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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면 믿겠노라 (마 27: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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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그러면 믿겠노라
성경본문 마태복음 27:38-44


  저의 먼 친척 가운데 교장으로 퇴직하신 아저씨 한 분이 계십니다. 이 어른은 가족을 따라 교회행사에는 곧잘 가십니다. 그리고 일년에 몇 차례씩 교회출입은 하시는 어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공공연히 합니다. 가족이 예수믿는 것을 좋게 여기고 또 교회에 와서 예배에 가끔 참석을 하고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을 좋게 보면서도 자신은 그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믿게 할 길이 무엇일까요? 믿어지지 않는 사람을 믿게 하는 길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방법으로는 믿게 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비밀을 서로 나누고 세례주일을 맞이해서 세례의 떡과 함께 믿음의 비밀이 우리 안에 아름답게 새겨지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이 중심의 변화, 마음의 새로움, 이것을 입지 않고는 믿음의 비밀을 알지 못합니다. 마음의 변화가 없으면 진정한 변화가 없습니다. 환경의 변화만으로는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화에 보면 생쥐 이야기가 나옵니다. 생쥐가 조물주 앞에 와서 벌벌 떨면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조물주님, 저는 겁이 나서 못살겠습니다.” “왜 겁이 나느냐?” “고양이 때문에 겁이 나서 못살겠습니다.” “그러면 고양이로 만들어줄까?” 그래서 고양이가 되게 했습니다. 그런데 또 고양이가 와서 “조물주님, 겁이 나서 못살겠습니다.  마당에 개가 무서워서 못살겠습니다.” 그래서 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또 개가 와서 “조물주님, 도저히 못살겠습니다.” “또 왜 그래?” “호랑이 울음소리만 들어도 도무지 못 견디겠습니다”라고 하니까 조물주가 “그래 너는 개가 되도 고양이가 되도 생쥐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도리가 없다. 다시 생쥐로 돌아가라” 그래서 영구히 생쥐로 살게 했다는 우화입니다. 중심이 변하지 않으면 진정한 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 사건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당사자들이 축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하면 40절 이하에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같이 욕하더라”고 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욕을 합니다. 조롱을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왜 그렇게 죽어가느냐. 내려와서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조롱을 합니다. 대제사장들도 장로들도 서기관들도 무리들도 군병들도 심지어 한편의 죽어 가는 강도까지도 예수님을 향하여 조롱을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 말은 처음부터 하나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이것도 예수님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가실 수 있지만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하는 그 말도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쇼를 해봐라, 그것을 보고 우리가 믿겠다는 이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들의 조롱입니다. 보고 믿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고 믿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교회에 무엇을 보려고 왔다면 그 생각을 바꾸십시오. 교회는 볼게 없습니다. 설교자도 장로도 성가대원도 우리 모든 인간들은 볼게 없습니다. 다 죄인입니다. 교회에 와서 무엇을 보고 믿겠다는 것은 오산입니다. 이곳에는 볼만한게 없습니다. 이사야 53장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선지자가 말하기를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싫어버린 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분입니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은 볼품이 없습니다. 육신의 것을 겉으로만 보고는 예수를 메시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제법 땅위에서 무엇을 갖추고 산다 할지라도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볼게 없습니다. 보고 믿겠다는 이 사람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믿겠다는 사람들, 결코 믿음은 보는데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극적인 만남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우리는 골고다에서 일어난 또 다른 사건을 하나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놓고 아우성치며 조롱하며 축제하는 그 무리들과는 달리 골고다의 십자가에 못박힌 그 세 사람 가운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한편 강도는 예수를 비방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이 아들이면 당신과 우리를 구원하라” 그렇게 비방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의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주께서 이르시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강도와 주님의 대화는 십자가 밑에서 떠들고 있는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하는 대화입니다. 함께 죽어가는 그 순간에 “예수여 나를 생각하소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은밀한 비밀의 대화가 바로 믿음의 비밀이 나타난 대화입니다.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데서 믿음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가 믿음의 근거요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능력이 되어야 우리 안에 믿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절대 원리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이 복음의 언약대로 한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되고 그가 구원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고난은 여섯 시간동안 육체적으로 당한 고난임과 동시에 무리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정신적으로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주님께 씌워서 인간의 죄값을 예수님께 치르도록 십자가에 죽이신 그 하나님의 심판은 견딜 수 없는 영적인 고통입니다. “엘리 엘리 사마사박다니” 왜 아버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버렸습니까? 우리의 죄 값을 치르게 하는 심판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육체와 정신과 영적인 그 통전적인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이 우리가 믿는 믿음의 근거가 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속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세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례의 뜻

  세례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 가지 신앙고백이 주어집니다. 세례는 한번 받지만 세례의 신앙고백은 주님을 부를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죄 사함 받은 표입니다. 세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속죄를 입어야 하는 그 죄는 멸망에 이르는 죄입니다. 영원한 형벌로 가는 죄입니다. 우리의 원죄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죄 값을 다 치르신 예수님의 그 속죄는 우리를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용서와 언약이 있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표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자녀가 된 표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나서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표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입니다. 우리는 그 머리에 속한 지체들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세례를 받으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 하나가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의 은혜와 하나님 자녀의 표,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이 세례는 우리 신앙생활에 늘 함께 나타나는 고백인 것입니다.

  진리의 절대성

  기독교의 진리는 절대성이라는데서 가치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절대성이라는 것은 철학적으로는 너무 오만하다, 자만하다고 비판을 받습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유일한 참 진리라고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심을 고백을 할 때 세상의 철학과 이교에서는 독선이고 고집스럽다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보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진리는 타협할 수 없고 양보할 수 없고 매매할 수 없고 살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고 한 진리는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십니다. 이것을 고집하는 것은 독선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 한 30여년 동안 꾸준히 팔리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그 책이 신비로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그마한 책이 계속 팔립니다. 고속도로 서점코너에 가서 몇 권 안 되는 거기에도 있습니다. 서점에 가도 언제나 그 책은 베스트 코너에 있습니다. 그것도 긴 세월동안 계속 팔립니다. 3판까지 나왔는데 1판 나올 때마다 오십세, 육십세 이렇게 됩니다. 지금 3판이 나왔는데 거의 칠십세 가까이 인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비로운 게 서점점원도 이상하게 계속 나간다는 말을 합니다. 그게 바로 법정이 지은 ‘무소유’라는 책입니다. 그런데 그 책이 왜 그렇게 사람들 앞에 공감을 주는가? 스님이 쓴 책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안 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책이 일반대중들에게 크게 공감을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가면 불교와 기독교 이야기를 하는데 이 법정의 철학과 자기 문학의 소양이 거기에 다 담겨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요한일서를 인용하면서 불교와 기독교는 같은 것이라고 글을 썼습니다. 그 논리와 그의 그 문필은 수많은 세상 사람들 앞에 공감을 주었습니다.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은 무릎을 치면서 동의를 합니다 ‘아 그렇다, 법정의 말이 맞다’

  그런데 거기에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상대진리가 있습니다. 법정은 거기서 기독교와 불교는 같다고 합니다. 모든 종교는 가는 길이 다를 뿐 궁극적인 종착점은 하나라고 설파를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일서의 말씀을 인용을 하면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다 라는 인본주의 절대관을 거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인본주의를 통해서 절대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처의 미소와 주님의 사랑은 본질이 같은 것이지 결코 다르지 않다, 부처와 예수님이 한 자리에 앉을 때 결코 어색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의 산일 뿐이다, 히말라야는 동쪽에서 올라가든 서쪽에서 올라가든 길은 달라도 봉우리는 하나에 이르는 것처럼 모든 종교는 길이 다를 뿐 한곳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거기에 세상 사람들은 박수를 치면서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교들은 전부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오직 기독교만은 거기에 동의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상대적 진리를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만이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교에서는 ‘고집’ ‘독선’이라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고집스러워야 하고 독선적이어야 합니다. 하나의 진리라고 그것이 독선이 결코 아닙니다. 주치의가 몇 번의 검사결과 “이제 당신은 지금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할 때 “선생님, 병 고치는 길은 여러 길이 있습니다. 왜 하필 수술을 받아야 합니까? 나는 못 받습니다. 병 고치는 약도 그렇게 많고 병 고치는 치료법도 그렇게 많은데 왜 하필 당신께 내가 수술 받아야 합니까?”라며 거부하는 그것이 지혜입니까? 수술을 받아들이는 게 지혜입니다. 독선이 아닙니다. 조난 당한 사람에게 구조 헬리콥터가 와서 줄을 내려주면서 “이 줄을 잡고 줄 매듭에 몸을 끼우면 우리가 끌어올려 줄 것이오”라고 할 때 그 사람이 “구출받는 길은 여러 길이 있소. 왜 하필 내가 이 밧줄을 잡아야 하오? 나는 살 길이 여러 길이 있으니까 이 밧줄을 내가 잡을 수 없소. 헬리콥터 소리 시끄러우니까 빨리 떠나시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구출을 받지 못합니다. 자기에게 내려온 그 밧줄을 보고 내가 이 길 외에는 살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곧 길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은 독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집스러워도 그 길을 주장해야 되고 그 길을 타협할 수 없습니다. 예수가 진리라는 것은 타협을 못합니다. 예수가 영생이라는 것은 타협을 못합니다. 절대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도 주일마다 절대적인 진리 앞에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서구교회가 무너졌습니다. 미국에 있는 구라파인들이 와서 세웠던 교회들은 거의 다 문을 닫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상대화했기 때문입니다. 주말문화가 주일을 다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주일은 선데이가 아닙니다. 주일은 할리데이가 아닙니다. 주일은 로드스데이(roads day)입니다. 주의 날입니다. 이 날은 휴일도 아니요 월화수목 가운데 하루가 아닙니다. 이 날은 주의 날입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며 이 날은 구별된 날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복 주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우리가 상대적으로 타협을 하면 안됩니다. 주의 날을 타협하면 안됩니다. 휴일화 하면 안됩니다. 왜 우리는 주의 날을 귀중히 여겨야 되느냐 하면 주님이 주가 되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의 신입니다. 유일한 우리의 구주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예배,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우리에게 양보될 수 없는 절대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주일날 내가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과 교회를 섬기는 의무는 철저하게 감당을 해야 됩니다. 이것을 양보하면 우리의 믿음이 다 무너져 버립니다.

  맺는 말

  서양에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교인이 오늘 날씨를 보니까 낚시를 하기 좋은 날이거든요. 교회를 갈까 낚시를 할까 하다가 그만 낚시터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같은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주일날 만나니 서로 민망한 것입니다. 자기 혼자 와야 편한데 같은 교인을 만나니까 인사가 궁한 것입니다. “형제여, 오늘 날씨 참 좋죠?” “나야 뭐 그렇지만 당신은 오늘 교회를 가야지 왜 이리 왔소?” “날이 좋아서 왔소. 당신은요?” “당신이 말했잖소. 오늘 낚시하기 좋은 날 아니오?”

  주의 날을 상대화해 버리면 믿음도 다 무너집니다. 우리가 주 5일제, 주 4일제 근무가 되어도 주일은 하나님 앞에서 붙잡아야 됩니다. 이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주의 날은 결코 양보될 수 없는 날입니다. 오늘도 세례식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함께 십자가의 주님을 뜨겁게 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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