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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물을 흘리자 /시 126: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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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리자
본문: 시126: 5, 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성 프랜시스가 울며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제자가 왜 우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며 울고 있노라. 예수님을 위하여서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땅 끝까지 헤매어도 부끄럽지 않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 프란시스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 예수여, 내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주옵소서! 첫째, 내 영혼과 육체가 괴로움을 겪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을 맛보게 하옵소서. 둘째, 당신이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그처럼 참으실 수 있었던 그 타는 듯한 사랑을 가질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가 어떤 때에 눈물을 흘리게 되는 가(눈물의 원인)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 후회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충언하자 사울이 일시적으로 후회하며 눈물을 흘립니다.(삼상24:16,17) 또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후 동생 야곱이 축복 받은 사실을 알고 후회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창27:34)
둘째, 감사함과 기쁨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마리아는 자기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습니다.(눅7:38-44) 사람은 때때로 너무 기쁠 때도 눈물을 흘립니다.
셋째, 이별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옛날 일본에 양관화상 이라는 저명한 승려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불량한 아들 때문에 속을 썩이던 아버지가 스님을 찾아와 말하였습니다.
"제 아들놈이 도무지 아비의 말을 듣지도 않거니와 매사에 엇나가기만 하니 저의 힘으로는 도저히 가르칠 수가 없사오니 스님께서 저의 집에서 침식을 같이 하시면서 아들로 하여금 보고 깨달아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스님은 그 아비의 부탁을 받아들여 그 아들과 함께 한 방에서 기거하였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가고 두 주일이 지나도 스님의 꾸중이 한 마디도 없자 그 아들은 나쁜 짓만을 계속하고 뉘우치는 구석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두 달이 지나가도 스님은 역시 침묵뿐이고 아들은 조금도 나아지는 구석이 보이지 않자 이제는 그 아비도 스님의 무관심과 침묵에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3개월이 지나자 스님이 이제는 집을 떠나 절로 돌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스님이 돌아가신다고 하자 그 집 아들은 잔소리 한마디 듣지 않은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스님을 전송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스님이 신발 끈을 메다 말고 그 집의 아들에게 좀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들은 허리를 구부려 신발 끈을 메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손등이 뜨거웠습니다. 그 아들은 놀라 스님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 스님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그 집의 아들은 스님에게 감화되어 새 사람이 되어 바르게 살았다고 합니다.
넷째, 성령의 감화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내가 어느 교회에서 목회 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고난 주간에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하루 종일 금식하고, 조용히 머리 숙여 기도하다가 제단 가운데 있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음성이 내 심장을 울렸습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이 몸 버려 피 흘려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버리고 있느냐"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이 종의 심령 속에서 통곡하게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감당할 수 없는 눈물이 제단을 적셨습니다. 그 후부터는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내렸습니다. 이 패역한 도성을 부둥켜안고 밤이면 산에 올라가 온몸이 이슬에 젖도록 울었고, 낮이면 하나님을 모르는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눈에서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통곡하며 울 듯이, 이제 우리도 우리의 죄를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밑으로 나아가 통곡해야 하겠습니다.
다섯째, 죽을병으로 인하여 그리고 실패했을 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여 15년간 생명을 연장 받은 말씀이 나옵니다.(왕하 20:1-5) 또 사람은 심한 고통 중에 그리고 실패했을 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같으니이다."(시39:13)
여섯째,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여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안질로 고생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눈이 찌르고 아팠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왕의 눈병을 고치겠노라 나섰습니다. 왕은 그를 따라 궁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왕이 생각했던 것보다 백성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 때 슬픈 통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곳을 찾아가 보니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단칸방에 누더기를 걸친 시체 옆에 어린 자식 셋이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참한 정경에 왕도 눈물이 터져 통곡을 했습니다. 얼마 후 자신을 진정하고 난 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눈의 통증이 없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워하는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양심적으로 순결하고 싶어도 제약이 많고, 한없이 자유하고 싶어도 제약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산다는 것이 상처받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일에만 너무 신경을 쓴다면 그들의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저의 목회 초기에 한 가장이 오른 집세를 마련하지 못하고 비관 끝에 연탄불을 피우고 가족 3명과 함께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가장은 이렇게 절규하면 죽어갔습니다. "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가난이 나에게 물려지고, 기적이 없는 한 자식들에게도 물려질 것이다. 빈익빈 부익부는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하는가? 폭등하는 부동산 가격에 내 집 마련의 꿈은 고사하고 오르는 집세도 충당할 수 없는 서민의 비애를 자식들에게는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집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가장은 죽어야지..."
삶이 어렵다고 죽음을 선택한 이 가장은 선택은 분명히 잘못된 선택입니다. 사실상 삶은 그렇게 비관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내가 마음만 굳게 먹으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비극적인 상황의 일차적인 책임은 그 가장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이차적인 책임은 있습니다. 즉 우리들은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 희망의 씨앗을 뿌려줌으로 그들에게 삶은 그렇게 비관적인 것이 아님을 알려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 책임을 외면하면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특히 가난의 마수는 어린이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줍니다. 어른들이야 가난에 어느 정도 저항해 싸울 수 있다지만 어린이들에게 가난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큰 고통을 줍니다. 얼마 전 자료 스크랩을 정리하다가 1990년 3월에 있었던 5살 된 혜영과 4살 된 용철 남매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아이들은 회사 경비원인 아빠와 파출부인 엄마가 일하러 가면서 방문을 잠근 단칸 지하 셋방에서 놀다가 불이 나서 질식해 숨졌습니다. 그 당시 엄마가 방문을 나설 때 아이들은 항상 고사리 손으로 싹싹 빌며 방문을 잠그지 말아달라고 절규했었습니다. "엄마! 잘못했어요! 이제는 칼 가지고 놀지 않을게요. 불장난하지 않을게요. 문을 잠그고 가지 마세요."
이들 남매는 가난한 집에 태어난 죄 아닌 죄로 마음대로 뛰놀지도 못하고 지하 단칸방에 갇혀 지내다가 심심해서 시작한 불장난으로 인해서 어이없이 죽게 된 것입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아이들은 생명마저 가난해야 합니까?
가난의 마수는 이와 같이 죽음의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가난은 사회적, 정신적, 심리적 영역까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심지어는 영적인 문제에까지 어려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일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약간 젠틀(gentle)하지 못한 면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중요한 삶의 태도는 근검절약 정신을 실천하는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마음껏 쓰는 태도는 가난한 사람들의 상처에 불을 붙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사치와 낭비는 가난한 자에게 가하는 폭력행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극적인 근검절약 정신에서 끝나서도 안될 것입니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힘들고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팔을 걷고 호주머니를 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의 눈물을 닦아줄 때 주어지는 기쁨이 넘치는 삶에 사치와 낭비를 과시하며 살 때 주어지는 기분 좋은 삶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의인의 눈물 병에 담아주실 것입니다.
일곱째, 애국심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조국 예루살렘이 훼파되고 성문이 붙탄 소식을 듣고 울며 슬퍼했습니다.(느1:3,4) 또 예레미야 선지자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쉬지 않고 눈물을 흐리며 울었습니다.(애 3:48,49)
여덟째, 학대와 근심과 염려로 인해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나는 어느새 이불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마구 울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다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1981년 2월 내란음모 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수감중인 김대중 전직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보낸 옥중서신의 한 구절입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 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4:1)
아홉째, 대적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나는 00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교장이 학생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한다고 나를 미워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할 때 집에 와서 몹시 울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시6:6,7)
열번 째, 훈계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월터 반게린은 미국의 저명한 작가입니다. 그는 자기 아들과의 다음과 같은 경험을 책에 썼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매튜’라는 아들이 만화책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하루는 도서관에서 만화책을 몇 권 훔쳐 왔습니다. 그 사실을 발견한 아버지는 아들을 엄하게 꾸중했고, 그를 도서관에 데리고 가서 책을 반납했습니다. 매튜는 도서관 직원에게도 단단히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듬해 여름에 아들이 책방에서 만화책을 또 훔쳐 왔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아들의 문제를 더 이상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손을 잡고 서재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매튜야, 아빠는 아직까지 너를 때린 일어 없어. 그러나 오늘은 너에게 도둑질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 일인가를 가르쳐 주어야만 되겠다.” 그리고 아들을 자기의 무릎 위에 구부리게 한 후에 아주 호되게 손바닥으로 다섯 차례 때렸습니다.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방바닥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습니다. “너는 여기에서 반성하며 혼자 있거라. 아버지는 나갔다가 잠시 후에 들어오겠다.” 아들을 방에 두고 나온 월터는 참을 수 없어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한동안 운 아버지는 세수를 하고 다시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매튜가 어머니와 둘이서 자동차로 가면서 지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매튜는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는 아버지와의 그 일 이후로 다시는 도둑질을 안 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도둑질은 안할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그때 아버지에게 매맞은 것이 그렇게 아팠니?” 그러자 매튜는 대답했습니다. “엄마, 그래서가 아니에요. 나는 그때 아버지가 우시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21)
열한 번 째, 인간의 구원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전도사 시절, 고척동 온 마을을 울리던 새벽 종소리는 나의 가슴을 울리는 하늘의 종소리였습니다. 어느 날 새벽 4시에 종을 치기 위하여 종 줄을 잡고 이렇게 기도 드렸습니다. “주님, 이 마을 사람들을 구원하여 주소서. 어두움에 잠든 이 백성들의 잠을 깨우시고, 새벽을 알려 주소서. 멸망으로 달려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살려 주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종 줄을 힘차게 당겼습니다. 그 순간 눈물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내리면서 내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눈물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종 줄을 놓고 땅에 엎드려 “주님, 왜 우시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사랑하는 종아, 지금까지 네가 흘린 그토록 많은 눈물은 너의 눈물이 아니고, 내가 네 안에서 흘린 눈물이었다”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영이 이 비천한 종으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을 알았고, 그 후에도 눈물은 샘물처럼 흘러 내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던 그리스도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었고, 나사로의 무덤에서 통분히 여기고 흘리시던 그 눈물이 내 눈에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 흘리시던 눈물이 샘솟듯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로 제단을 적시고 고척동 땅을 적셨습니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헛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을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열두 번째, 회개함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사순절이 시작됐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날까지의 40일간을 말하며 회개와 반성으로 조용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계절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이 벽을 마주 보며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조금씩 자리를 이동합니다. 옛 성전의 지성소가 있었던 쪽으로 이동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대교 연구가인 존 키드씨의 조사에 의하면 지성소가 가까워질수록 순례자들의 눈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린다고 합니다. 옛날 유대인의 성전에는 지성소라 불리는 방이 있고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지성소가 가까워지면서 기도자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느낄 때 사람은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막14:72)
사람이 울 때는 좀 우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는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누가복음 6:21)라고 하셨습니다. 눈물 고인 눈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그 눈물이 자신을 뉘우치는 눈물이라면 무척이나 고귀한 눈물입니다. 모질고 성난 눈은 주변을 긴장시킵니다. 친절한 눈동자는 주변을 안심시킵니다. 아름다운 눈은 말없는 자를 웅변가로 만듭니다. 슬픈 눈은 입맛을 잃게 합니다. 멍한 눈은 남을 실망시킵니다. 눈의 표정은 수백 가지로 변하는 데 그 변화마다 주변에 던지는 영향이 다릅니다. 그 중에서도 눈물 고인 눈, 용서를 구하는 눈은 사람과 하나님까지도 감동시킵니다.
내 경험으론 가장 하기 힘든 일이 세 가지가 있는 데 미운 사람에게 정을 주는 일과 싫어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과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회개하는 일입니다. 그중 세 번째가 제일 어렵습니다. 드러난 것을 회개하는 것은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회개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회개하는 것이 진짜 회개입니다. 회개는 자발적 성격을 가집니다. 누가 추궁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숨기고 있으면 더 무사하고 체면도 서고 존경도 받을 수 있을 때 자진해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런 회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인격자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는 없는 데 회개를 유보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회개란 벌거숭이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향기로운 제물이 참회하는 마음입니다. 사순절에 고요한 나의 시간을 가져봅시다. 사람과의 대화는 언어를 통해 이뤄지나 하나님과의 대화는 침묵을 통해 이뤄집니다. 과일과 채소의 가장 단 부분은 태양을 향했던 부분이라고 합니다. 고요와 침묵은 하나님께 방향을 맞추는 시간이기에 그 인간에게 맛을 제공합니다.
눈물은 고귀합니다. 눈물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진합니다. 눈물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눈물은 신성합니다. 하나님이 눈물을 만드신 것을 보면 하나님도 눈물을 흘리심에 틀림없습니다. 가끔 애처롭게 비가 내릴 때면 '하나님도 외로워 우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값진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건강한 영혼만이 눈물을 흘립니다. 가장 건강한 사람은 희로애락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창세기42:24) 사도 바울도 눈물로 성도들을 섬겼습니다.(사도행전20:19)
눈물의 가치는 누구를 위해 울며, 무엇을 위해 울었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영성 생활의 출발은 회개의 눈물과 함께 시작됩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릴 때 한 사람의 영혼의 창은 새롭게 열립니다. 눈물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정결케 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애통한 후에 열린 눈으로 그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마른 눈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눈물은 하늘의 다이아몬드입니다. 비누는 몸을 닦는데 필요하고 눈물은 마음을 닦는데 필요합니다.
눈물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눈물의 배후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눈물 속에는 말못할 사연, 아픔 그리고 고뇌가 담겨 있습니다. 때로는 감격적인 기쁨 속에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와 같은 상을 받는 사람의 눈물 속에는 지난날의 아픈 추억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눈물과 땀 속에는 소금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눈물과 땀은 함께 만납니다. 그리고 땀이 깊어지면 피가 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흘리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습니다.(누가복음22:44) 결국 눈물과 땀과 피는 함께 만납니다. 아름다운 세 가지 액체를 흘리는 사람에게는 밝은 미래가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행복합니다. 그는 멀지 않은 날 기쁨으로 열매를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126:5) 이제 더욱 아름다운 조국의 미래를 위해 우리 함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립시다. 멀지 않은 날에 우리의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리라.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
우리 시대는 눈물이 메말랐습니다. 정치도, 사회도, 교육도, 교회도 눈물 메마른 안질에 걸려 있습니다. 사랑으로 ‘너’를 보듬는 정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통곡하는 불우한 형제와 함께 아픔을 나누며 울어주는 정치와 교회가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 한 구절 함께 봉독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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