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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워 말라 / 사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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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라

성경: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어머니가 옆에서 손을 꼬옥 잡아주시고 그 인자한 눈동자 속에 자장가를 들어야만 잠이 오는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손수 만든 옷을 입고 손수 지은 밥을 먹고 손목을 잡고 유치원에 갑니다. 내가 살길은 엄마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 어린이같이 어떤 의미에서 크리스천은 돌이켜 어린아이같이(마18:3) 단순히 주님 품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은 성난 바다 같고 사나운 정글, 때로는 황량한 사막과도 같다고 합니다. 실직, 파산, 질병, 빈곤, 배신, 모략, 중상, 온갖 불운과 죽음등 불안과 공포와 고독을 느끼지 않고 사는 날이 며칠이나 될까? 그런데 주님을 안 날부터 "두려워 말라, 내게 모두 맡겨라, 내가 항상 같이 하겠다" 이런 말씀이 성서에 365회, 365일의 수만큼 기록되었습니다. 엄마의 손길보다 누구의 눈동자보다 더 사랑하시고 절대적인 분이, 우리를 그 피와 말씀과 성령으로 낳으신 분이 내가 병들 때, 약보다 의사보다 먼저 거기계시고, 시험 당할 때, 욕먹을 때, 슬프고 고달프고 망하고 외롭고 아프고 무섭고 그리고 죽을 때, 언제 어디서나 내 호흡보다, 심장보다 먼저 거기 계신 나를 위한 주님이 우리 곁에 항상 계십니다. 먼저 두려움의 원인은 무엇일 까? 를 살펴봅시다.
첫째, 불순종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사해는 염도가 매우 높아서 인체가 가라앉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험하지 않을 것 같지만 물에 들어갈 때 지켜야 할 안전수칙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절대로 헤엄을 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부력이 높아 가만히 누우면 저절로 몸이 뜨는 안전한 물이지만 물에 빠질까봐 걱정하여 몸에 힘을 주게 되면 몸의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그러면 바닷물이 눈에 들어가게 되는데 사해 물은 다량의 광물질을 함유하고 있어 눈에 들어가면 몹시 쓰리고 아픕니다. 수영을 한다고 첨벙거리다가는 자신이나 또는 옆에 있는 사람의 눈에 물이 들어가 오히려 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주의사항은 힘을 빼고 가만히 바닷물에 몸을 맡기고 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쉬워 보이는 것에도 반드시 지켜야 할 법칙이 있습니다. 인생에도 안전과 평안을 위한 유일한 법칙이 있는데 만물의 창조주이자 유일한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 10)
둘째, 불신앙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의심, 공포, 교만, 열등감, 미신 숭배, 비겁함, 의기 소침, 염려, 불안과 같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 위에서 말한 두려움의 여러 가지 형태 가운데 한 가지라도 존재하고 있다면, 지금 즉시 당신의 신앙 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이란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두려움에서 능히 건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당신을 두렵게 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으십시오. 전에 서반아 왕 가운데 페르디난드 5세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이 어떤 점쟁이에게 왕께서는 마드리갈이라고 하는 곳에는 아예 가지 마십시오. 그 마드리갈에서 왕께서 장차 죽을 것입니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왕의 별궁이 있었습니다. 그래 서 왕은 두려워서 좋은 별궁을 지어 놓고도 21년 동안 거기에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한번 은 서반아 지방을 여행하다가 어떤 조그마한 촌락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거기서 몸살을 앓게 되었습니다. 왕은 신하에게 이 지방의 이름이 무엇이냐? 고 물었습니다. 옆에 있던 신하가 네 폐하, 이 곳 이름은 마드갈레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마드갈레가 마드리갈과 발음이 비슷했습니다. 사실은 마드리갈은 아니고 비슷한 이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왕은 아이구,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더니 며칠 안 되어 정말 죽었다고 합니다. 병이 왕을 죽인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왕을 죽였습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12:2)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호수 저 편으로 건너갈 때 배에서 주님이 주무실 때 광풍이 불어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하자 제자들이 두려움으로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잔잔하여 집니다.(눅8: 22- 25) 제자들이 주님의 능력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고 담대한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딤후1:7, 벧전5:7)
셋째, 의심 때문입니다.
성도를 핍박하던 사울이 회개하고 크리스천이 되었으나 처음에는 제자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합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행9:26)
넷째,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행4:29, 마6:28- 30)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눅12:24- 28)
다섯째, 하나님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아람 왕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와 성을 에워 쌓은 것을 본 엘리사의 사환이 두려워하자 엘리사가 그 눈을 열어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여 줍니다.(왕하6:15-17)
또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주님을 잘 모르고 두려워하여 달란트를 땅에 감추었다가 후일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깁니다.(마25:24-30)
여섯째, 죄악을 행하기 때문입니다.(사57:20)
읍내 쥐가 시골 쥐의 초대를 받아 놀러 갔습니다. 시골 쥐는 손님대접을 잘하느라고 갖은 곡식을 다 내놓았습니다. 그래봤자 보리, 밀, 콩 등 잡곡뿐이었습니다. 기분이 상한 읍내 쥐가 시골 쥐를 가엾게 여겼습니다. "친구여, 이게 뭔가? 자네는 개미처럼 살 잖는가? 이걸 먹고살다니, 그는 쯧쯧하고 혀를 찼습니다."
그 얼마 후에 비감한 마음이 드는 시골 쥐가 읍내 쥐에게로 놀러 왔습니다. 과연 거기에는 빵, 치즈, 꿀, 버터, 햄 등 이제까지 구경도 못한 음식이 가득하였습니다. 둘이서는 걸식 들린 것처럼 마구 먹어대고 있는데, 문이 쓰윽 열려서 그만 놀라 숨어버렸습니다. 조용해지자, 그들이 다시 나와 열심히 먹는데, 누군가가 또 문을 홱, 여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도망친 쥐들의 가슴이 팔닥 팔닥 뛰었습니다. 시골 쥐가 소근거립니다. "여보게, 난 가네. 잘못 먹더라도 편안하게 살고 싶네. 불안과 공포 속에서 아무리 잘먹고 잘살면 그게 무슨 삶이란 말인가? 잘 있게." 행복한 생활은 마음이 우선 평안하여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48:22)
일곱째, 죽음에 대한 무지와 불안 때문입니다.(시55:4,5)
어떤 사람이 차가 없어서 지나가는 빈 트럭을 세워서 올라탔습니다. 타고 보니까 빈 관들이 있었습니다. 트럭 뒤에 타고 가는데 소나기가 오더랍니다. 그 사람은 얼른 빈 관의 뚜껑을 제치고 그 안에 들어가 누었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에 다른 두 사람이 올라타고 가는 도중에, 관속에서 잠들었던 사람이 깨어나 뚜껑을 열고 일어나면서 “비가 그쳤구만”하고 말했습니다. 이를 본 다른 두 사람은 무서워서 차에서 뛰어 내리다가 그중 한사람은 사망했습니다. 알고 보면 근거 없는 일 때문에 공포에 떨다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전쟁, 공해, 세금, 인플레 등 때문에 두려워하지만, 사실 두려운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반드시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두려움과 불안만큼 인생을 병들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John Hopkins 박사는 말하기를 “나는 근심 없는 사람이 근심 있는 사람보다 더 빨리 죽는다는 이유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고 그것을 빨리 물리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덟째, 사단의 미혹 때문입니다.(고후11:3)
근심과 두려움은 믿음이 약해질 때 마귀가 가져다 주는 것이요, 담대함과 평안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위대한 영도자 모세가 비스가 산에서 죽자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야 될 책임을 졌을 때 얼마나 근심이 되고 두려움이 많았겠습니까? 그때에 하나님께서 자상하게 사랑 어린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하시고 또 여호수아 1장 7절에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9절에도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금이니라.”(창 15: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만 아니라 우리 예수님 믿는 모든 자녀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시편 27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하셨고 히브리서 13장 6절에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1장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간곡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두려움과 공포를 물리치고 극복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말씀과 그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보호하셨고 우리 성도에게 약속하신 말씀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실 줄을 확신해야 합니다.(롬4:19- 21)
하나님은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지셨고 다니엘의 세 친구를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건지시는 등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들을 두려워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신7:18)
2. 주의 동행을 확신해야 합니다.(신31:6) 즉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모세의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고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미국의 재벌 Robert 투어니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나의 동반자이다. 당신이 어떻게 감히 두려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잠언서 3장 6절에 “너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항상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고, 인정하고, 시인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근심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먹고 입고 살아왔지 만은 앞으로는 살길이 막막하다고 두려워하십니까?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더욱 함께 하십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그 생명이 살아갈 양식을 안주시겠습니까? 귀중한 몸을 주신 하나님이 몸에 걸칠 옷을 안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다 하나님을 안 믿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근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날마다 믿음과 기도로 마귀가 주는 불안과 두려움을 물리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3. 실패를 미리 두려워 말고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합니다.
성공의 가능성이 보이면 먼저 ‘실패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이때에 도전해 보지도 않고 물러서 버리면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없고 성공적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확신을 가지면 성취의 자극제가 되고 두려움을 가지면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자 Freud는 “달성되지 못할 목표를 세우면 좌절과 근심을 가져오는 병을 앓게 된다”고 하면서 목표를 세우지 말라고 했지만 Victor Frankle 은 “목표가 결여된 삶은 모든 의미를 빼앗아 간다”고 하면서 목표를 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런 실패도 하지 않은 사람은 그야말로 완전한 실패자인 것입니다. 실패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뿐이지 인생의 실패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실패는 무엇인가 배운 것이지 달성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실패는 강한 신념을 갖게 한 것이지 바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실패는 새 출발일 뿐이지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실패는 더 분발하라는 것이지 물러서라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라는 것뿐이지 결코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실패는 실패를 두려워해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인간은 웃음과 눈물을 경험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며, 희생과 실망을 통해서 단련되고 연마되는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이 좋은 기회의 순간임을 명심해야 됩니다. 그 일에 실패했지만, 다른 일에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4.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물리치는 가장 좋은 무기입니다. 시편 34편 4절에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고 하셨고 빌립보서 4장 6절에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셨고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불안과 공포가 침투하려고 하면 땀이 나도록 힘써 기도하십시오. 근심에 잠이 안 오면 침대에서 뒹굴지 말고 얼른 잠옷이라도 입고 기도하십시오.
불면증, 불안증에 걸린 환자가 있었는데 3년이 걸려야 치료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여자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더니 석 달만에 완치되었다고 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마귀와의 영적 싸움이기 때문에 기도하면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저와 우리교회가 밀까부르듯 하는 시험을 당했지만 온 교회가 기도하고 저도 하루에 두 세 시간만 기도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그 모든 시험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기도는 역경의 시간을 승리의 시간으로 바꿀 수 가 있습니다. 기도는 최악의 상태를 더 큰 성공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불안과 근심은 무릎을 꿇으라는 신호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져야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피땀 흘리시기도 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문제 부딪치면 문제 보다 크신 창조주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기지 못할 시험은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34:4)
5. 하나님의 믿고 그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실패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혹은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시나보다 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생각은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갔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베드로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큰 사명까지 주셨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큰 죄를 범한 때가 있었지만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확신을 가지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잘못하면 사랑의 채찍으로 때릴 때는 있어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에게 모든 사람이 돌로 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실수가 없고 허물과 죄가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문제는 속히 회개하고 돌이키면 됩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그 자녀가 잘못했다고 저주하시거나 내버리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했고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위하여 좋은 계획을 마련해 놓고 계시며 도울 자를 마련해 놓고 계십니다.
6. 하나님의 보호를 믿어야 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10:29- 31)
종종 우리를 사로잡아 뒤흔드는 '두려움'은 인간의 일반적인 감정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두려워 할 아무런 이유도 없음을 참새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참새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앗사리온'은 당시 로마에서 통용되던 화폐 단위의 하나로서 '한 앗사리온'은 근로자들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1 데나리온의 16분의 1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헐값에 팔리는 참새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참새와는 비교할 수 없이 귀하게 창조하신 당신을 그냥 내버려두시겠습니까?
7.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사8:12,13)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29:25),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유명한 나폴레온 힐이라는 사람은 현대인에게는 7가지의 불안과 공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1) 가난에 대한 공포 (2) 실패에 대한 공포 (3) 질병에 대한 불안 (4) 사랑의 상실에 대한 공포 (5) 노쇠에 대한 공포 (6) 자유상실에 대한 두려움 (7)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갖가지 불안과 긴장과 초조는 우리의 삶의 피난처가 되시며, 인도자가 되시는 참 목자 하나님을 발견하기 전에는 결코 해결되지 아니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함과 안정을 주십니다.(시42:5, 시46:1-3, 요14:27)
인도에 이런 설화가 있습니다. 마술사가 쥐 한 마리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쥐는 단 한순간도 평안한 기색이 없이 불안과 초조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리 돌아보고 저리 돌아보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하고 살펴보니 고양이 때문이었습니다. 고양이가 언제 와서 덮칠지를 몰라 그렇게 불안해했던 것입니다. 마술사는 그 쥐가 불쌍해서 아예 고양이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고양이가 된 뒤에도 불안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이번에는 개 때문이었습니다. 개가 겁이 나서 한 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술사는 다시 고양이를 개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번에는 호랑이가 겁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또다시 호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천하무적의 호랑이가 되어서도 두려워하기는 매일반이 아닙니까? 바로 사냥꾼 때문이었습니다. 사냥꾼의 총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결국 마술사는 무슨 수를 써도 안되겠다는 결론을 얻고, 호랑이를 원래의 모습인 쥐로 돌이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요사이는 의사를 찾는 만성환자의 90퍼센트가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모두가 불안과 초조에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같이 불안과 공포로 나약해지고,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환경이나 여건에서 용기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불안과 두려움이 환경에 연유한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이 바뀌면 괜찮을 것이라고 여겨 직장도 바꾸어보고 거처도 옮겨보고 합니다. 심지어는 남편도 갈아치워보고 아내도 바꾸어봅니다. 그러나 소용없습니다. 환경이 바뀌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불안한 사람은 항상 불안합니다. 두려움에 떠는 사람은 항상 두려움에 떱니다.
정말로 강한 자는, 용기의 뿌리는 오직 신앙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신앙이 있는 자는 용기가 있습니다. 신앙이 시작되는 곳에 불안과 공포는 끝나고, 불안과 두려움이 시작되는 곳에 신앙이 끝납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 말씀 함께 봉독하고 마치겠습니다.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잠1:33),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라”(벧전 3:14).
*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려워서 주님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세상의 법도를 따라 행동할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도울 힘없는 사람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날마다 우리 안에 말씀의 은혜와 감격이 넘치도록 도와주소서. 저희 마음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하여 주시고 오직 내 속에 진리와 사랑의 열매로 채워 나갈 수 있도록 저희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머리털을 다 세실 만큼 우리들을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보호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어떤 두려움도 가질 필요가 없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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