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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감사생활 /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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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그리스도인의 감사생활
성경말씀 : 누가복음 17:11-19

오늘은 전국의 교회가 다함께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사실, 요즘은 사회가 산업화 되어서 국민의 대다수가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에 종사합니다. 2002년 말 현재,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은 전 국민의 20%이고 더구나 농업 종사자는 7%에 불과합니다. 이로 인해 농사에 대한 경험이 없는 도시의 신자들 가운데는 추수감사절에 대한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멀리 구약시대의 모세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은 삼대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이 그것인데, 이 세 절기는 다 수확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월절은 보리추수를 시작할 때, 칠칠절은 보리추수를 마쳤을 때, 초막절은 가을 추수를 마쳤을 때 지켰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인이 아니므로 이 삼대절기를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년 추수철에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는 봄에는 보리 수확을 감사하는 맥추절을, 가을에는 벼를 비롯한 오곡백과의 수확을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미국의 청교도들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건너간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이 준 옥수수 씨앗을 심어서 농사를 지은 것을 수확해서 하나님 앞에서 추수감사절을 지켰는데, 한국교회는 1904년부터 정식절기로 삼아 지켜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도시에서 생활하고 농사를 짓지 않지만 매일 매끼니 마다 농작물을 먹고 살아갑니다. 반드시 농사를 지어야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농사도 짓지 않았는데도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는다면 더욱 감사할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농사 대신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또는 사업을 하면서 의식주에 필요한 수입을 얻은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내가 땀 흘려 수고해서 수입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재물 얻을 능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신 8:18).

무엇보다도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감사생활의 중요성입니다. 교회가 감사의 절기를 정해서 지키는 것은 일년에 한두 번만 하나님께 감사드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난로의 불이 지속적으로 타오르도록 기름통에 기름을 공급하듯이, 우리 마음속에 감사의 불길을 더 강렬하게 타오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통해서 감사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활기찬 감사생활을 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그리스도인의 감사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함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는 충북 음성에 있는 꽃동네에 최기동이라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청년기에 일제 징용에 끌려갔다가 모진 고문을 받아 정신병자가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왔으나 이미 집안이 망해서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갈 데 없이 된 할아버지는 다리 밑에 가서 거지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는 자기도 불편한 몸인데도 병들어 누워있는 걸인들을 위해 밥을 얻어다 먹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얼어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 엎어다가 다리 밑 움막에 데려가서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 분이 평소에 말하기를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비록 밥을 얻어먹는 걸인이지만 최기동 할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원망, 불평 대신 감사가 있었습니다.

최 할아버지에 비하면 몸도 건강하고 나이도 젊고 가진 것도 많지만 현대인들의 마음속에는 감사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감사 대신에 나보다 나은 사람들에 대한 비교 의식에서 비롯된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사람은 절대로 행복해 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최기동 할아버지가 불행한 여건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동정해서 돕는 일을 자원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행복자가 되려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빈손 들고 왔는데 지금까지 먹고 입고 살아온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리시며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게 하시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또 세계에서 가장 전쟁위험이 높다고 하는 한반도인데도 전쟁이 나지 않도록 지켜주셨으니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운데 어쩌다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생각하면 놀랍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직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만 살아갑니다. 겉보기에는 재미있게 사는 것 같지만 실상 그들의 삶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것이 값진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직분을 맡겨주신 데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주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주의 몸된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부모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부모의 돌보심 없이 성장한 사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짐승을 보면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 제 발로 일어서서 뛰어다닙니다. 일년도 되지 않아서 독립적인 생활을 해 나갑니다. 거기 비하면 사람은 태어나서 수 년 동안이나 부모의 보살핌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또 스무 살이 넘도록 부모의 전적인 보살핌 아래서 생활하면서 교육을 받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부모에게서 버림받는 아이들이 한해에 거의 만 명이나 됩니다.

우리를 버리지 않고 사랑으로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것은 사람의 기본 도리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는 의지할 데 없이 쓸쓸하고 가난한 노후를 보내는 노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그 노인들의 대부분에게 장성한 자식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은 부양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부모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분들의 행복한 노후를 위해 모든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 이웃에게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사회를 이루고 삽니다. 서로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농부들이 수고해서 가꾼 곡식을 사다 먹습니다. 그러므로 식사를 대할 때 농부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차비를 내고 시내버스를 타지만, 그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비용을 지불했으니까 감사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이 있음으로 우리가 편한 생활을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을 보면 입에 “땡큐”라는 말이 붙어 다닙니다. 물건을 사고팔면서도 “땡큐”, 길을 가르쳐주어도 “땡큐”, 지극히 사소한 친절에도 “땡큐”라는 말을 빼먹지 않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한국 사람들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너무 인색합니다. “그까짓 것 가지고 감사할 것이 뭐있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잘못돼도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한 마디가 분위기를 따뜻하게 하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도움, 작은 친절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서 이 사회를 밝고 따뜻하게 만들어나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감사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감사할 줄 알 때 은혜 받은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문둥병을 고침 받은 사람은 모두 열 명이었으나 감사하러 온 사람은 한 사람, 사마리아인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문둥병을 고침 받기 위해 주님의 긍휼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요즘도 한센씨 병은 무서운 병인데, 2천년 전에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입니다. 가족과 이웃에게 버림받고 평생 고독 속에서 고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고침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그러나 그 중 아홉 사람은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고침 받은 것을 자기들의 공로라도 되는 양 당연시했습니다. 이 세상에 당연시해야 할 은혜란 없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주님의 말씀 속에는 은혜를 모르는 아홉 사람에 대한 서운함이 배여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즉 우리는 주님을 찾아와 사례한 사마리아인처럼 받은바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번째로, 우리의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은 동무들과 함께 제사장들을 찾아가던 중에 병이 나은 것을 알고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했습니다. 그 당시 이 사마리아인이 무슨 말을 했을까요? 그는 그저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의 문둥병을 고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만 되풀이했을 것입니다. 그 외에 무슨 할 말이 있었겠습니까? 성도님들, 감사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시편 50편에 “14)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지 감사가 없는 예배는 예배로서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신앙생활은 위선적이 될 수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일이 될 뿐입니다. 감사는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가 됩니다.

구약성경 역대하 20장에 보면, 유다 왕 여호사밧 당시에 모압과 암몬이 연합해서 쳐들어왔습니다. 아무 방비도 없이 당한 일인지라 여호사밧을 비롯해서 온 백성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신앙의 사람이었으므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온 백성에게 금식하라고 공포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을 통해서 구원의 방법을 일러주셨습니다. 이에 여호사밧이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성가대를 조직하고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였습니다.

적군을 물리치려면 무장을 한 군대가 나서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사밧은 거룩한 예복을 입은 성가대로 하여금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찬송하면서 적진을 향하여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성가대의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하나님께서 적들로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하시니 적들이 피차 싸워서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적진에 이르러 보니 땅에 엎드러진 시체뿐이요 하나도 피한 자가 없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모진 매를 맞고 발이 착고에 채인 채 깊은 옥에 갇혔습니다. 매를 맞은 몸이 쑤시고 아프지만 두 사도는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밤중에 일어나 큰 소리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속에 감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같았으면 감옥에 갇혀서 감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캄캄한 감옥에 갇혀서도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그랬더니 발의 착고가 끌러지고, 옥문이 열리고, 간수가 회개하고 주님을 믿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선, 두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 받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핍박 받는 것이 왜 감사할 조건이 됩니까? 그 이유를 디모데후서 2장 11절로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역경 가운데서도 감사하기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역경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감사의 조건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 일대에는 벌새라는 작은 새가 서식한다고 합니다. 이 새는 몸집이 작고 주둥이가 긴 것이 특징인데, 벌레를 잡아먹고 사는 것이 아니고 꽃에서 꿀을 빨아 먹고 삽니다. 그러므로 다른 새들이 먹이를 찾지 못하는 사막에서도 벌새는 선인장의 꽃을 발견하고 거기서 꿀을 빨아먹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지 못하는 형편에서도 얼마든지 풍성한 감사의 조건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벌새와 비슷합니다. 더구나 문둥병을 고침 받았던 사마리아인과 같이, 우리는 영혼의 문둥병인 죄악에서 속량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 중에 괴수인 우리를 택하시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서 천국 백성 삼아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어떠한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해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눈을 밝게 뜨고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분명히 알게 되어 감사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감사할 때 더 풍성한 은혜를 받습니다.

사마리아인이 돌아와 주님 앞에 엎드리어 사례했을 때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기를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문둥병을 고침 받은 것 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마리아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도 문둥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 받지는 못했습니다.

아홉 사람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떡을 배불리 얻어먹은 사람들과 같습니다. 벳세다 해변가에 모인 사람들은 떡을 배불리 얻어먹고 한 때 육신의 배고픔은 면했으나 생명의 떡에 참예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떠나갔습니다. 기적의 떡을 얻어먹은 것이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언젠가는 주님 곁을 떠나가고 맙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믿음이 있었기에 문둥병을 고침 받았을 때 먼저 자기 가족에게로 달려가지 아니하고 주님을 찾아와서 사례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무슨 방법으로 내어 보일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작은 시험 앞에서도 힘없이 넘어지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신자들의 공통점은 그 입술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처한 형편이 이처럼 어려운데 무엇을 어떻게 감사할 수 있단 말이냐고 반문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계신 것이냐고 말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는 증거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빈종이 위에 여러분이 받은 은혜를 하나씩 써 보십시오. 그러면 감사할 일이 너무나 많은데 놀랄 것입니다. 그 하나, 하나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우리가 감사할 때 마다 감사의 조건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사울 왕과 다윗 왕이 나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울이 다윗에 비해서 뒤떨어지는 점이 없습니다. 사울은 키가 보통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더 큰 훤칠한 키에 수려한 이목구비를 갖춘 사람입니다. 용기도 있고 아량도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왕조는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그와 그의 세 아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원인이 무엇입니까? 불순종이 그 원인입니다. 사무엘상 14장 35절에 보면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단이었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되고서도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 제사장 시절에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이십년이 넘게 보관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언제 한번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실 성전을 지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지 아니하고 당연시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처음에 왕으로 선출되었을 적에는 겸손히 사양했으나 왕이 되고 나자 교만해 졌습니다. 교만한 마음에 감사가 깃들 리 만무합니다. 그 결과, 사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베들레헴 시골의 목동 출신으로 그가 왕이 된 과정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잘 알았으므로 늘 수금을 연주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렸습니다. 시편 150편 가운데 다윗이 지은 시가 절반이 넘는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힘썼는지를 말해 줍니다. 그는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겼습니다.

그 때 그는 언약궤가 무사히 다윗 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왕의 체면도 무릅쓰고 맨살이 드러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언약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이와 같은 다윗의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복을 더하셔서 그의 왕위가 영원하리라고 언약하셨습니다. 그 때 다윗은 하나님께 고하기를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 7:1) 하였습니다. 그의 말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가득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면 밝은 천국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 비유를 들려주시고 나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감사생활에 힘쓰면 날마다 감사할 일이 더 많이 생겨나고, 우리가 원망, 불평에 힘쓰면 날마다 원망, 불평할 일이 끊임없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4절에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들도 때로 시험에 들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하고 역경을 만나기도 합니다. 원망, 불평을 하고픈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입술로 범죄하지 말고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으나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 돌아와 주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감사하지 아니한 아홉 사람과 감사한 한 사람의 비율은 감사에 인색한 인간들의 실상을 수치로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자, 우리는 이 두 종류 가운데 어느 편에 속해야 하겠습니까?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고 했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주님을 찾아와 사례한 사마리아인을 본받아 감사생활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심으로 주님의 칭찬과 함께 더욱 더 풍성한 감사생활을 영위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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