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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 왕하 4:42 -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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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열왕기하 4 : 42 - 44 

얼마전 모기업의 노(老)회장이 자신의 전 재산 308억원을 부산대학교에 장학금으로 내놓았다는 보도는 세간의 미담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한편 인천공항 국제선 검색대에서 불법 물품반입으로 압수되는 물건들을 T.V 화면을 통해 보노라면 내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사는 세상은 빈부의 격차가 필연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만해도 수십 억원이 되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삭월세 방 한 칸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이러한 빈부의 싸이클이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조상적부터 가난하게 살아온 우리들은 언제부터인가 너무 많이 모았습니다. 이것은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누리는 부의 축적이 분명합니다.

그 누가 말했듯이 이제 우리는 물건을 살 때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눠 줄 때라고 하는 말이 양심에 비추어 볼 때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음식점을 갈 때마다, 너무 많고 너무 맛이 있다는 데, 놀라지 않을 때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부담이나 가책도 없이 이런 음식을 먹을 자격이 오래전부터 주어진 사람처럼 너무 익숙해져 있는 저의 모습이 가증스럽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살았던 어려운 시절이 우리를 비켜가지 아니하고 살속 깊이 기억에 없어지지 않도록 정확하게 우리를 관통해 갔습니다. 5.16 이전과 그 이후에 얼마 전만해도 소위 공직에 있는 자들이나, 하루 종일 피곤에 지친 농부들이나, 흐르는 땀으로 눈을 뜨지 못하던 건설현장의 근로자들이나, 쓸데없는 야망과 한껏 고무된 시마(詩魔)로 밤을 세운 젊은 청년학도들도 주거문화와 밥상 문화는 별반 다르지 아니했습니다. 그 당시의 환경도 그러했지만 돈이 있다고 해서 그돈을 마음대로 소비하지 아니했습니다. 필요이상으로 사치하거나 쓸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무한 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는 가난한 것은 낭만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당하게 부를 누리는 자를 향해 손가락질할 아무런 정당성이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부는 곧 능력으로 통합니다. 반대로 가난은 곧 무능력으로 소외시켜 버립니다. 따라서 부는 가진 사람의 도덕성과 분배 법칙의 철학이 정의롭다고 하면 있으면 있을수록 필요한 것입니다.
얼마 전만해도 예술이니 창작이니 하면서 낭만적인 가난을 그냥 봐주던 시대도 있었으나 이제는 예술을 해도 창작을 해도 경제성이 없으면 그 자체의 가치를 잃을 뿐만 아니라 그 존재마저 설자리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넘치는 부를 소유한 자와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한 가난한 자들 모두에 대하여 정확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땅에서 얻은 부를 자신을 위하여 독식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들에게 제일 먼저 그 가난을 극복하는 것을 절대절명의 사명으로 삼으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가난한 환경에서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의입니다(요 17:25; 행 1:17; 히 5:13). 그렇다면 가난의 해결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피조세계의 존재를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존재케 한 모든 것을 통치, 섭리, 보호하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바 모든 것에서 자유 하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읽은 성경 본문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알살리사에서부터 온 사람이 가져온 적은 양의 음식으로 100명이나 되는 군중을 먹이고 남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지나버리고 마는 경솔함이 없지 아니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나 남았다는 것은 크게 부각시키고 설교도 많이 하는데 본문의 이 사건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 대한 예표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크게 인식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언제나 믿음을 담보로 기적과 축복을 약속합니다.
길갈에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었는데 바알살리사에서부터 온 사람이 가져온 음식물을 엘리사에게 드리니 엘리사가 그것을 받고 사환에게 이르기를 "이것을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Ⅰ. 물리적 세계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4장 42절에 『한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저가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했습니다.
길갈에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은 극도로 궁핍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바로 이곳에 사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알살리사에서 한 사람이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약간의 채소를 자루에 담아 가지고 엘리사에게 드렸습니다. 여기 『채소』(카르멜, ) 는 본문 4장 39절에 나오는 요리를 하거나 국을 끓여 먹는 채소(오라, )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냥 먹을 수 있는 채소입니다
율법에는 모든 식물의 첫 소산은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레 23:4-9; 출 23:19; 34:26; 신 26:3-10). 여호와께 바쳐진 이 첫 소산은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나누어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8장 13절에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땅 처음 익은 모든 열매는 네 것이니 네 집에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18장 4절에도 『또 너의 처음 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너의 처음 깎은 양털을 네가 그에게 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각종 처음 익은 열매는 다 제사장에게 돌리라고 했습니다(겔 44:30). 여기에 나오는 보리떡은 레위기 2장 14절에 의하면 첫 이삭을 볶아서 찧은 것으로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서는 떡을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바쳤습니다. 당시 보리떡 1개는 성인 남자가 겨우 한 끼 식사를 할 정도의 빈약한 양식입니다.
그렇다면 보리떡 이십은 성인 남자 이십명이 한 끼 식사를 겨우 할 수 있는 정도의 것입니다. 자루에 담아온 채소라고 해 보아야 보잘것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때가 심각한 기근의 때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 헌물이 얼마나 귀하고 사려 깊은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나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벧엘이나 수넴에서 왔다면 놀랄 것이 못되지만, 이 사람이 분명히 바알살리사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헌물을 드렸다는 것은 예측 밖의 일입니다. 원래 이곳의 이름은 살리사였는데 이세벨의 악정으로 그 위에 거짓 신의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바알살리사'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은 우상의 위가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곳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오늘 이 사악한 세상에서 교회적 사명을 다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됩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유다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 갈 수 없는 사람이었고 간다고 해도 성전 출입을 거부당할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에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없었고 오직 바알 제사장만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가 하나님의 종 엘리사에게 와서 처음 소산의 열매를 드린 것을 보면 그의 출신 성분과는 상관없이 경건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수적 한계의 극복은 하나님의 손에 드려져야 합니다.
본문 4장 42절에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 믿음이 수적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기적을 동반합니다. 주님의 손에 드려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았습니다(요 6:1-15).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나와 내 가족, 내가 받은 달란트,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교회,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이 땅에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하나님의 손에 드려진 모든 피조세계는 부족함이 없는 기적을 보게 합니다.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는 말씀은

Ⅱ. 신앙세계의 충족성을 보여주는 말씀 입니다.

본문 4장 43절에 『그 사환이 가로되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명에게 베풀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사고로는 전혀 불가능한 적은 음식물을 일백명에게 나누어 주라는 엘리사의 말에 그 사환은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명에게 베풀겠나이까?' 라고 두 번씩이나 불가능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선동이라도 하듯이 진지한 항변을 해왔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의 말은 자기편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말입니다. 엘리사의 말이 사환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은 물론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들을 기만하는 비윤리적인 말입니까?

이와 같은 상황이 벳세다 광야에서 주님과 그의 제자들 사이에 일어났습니다(요 6:2-4).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요 6:5). 이때 빌립이 대답하기를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요 6:7). 빌립의 계산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계산입니다. 그때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한 아이의 손에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소개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오천명의 군중들에게 배부르게 나누어주시고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충족성을 보여주는 기적입니다.
여기 보리떡 이십과 자루에 담은 채소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손에 드려질 때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1) 충족성의 기적은 드림에서 왔습니다.
본문 4장 42절에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고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드림에서 왔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8절에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2) 충족성의 기적은 순종에서 왔습니다.
본문 4장 44절에 『저가 드디어 무리 앞에 베풀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습니다.
현실 불가능한 일에 덤벼드는 것은 모험인 동시에 자기 자신이 특히 자기 친족이나 사람들로부터 바보가 될 각오를 해야 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위협을 받는 일도 신앙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흔한 일입니다. 그 사환은 용기를 내어 말씀에 의지하여 보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용단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의 세계에서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누가복음 5장 4-6절에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 지라』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순종할 때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6절에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했습니다.

3) 충족성의 기적은 물리적인 수단을 통해서 왔습 니다.
본문 4장 42절에『…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저가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1절에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라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앞서 행한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의 생도가 죽고 그 아내가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빚에 독촉을 받고 있었습니다. 빚을 갚지 아니하면 두 아이를 종으로 삼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엘리사를 찾아 왔을 때 엘리사는 그녀에게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계집종의 집에 한 병의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왕하 4:2)라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고 하고 한 병의 기름을 계속해서 그릇에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놓으라고 했습니다(왕하 4:14). 한 병의 기름을 가지고 기적을 베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기서도 바알살리사에서 한 사람이 가져온 헌물로 일백명을 먹이고 남았다고 했습니다.
본문 4장 44절에『…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다 먹고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2-13절에도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에 나타난 기적은 주님의 오병이어 기적에 대한 구약의 예표론이라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인간은 물리적 세계에 만족하는 피조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물리적 세계는 언제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 세계에서 만족을 얻는 피조물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지나치게 물리적 세계에서 합리적이고 계산적입니다.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 보아서 합리적이지 못할 때는 곧바로 불평하면서 돌아서곤 합니다. 극에 달하는 자기중심의 이기주의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와 세계교회가 인류에 직면한 문제들을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세계에서 영적으로 풀려고 하지 않고 물리적인 수단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으냐 얼마나 크냐 얼마를 주었느냐 얼마나 값어치가 있느냐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쟁력은 가공할 만한 물리적 수단이나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저급한 이데올로기에 있지 아니 합니다. 무한 경쟁시대에 무한 경쟁력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곧 우리는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의 세계는 곧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적의 세계입니다.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이 영적 신앙의 세계만이 개인과 가정과 국가가 직면한 모든 환란과 죽음의 위기에서 자유케 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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