그들을 초청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돌아온 탕자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여기에 직분과 직책이 필요합니까? 유교적 관습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자리가 주어져야 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전도하는 것에 자리가 필요합니까? 사랑하는 일에 자리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명령하신 일을 순종하기 위해서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고 헌신입니다. 이 기쁨에 참여 할 수 없었던 큰 아들은 아버지의 진정한 명령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본질과 핵심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큰아들과 같지 않다고 누군들 확신하게 말하겠습니까?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명령은 무엇입니까? 다시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이 명령을 회복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없습니다.

셋째로 큰아들이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한 이유는 맏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0절 ‘아버지의 재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라며 아버지께 항의합니다. 29절 자신은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지만 염소 새끼 한 마리 준 것이 없었다고 비교합니다. 비교하는 큰아들의 마음속에 있는 삶의 기준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이 행위에 근거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행위에 그 사랑이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너는 나의 법적인 상속자가 아니겠느냐. 내 모든 것이 네 것이 아니겠느냐. 내 것이 네 것이고,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어 즐거움을 준 아들이란다.” 그리고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간 아들에 대해 비난하는 말 대신 “저는 내 죽었다 살아난 아들이요, 잃었다 다시 얻은 내 아들이다” 라는 인정의 말을 해줍니다. 두 아들의 삶의 형태는 다르지만, 하나님이 피 값을 주고 사신 당신의 자녀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기준을 가지고 우리를 보셨다면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준은 어떻습니까? 네 마음속에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하는 것이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것이니라. 그리고 이 계명 중에 하나라도 어기면 모든 계명을 어기는 것이니라. 이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죄의 대표성입니다. 이러한 기준을 적용한다면 이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살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행위를 따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입니다.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사랑하셨다 말씀하십니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자기의 의를 가지고 동생을 비난하며 받아들이지 않는 맏아들에 대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맏아들에게, “그래, 내 아들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 그러나 내 아들이 바로 네 동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느냐. 네가 조롱하고 경멸하는 동생이 내가 그토록 기다리고 바랬던, 나에게는 너와 똑같은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께서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어떤 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와 허물을 보지 않고 자비와 긍휼로 조건 없이 사랑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가 사람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마가복음 6장의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가르쳐주십니다.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다녀와서 몹시 피곤했습니다. 지쳐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쉬라 말씀하십니다. 배를 타고 가는데 도착할 장소를 보니 사람들이 이미 많이 와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내장이 끊어질듯한 아픔을 가지셨습니다. 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육의 양식으로 먹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이 사람들을 이렇게 대한 것처럼 너희도 이 사람들을 사랑하라. 쉬는데 방해되는 존재, 우리의 능력밖에 있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섬기고 사랑하라.’ 하십니다. 한 영혼을 바로 볼 줄 아는 눈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경멸하고 조롱하고 미워하고 인정치 않던 사람이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그토록 찾으시던 둘째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한 형제 자매 되었음을 조금이라도 의식하고 있다면 그들을 향해 사랑의 언어 사랑의 손길을 내어주지 않겠습니까?

길을 가다 보면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며 모여있을 때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기웃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람을 함께 비난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당신의 형제였다고 가정해봅시다. 당신은 군중을 헤집고 들어가 사람들 앞에 서서 이 사람을 변명해주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형제의식입니다.

우리는 필요이상으로 너무나 많은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저 사람은 많이 배운 사람이다 못 배운 사람이다, 저 사람은 경상도 사람이다 전라도 사람이다, 저 사람은 진보주의자다 보수주의자다, 저 사람 가진 자다 없는 자다, 저 사람은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이다 아니다 등 수없이 많은 선을 긋고 나누며 삽니다. 가정의 어려움을 겪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원치 아니하게 이혼한 사람도 있고, 사별한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들을 어떻게 봅니까? 그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이 간절히 필요한, 갈급한 영혼임을 조금이나마 깨닫는다면 그렇게 쉽게 대할 수 있습니까? 가진 것이 없다고 무시할 수 있습니까? 매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별볼일 없는 것처럼 여길지 모릅니다만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그토록 찾던 둘째 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전통 있는 교회라 오래 다닌 분도 있으시고 최근에 나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래 다닌 분들이 최근에 온 분들의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상처를 받고 이 교회 저 교회를 방황하다가 치유와 말씀과 회복이 있는 교회를 찾다 우리교회에 장착했다면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Touch 153’ 잔치가 이제 막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의미 있었던 잔치라도 시간이 지나면 끝이 납니다. 파장을 하고 나면 분위기도 가라 앉습니다. 우리를 즐겁게 했던 것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끝난 잔치를 더 이상 화제거리로 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잔치는 중단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어야 할 잔치입니다. 아버지께서 그토록 기다리시던 둘째 아들이 돌아오고 있는 한, 아버지께서 그 마음속에 둘째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시는 한 중단될 수 없습니다. 이 잔치는 그들만의 잔치가 아닌 내 잔치요, 하나님의 잔치요, 우리 모두의 기쁜 잔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답해보십시오.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습니까? 과거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처럼 도움과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미래와 희망에 관심을 가지고 보십니까? 묻겠습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올 때 첫째 아들이 밭에 있었던 것과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밭에 있지는 않았습니까? 주님 앞에서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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