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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밀알의 신비 / 요 12: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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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의 신비 / 요 12:17~26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겉으로 보기에 초라하지만, 영적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적어도 세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죽으러 가시는 것입니다. 자칫 예루살렘 입성이 승리의 개선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시는 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예언의 응답인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 온 인류의 구원자로 세우시겠다는 예언의 응답이었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유월절의 어린양이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모든 기적들과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다가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에 반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인파들도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을 세 분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사로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어떤 사건에 대해 목격자의 증언은 큰 효력을 가집니다. 나사로가 부활한 현장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라며 끊임없이 증언했습니다.
목격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건을 전도하게 됩니다. 타인을 통해 간접으로 전해들은 사람들은 별로 전도의 열정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경험하고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사실에 대해 자주 언급하게 됩니다. 버스에 타서도 옆 사람들에게 꼭 한 마디를 던지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나사로의 부활에 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18절 말씀을 봅니다.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 굉장하고 충격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그런 소식을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떤 교회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났대. 근데 살아난 사람이 그 교회의 새벽기도회에 나오고 예배에도 참석한대’. 그 소식을 듣고 우리는 ‘그런가 보다’라는 식으로 반응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디 한번 가서 보자,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복음은 ‘착하게 살자, 의롭게 살자, 믿음 없는 것보다 믿음 있는 것이 낫다’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이 충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순교를 각오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헬라인 몇 명이 찾아오다

셋째는 예수님을 반대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 바리새인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습니다. 19절 말씀을 읽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바리새인들은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증인으로 나서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많음을 보고 그들 사이에 내분이 일었습니다. 엄연한 사실을 은폐하려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우리의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고 말았어. 예수를 믿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보라. 이제 소용없게 됐어’라는 이야기들이 불거져 나왔습니다.
그때, 매우 중요한 사건을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명절인 유월절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중에 헬라인 몇 명이 있었습니다. 헬라인들은 예수가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는 함성 속에 옷을 벗어 길에 깔며 환영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속에 어떤 한 분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헬라인들에게 그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 분은 누굴까? 왜 많은 사람들이 저분에게 환호성을 보내는 것일까?’ 그래서 헬라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갑니다. 그에 대한 내용이 20, 21절 말씀에 있습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만나보겠다며 찾아온 사건은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으로 볼 때 매우 하찮은 이방인들이 찾아온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매우 중요한 일로 여기셨습니다.
왜 헬라인들은 빌립을 찾아갔을까요? 빌립이란 이름은 헬라식 표현입니다. 그들이 벳새다 사람 빌립을 찾아가 요청한 것은 ‘우리가 예수를 뵙기 원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빌립이 그들의 요청에 당황하며 머뭇거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드레에게 의논합니다. 안드레도 빌립에게 ‘우리가 함께 가서 예수님께 이 일을 전하자’고 제의합니다. 드디어 제자들은 예수님께 헬라인들이 뵙기를 청한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빌립과 안드레의 얘기를 들은 예수님의 대답은 ‘좋다’ 혹은 ‘싫다’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제자들이 헬라인들의 간청을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 후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났든 못 만났든 상관없이 23절 말씀은 우리가 받아야 할 메시지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헬라인 몇 명이 찾아온 사소한 일이지만, 이것은 굉장히 큰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들과 갈등이 있었지만, 어쨌든 이것은 모두 유대인들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헬라인들이 찾아와 예수님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우리는 당신을 꼭 만나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 하나의 전환점이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이것을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탈리아 군대장관 고넬료를 만납니다. 고넬료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하나님을 섬기고 금식하며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고넬료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초청합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당황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로 여겼습니다. 선민 의식이 강했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으로 큰 벽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왜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사람인 나에게 말을 겁니까?”라고 묻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입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고넬료의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그 후 베드로가 기도했을 때 환상 가운데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는 것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비난했지만 이를 무릅쓰고 그를 만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것임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방인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넘어온 것입니다. 이게 로마서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그런 일들이 예수님의 사역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흥의 신호탄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찾아온 사건은 영적, 우주적, 하나님의 구원 계획으로 볼 때 엄청난 일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이방인들이 찾아오는 신호탄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헬라인 몇 명이 찾아온 사실을 전해 듣고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구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 제자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대부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딴소리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승천하신 후에야 깨닫게 됩니다. 이런 영적 놀라운 비밀이 바로 복음의 우주적 비밀입니다.
사도행전 8장 26~39절 말씀에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병거를 타고 가면서 성경을 읽는데, 해석이 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습니다. 빌립이 성령님에게 이끌려 그 내시에게 다가가 해석해 주고 두 사람은 물이 있는 곳에 이르러 세례를 주고받습니다. 그것은 내시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결국 에티오피아에 복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만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점을 치던 많은 가정에 생명의 빛이 들어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혼자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백여 년 전에 한반도에서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어둠에 있던 한반도에 복음이 들어온 영적 부흥의 신호탄이 되었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9, 10절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7장 9~12절에도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밀알의 비밀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 가정이 구원받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세우면 저주받은 이 땅이 복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게 되는 것도 믿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걸고 나가 전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인력과 돈과 열정을 들여 열린 예배를 하고 맞춤 전도를 하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와 전도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은 개인의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국가와 나아가 모든 나라와 방언과 백성과 열방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구원의 신호탄이요,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것입니다.
헬라인 몇 명은 모든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수모를 당하면서 전도하는 까닭은 개인은 물론이고 가정과 사회와 민족과 역사를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반도는 지금부터 1백여 년 전만 해도 쇄국 정치를 펴고 있었습니다. 150년 전에는 어둠에 갇혀 있던 땅이었습니다. 조선 5백년 역사는 세계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그냥 살아왔습니다. 희망, 비전, 내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나라에 당하고 일본에 치이며 미국에게 당하고 러시아에 치여왔습니다. 한반도가 근대화에 눈을 뜨고 교육과 의료를 실시하게 된 동기가 바로 복음에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에서 ‘황금 구절’이라고 부르는 말씀을 하십니다.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방인이 돌아오는 사건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밀알의 원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밀알은 한마디로 땅에 떨어져 죽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밀알이 죽지 않으면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새싹이 돋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밀알의 비밀은 죽음에 있습니다. 밀알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사는 것입니다. 포기하면 얻고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원리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열리는 기적의 문

계속해 예수님께서 밀알의 원리와 적용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5절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 말씀을 원어로 읽으면 뜻이 확연히 살아납니다. 전반부에 나오는 ‘생명’은 헬라어로 ‘푸쉬케’입니다. 즉 ‘육체의 생명’을 말합니다. 후반부에 나오는 ‘영생’은 헬라어로 ‘조에’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육체의 생명을 포기하고 죽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24절은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고, 25절은 인간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위해 매일 세 끼를 먹어야 합니다. 아침마다 조깅하며 헬스클럽에 가서 에어로빅도 합니다. 이는 육체를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죽이면 영원한 생명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26절 말씀을 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생명은 귀한 것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위해 우리가 울고 속상해 하며 서로 싸우고 몸부림치지만 1백년도 못사는 게 육체입니다. 육체의 생명을 위해 우리는 사탄의 종노릇하며 추악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명을 포기하면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땅의 복이 아닌 하늘의 복, 순간적 복이 아닌 영원한 복, 외형적 복이 아닌 내면적 복을 허락해 주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가정에 기적의 문을 여는 일입니다. 교회 하나가 존재하는 것이 민족에게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사를 세계로 파송하는 것입니다. 한 민족을 통째로 바꾸는 방법은 군사를 파병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한 밀알의 복과 비밀이 성도님들에게 적용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주님,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전도가 얼마나 중요하며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하여 주시고
나를 통해 나의 가족과 사회와 민족이
변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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