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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긍휼이 마감되기 전에 (호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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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호세아 1:1~9
제목: 하나님의 긍휼이 마감되기 전에

현대는 두 가지 대표적인 흐름이 사람들의 삶의 주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정신사조입니다. 다른 하나는 뉴에이지라는 문화적 기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후기 근대주의’라는 말로 번역되는데, 세계 1차대전과 2차대전, 그리고 산업화를 겪으면서 인간 이성에 대한 좌절과 절대적인 존재라고 믿었던 신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생긴 사상적 흐름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절대적인 것을 믿기 보다는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보려 합니다. 모든 것이 흐트러지다 보니까 사람들의 생활을 주도하는 문화적인 면에서도 초긴장의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준다는 취지에서 뉴에이지 문화가 예술, 음악, 문학에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그런 사상은 심화되었습니다. 그 여파로 나타나는 것이 파격적인 디자인, 뇌살적인 자기 표현, 정통 가치관의 붕괴, 가정의 파괴, 개인주의의 팽배, 미신과 사행심의 증가, 포르노 문화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크고 작은 각종 문제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은 그야말로 지쳐있습니다.

전에는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이제는 아닙니다. 전에는 분명하던 것이 이제는 희미해졌습니다. 예전에는 가야 할 길이 뚜렷이 정해졌지만 지금은 길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없는 세상입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부지런히 뛰어보지만, 인생이란 덧없기만 합니다. 외치는 소리는 많지만 생명수는 말라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되내어 보지만 바쁘기만 한 일정에 자기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모처럼 휴가라도 내서 길을 나서보지만, 가는 곳곳 마다 차량과 매연으로 머리만 지근거립니다. 열심히 교회는 다녀보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형식이요, 일상의 패턴이 되어 진정한 경건이 묻어 나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은 잠잠히 눈감고 계실까요?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사실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란 사실 조차 잊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취해서 하나님을 잊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잊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멀리 멀리 떠났던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정색을 하시고 인생을 부도내 버리시겠다고 선언하시는 소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호세아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우리들처럼 이름을 지을 때,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을 짓습니다. 호세아라는 이름은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오래 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호세아라는 사람을 선지자로 부르셔서 그에게 전해야 될 말을 일어주시고 백성들에게 그를 보내셨습니다. 호세아가 하는 말을 잘 들으면 사람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넘기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나타나셔서 아주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1:2).

1. 음란한 아내와 음란한 남편

아마도 성경의 인물 가운데 가장 많은 오해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호세아 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호세아를 가리켜 ‘음란한 여인과 살면서도 그 여인을 포기하지 않았던 비운의 사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고멜은 온 세상의 음탕한 여인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식들은 모조리 사생자로서 음탕한 엄마가 간통을 하다가 임신을 해서 나은 자식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도대체 왜 호세아와 고멜이 그런 오해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호세아의 결혼생활은 호세아 1장과 3장에만 나옵니다. 그리고 고멜이란 여인은 1장에 등장을 합니다. 성경 어느 구절에도 고멜이 창녀라고 쓰여있지도 않고, 그녀가 밤낮없이 몸파는 일을 했다는 근거도 없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와 고멜 사이에서 낳은 세 자녀가 사생자라를 이야기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다만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호세아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서 선지자로 예언 사역을 하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도덕적 상황입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호세아로”라는 말씀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이는 “호세아를 통하여”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말씀을 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되 호세아를 통해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은 단순히 호세아에게 “너는 가서 이런 말을 전하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호세아라는 사람의 인생을 사용하셔서, 그의 삶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입술로만 말씀을 전했던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했던 자입니다.

2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착안하여 사람들은 고멜이란 여인이 창녀였다고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그런 식으로 읽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부분을 사람들이 억지로 들추어서 짜맞추어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호세아가 사역하던 시대에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남왕조를 유다라고 하고, 북왕조를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남왕조 이스라엘은 다윗의 왕통을 이어받은 나라였지만, 북왕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가는 패역한 백성이라고 성경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북왕조 이스라엘은 엘리사의 명령에 따라 예후라는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오므리 왕조를 붕괴시키는데 성공하여 정권을 장악한 후 수십 년에 걸쳐서 번영을 이룹니다.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에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북왕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등진지 오래되었고, 각종 우상숭배와, 이방신과 사술과 음행이 만연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셔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들어가서 종살이를 마친 후, 모세의 손에 이끌려서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시내산에 도착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시내산에서 ‘모세의 언약’을 맺으십니다. 모세의 언약은 ‘축복과 저주의 언약’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면 축복을 누리지만, 하나님을 멀리하고, 계명을 어기며, 우상을 따르면 저주를 내리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은 유다와 갈라지고 난 다음,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세월이 갈 수록 더 멀리 떠나갔습니다. 언약을 지켜야 할 언약의 백성이 가면 갈수록 ‘언약의 파괴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그들은 가나안의 우상과 잡신들을 미친 듯이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에서 금하신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치세기에 물질적 풍요까지 따르자 이스라엘의 타락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기라성 같은 선지자들이 등장하여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바로 살 것을 요구하였지만 번번이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따르고, 우상을 숭배하며, 세상에 혹하여 살아가는 것을 성경은 ‘음란한 행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부르신 때는 북왕조의 이스라엘의 죄가 극에 달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호세아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의 영적 현실을 말씀하시면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성경에도 창녀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을 상품으로 하여 매춘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도 따로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쓰인 ‘음란한’이란 말은 직업으로 몸을 파는 여인을 가르키는 말도 아니고, 매춘행위를 뜻하는 말도 아닙니다. 따라서 ‘음란한 아내’를 ‘매춘행위를 하는 아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당시 시대적 상황이 하나님을 향하여 음란한 세대였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나도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사 6:5). 호세아가 예언 사역을 하던 시대는 세상 자체가 ‘음란한 세대’였습니다. 고멜이 음란한 여인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음란한 세상에 살고 있는 여인이었던 고멜은 ‘음란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호세아도 ‘음란한 남자’였습니다. 호세아가 고멜이 아닌 다른 여인을 아내로 취했다고 해도, 그 여인은 역시 ‘음란한 아내’였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한 패역의 세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면서도 나 하나만 거룩하고 깨끗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깨끗하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나는 음란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호세아는 음란한 세상에서 아내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난 자식들도 역시 음란한 자녀였습니다.
이것은 호세아가 처한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입니다. 과연 북왕조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세상으로 향한 자신들의 삶이 ‘음란’이란 것을 깨닫는 자가 얼마나 있었을까요?
편리한 삶과 물질적 풍요에 안주하는 것이 ‘음란한 행위’인 것을 자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호세아는 아내를 보면서, 자식을 보면서 그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자식을 향하여 ‘음란하다’라고 평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하나님의 성전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부정한 백성 가운데서 살기 때문에, 나 역시도 부정한 사람이로다.”라고 자기를 깊이 통찰했던 이사야와 같은 심정을 가지지는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십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여기서 ‘지나간다’는 것은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는 뜻입니다. 이 지나가는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 영원히 거한다고 말씀합니다. 

2. 전쟁보다 강한 하나님의 긍휼하심

어떤 사람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호세아의 세 자녀인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가 사생아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 없는 주장입니다. 3절에 보면 고멜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 원문에 보면 “호세아의 아들을 낳으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루하마라는 딸도 로암미라고 하는 아들도 모두 고멜이 호세아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들 입니다.

이스르엘은 “하나님이 심으셨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고, 로루하마는 “나의 긍휼이 없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며,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기의 젖을 2~3년이 지난 다음에 뗐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 명의 자녀를 낳기까지는 약 5~6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비록 짧지만 적어도 5~6년의 세월에 걸친 사건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이스르엘이란 이름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북왕조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셨습니다. 셋째 아이를 얻기까지 호세아는 이스르엘을 보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고 음란하게 살아가는 북왕조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견하며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호세아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세월 동안 하나님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고 계속해서 음란한 행동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제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하시면서 “로루하마”라고 하십니다.

북왕조 이스라엘을 향하여는 멸망을 말씀하시면서, 이제 남왕조 유다를 향한 배려도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다 족속에 대한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구원하심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이 긍휼은 그냥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젖먹이 엄마가 아기에게 갖는 ‘애절한 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연약하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있는 유다에 대하여 긍휼을 베푸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북왕조와는 다르게 이방 나라에게 멸망 당하지 않고 구원을 얻도록 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7절에 보면 구원하시되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재미난 구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활, 칼, 전쟁, 말, 마병이란 5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가장 가운데 있는 단어는 “전쟁”입니다. 전쟁을 가운데 두고 그 앞에는 ‘활’과 ‘칼’이 나옵니다. 그리고 전쟁이란 말 뒤로는 ‘말’과 ‘마병’이 나옵니다. 전쟁은 전쟁이되 한 쪽에서는 활과 칼로 전쟁을 합니다. 활과 칼은 보병을 말합니다. 다른 한 쪽에서는 말과 마병으로 전쟁을 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기갑부대입니다. 육군 부대가 고지를 향하여 진격해 들어가는 것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인간 나라는 다른 나라와 전쟁을 수행할 때, 이처럼 칼과 활과 말과 마병을 가지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무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칼과 활과 말과 마병을 구합니까? 이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젖먹이를 향하여 애절한 마음으로 아이를 품는 어미와 같으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문제는 그럼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하실까요? 본문에서는 유다 족속이 긍휼을 받습니다. 그들이 긍휼을 받는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었습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됩니다. 전쟁보다 강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우리를 넉넉하게 이기게 하시고 모든 시험과 환난에서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환난과 시련을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약의 백성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그 누구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입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이 우리에게 언제나 넘치는 것을 확신하며 주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3. 결국 하나님의 긍휼에서 끊어진 언약의 백성

본문 9절 말씀은 호세아 전체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멜이 낳은 세번째 자녀의 이름을 로암미라고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로암미란 ‘나의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이름을 제시하십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우리 한글 개역 성경은 이 부분을 원문에 맞게 번역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출애굽기 3:14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여기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는 ‘야웨 / 여호와’라고 합니다. 야웨란 영어로는 ‘I am’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호세아 1:9에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다시 번역하자면 “나는 너의 ‘야웨’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공식 명칭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식 명칭은 ‘야웨’였고, 이스라엘의 공식 명칭은 ‘백성’이었습니다.

9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 조상 모세와 더불어 공식적인 언약을 맺었다. 그런데 너희는 끊임없이 나와 맺은 그 언약을 파기시켜 왔다. 그 동안 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내가 축복과 저주의 언약을 맺을 때, 만일 너희가 나와 맺은 이 언약을 파기하면 내가 너희를 거절하겠다고 분명히 명시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너희의 야웨가 아니다. 그리고 너희도 이제 더 이상 나의 백성이 아니다.”

이 말씀은 언약의 무효를 선언하는 대목입니다. 물론 호세아는 절망의 책이 아닙니다. 언약의 파기로 인하여 그들에게 남은 것은 징계뿐입니다. 그 징계를 통과한 후,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들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호세아의 나머지 부분에서 우리는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아닙니다. 회복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징벌을 내리시기 전,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파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십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은혜의 날”이요, 구원 얻을 때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고후 6:2). 그러나 이런 은혜와 긍휼의 날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끝나고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들에게 심판이 임하는 그 날이 우리 앞에 예비되어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따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11).

결론

호세아는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 선지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찬 음란한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세상에 호세아를 보내셨습니다. 음란한 세상에서 음란한 아내와 음란한 자녀와 살았습니다. 그의 아내 고멜과 그의 자녀들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호세아와 고멜과 그의 자녀들이 거하던 세상이 음란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며 살았습니다. 오랜 세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음란한 삶에 대하여 길이 참아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 긍휼을 거두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은혜의 시대요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우리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긍휼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생명의 언약을 믿음으로 맺은 자들입니다. 남왕조 유다를 하나님은 긍휼이 여기시고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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