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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을 주옵소서 / 눅 11:5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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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눅11 : 5 - 13절
제 목 : 성령을 주옵소서

9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우리 가운데 이 구절 모르는 교인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아니한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교인들이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또한 기도를 한 두 번 해봅니다만
기도가 중심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기도의 장애물을 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장애물이 무엇인가? 하면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바로 기도의 장애물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신앙생활에서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은 마귀가 집어넣어 주는 생각입니다.
8절 마지막에 보세요.
오늘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예화에서 결론이 무엇인가? 하면
그 소용대로 주리라 입니다.
이 말은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기도하면 소용대로 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소용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소용대로 주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기 위해
우리의 기도의 자세에 첫 번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명분보다 강청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기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한 가지 예화를 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밤 중에 친구가 찾아 왔는데 대접할 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음식을 꾸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불을 끄고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친구니깐 깨워 음식을 달라고 해보자 하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 친구야 밤중에 미안하지만, 떡 세 덩이만 좀 꾸어주라 ]
[ 야 자는데 제발 귀찮게 굴지마라 내일 오너라 ]
[ 친구야 귀찮은 줄은 안다마는 떡 세 덩이만 꾸어주라 ]
[ 에이 귀찮아 죽겠다, 내가 친구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2>안주면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아 준다 ] 하고는 떡을 빌려 준 것같이
8절 [벗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고 합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기도에 관한 교훈은
기도는 명분보다 강청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보면
현대인들은 하나님과의 명분만 과시하느라 기도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목사 장로 권사 집사니깐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실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믿음이 있는척 폼을 잡습니다만
사실은 그 명분이 나의 신앙을 대변해 준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착각하고 있는 직분자들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직분자가 될 때에는 그래도 기도합니다.
그러나 되고 나면 기도 안 하는 것 있지요.
명분보다 중요한 것이 강청하는 기도입니다.

그럼 나는 강청하는 기도가 어떤 기도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강청하는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신다면
강청하는 기도란 어떤 기도인지
성도로서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 볼만하지 않겠습니까?
강청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귀찮게 달라고 졸라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체면상은 구할 자격이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 붙들고 강청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주십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가만히 보면 기도의 교훈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강청하는 기도를 기뻐하심을 여러 군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0장 34절에
성막 안 증거궤 앞에 향을 피우게 되어 있는데
그 향품 종류가 소합향과 나감향, 풍자향과 유향 등의 향품 이름이 나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도 항상 이 향기가 나야 합니다.
계8장에 향은 성도들의 기도이며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 성소에서 가장 거룩한 회막안 증거궤 앞에 놓여 있었던 향, 지금도 그 향과 같은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며
거룩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이 어떤 향인지 잘은 모르지만
공통점 한 가지가 있는데 다 진액이라는 것입니다.
나무의 진액을 짜는 것과 같이 우리의 진액을 짜내는 기도, <3>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기름을 짜는 듯한 기도,
예수님이 몸소 본을 보이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설교 듣고도 깨닫지 마는
삶 속에서 체험할 때 진가를 맛볼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강청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실까?
강청의 의미가 무조건 뻔뻔스럽게 달라고 하는 기도를 말할까?

한번은 목양실에 있으니 젊은 세댁이 목사님 축복 기도를 해 달라고 해요. 사실 설교 준비하고 있는데 조금 귀찮키도 한데
막무가내로 밑에서 기다리겠데요.
[ 기도 제목이 무엇인냐? ] 하니 [ 헤헤 하면서 그냥 이래요 ]
그래서 저도 그냥 기도해 주었지요.
그런데 아멘 하고 나니 [ 목사님 우리애기한테 따로 축복기도 해 달래요? ]
그런데 이상하죠?
[ 귀찮은 마음이 삭 없어지고 야! 이 친구 봐라 믿음 있는데 싶어
축복, 축복 ] 하고 따불로 했죠.
강청이 그냥 떼쓰는 기도가 아니라
믿음에서 나오는 기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뻔뻔스럽게 달라고 하는
강청하는 기도의 사람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강청의 또 한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8절을 보세요.
친구됨을 가지고서는 받을 수 없지만, 강청함을 가지고서는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인데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 보세요.
친구가 된 그 정도의 관계를 가지고는 끝까지 요구하기 힘들다는 것이고, 주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끝까지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습니까?
바로 자녀가 아버지에게 할 때입니다.
아무리 널려 있는 것이 떡과 고기일지라도 자녀가 아닌 이웃집 아이가 와서 문을 두드리고 달라고 한다 해서 내 자녀처럼 날마다 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아이도 자기 부모도 아닌 사람에게 줄 때까지 칭얼거릴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아버지와 자식의 친권적인 가족 관계 안에서만
이 약속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기도해야 할 것을 강조하시면서
9절에 세 번씩이나 같은 말을 다른 표현으로 강조하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세 번씩이나 강조하시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예수님 이전 유대교에도 기도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4>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도는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행위였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면 저들에게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기도에 대한 세 가지 확신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사람이 기도하면 그 기도는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왕관을 만들어 하나님의 머리에 얹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기도는 인간의 죄악과 상관없이
천사가 깨끗하게 만들어 상달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 기도는 아무리 반복하여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기도는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이런 기도의 전통을 더욱 강화시키신 것입니다.
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비판하시면서
주님께서 친히 1-4절에 모범적인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기도는 명분보다 강청해야되 하시면서 9절에
" 구하여라, 주실 것이요, 찾아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열어 주실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마음 문을 열고 자신을 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척척 부어 주신다면,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께서 한번의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끈질기게 하는 기도를 기다리시는 것은,
그 끈질긴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끈질긴 기도를 하게 하시므로
우리를 자기에게로 더 가까이 이끄실 뿐 아니라
우리로 더 강인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주도한 세력이 있다면 평안도 사람들입니다. <5>
평안도는 조선조에서 푸대접받은 지역이었는데,
기독교 복음이 그 지역에 먼저 전파되면서 불이 붙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평양이 그 중심이 되었습니다.
오랜 역사적 고난을 헤쳐 온 강인한 성격에 믿음이 들어가면서
뜨거운 신앙의 열정으로 한국 교회를 주도하였던 것입니다.
부흥회나 새벽기도회나 철야기도회가 모두 이들에게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해방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이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남쪽의 교회들도 이들의 열심을 배워 교회들이 성장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영락교회였는데,
오늘날 그 영락교회의 쇠퇴는 한국 교회의 기도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로 기도하게 하시는 까닭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생명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이 점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깨달을 때
그 앞에 나아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우리의 속사람은 기도로 호흡을 합니다.
기도를 멈추는 순간
그 생명의 호흡이 멈추어지기에 우리는 곧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힘이 내 속에 들어와
넘치는 신앙의 활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능력 주시는 분 안에"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능력이 내 속에 흘러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무력한 것은
"능력 주시는 분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가 당면한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예언자적 비판과 제사장적 돌봄을 교회가 주지 못한 것은,
교회가 예언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며, 사랑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능력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리라"고 하신 것은, <6>
무엇인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요,
그 장애물을 없애 버려야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생명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구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부족함을 뜻하는 것이며,
'찾아라'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음을 뜻하며,
'문을 두드려라'는 것은 문이 닫혀 있음을 뜻합니다.

오늘 내게 무엇이 부족합니까?
오늘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오늘 나의 삶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습니까?
우리가 매일 기도해야 할 이유는 이런 장애물들을 청소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하면 이런 장애물들이 놓일 시간이 없지만,
기도를 멈출 때 마귀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계속 장애물들을 쌓아 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다가 어쩌다가 기도하면
우리 스스로 답답함을 느끼는 까닭은
바로 마귀의 장애물들이 잔뜩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집안을 청소하듯이 기도로 청소를 하면
우리의 영의 세계가 깨끗하지만,
청소를 게을리 하여 쓰레기가 잔뜩 쌓이는 것처럼
기도를 게을리 할 때 우리의 영적 세계가
온갖 세상의 더러운 욕심들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문제가 계속 일어날 때에는
여러분의 기도의 생활이 어떠한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매일매일 기도하시므로 여러분의 영적 생활을 깨끗이 청소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명령이나 약속을 재차 강조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절에 왜 또 한번 거듭 말씀하십니까?

[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 합니다.
이렇게 세 번씩이나 그리고 또 따블로 같은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희망의 약속이 깃들여 있습니다.
구하면 받고, 찾으면 찾아지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기도는 단순한 심리요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에는 반드시 응답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응답이 때로는 더디게 오기도 하고 즉각 오기도 하지만, <7>더디다 할지라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면
반드시 그 응답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 바로 이 약속의 내용입니다. 또 때로는 그 응답이 우리가 원하였던 것과는 다른 형태로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좋은 것"으로 응답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내일 가족 여러분, 지금은 열심을 내어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열심을 빼앗아 간 물질문명의 헛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오늘날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무엇인가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가정이나 교회가 바르게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다시 기도의 열심을 내십시다.
새벽기도회나 철야기도회에 열심히 나오시기 바랍니다.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우리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든 장애물들을 청소하기 위하여
더 열심히 기도하십시다.
기도만이 오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기도만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시137:7절에
[ 이스라엘아,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주님께만 인자하심이 있고, 속량하시는 큰 능력이 그에게만 있다 ] 고 합니다.
기도의 생활을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과 교통하므로 영적 건강을 회복하며, 예수 믿는 나로 말미암아 살 맛나는 세상 만들어 가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면
거듭 거듭 응답해 주겠다고 약속을 해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야, 이 만큼 말해도 기도 안 하는데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하지 아니하시고
다시 비유를 들어 우리에게 실감이 나는 말씀을 하십니다.

11절 이하에서
[ 너희 중에 누가 아비가 되어 아들이 생선 달라 하는데 뱀을 주며
알을 달라고 하면 전갈을 줄 자가 있느냐?]
[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십니다.
즉 이 말씀은
야, 너희가 나를 믿는다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을 보니
최소한 부모 자식간에 가장 기본적인 친권적인 믿음도 없구나
아무리 악한 부모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 <8>
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너희는 나를 어떻게 보느냐?
너희 육신의 아버지 수준도 안되는 줄 아느냐? 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친권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생선과 뱀, 알과 전갈을 대비시켜서 말씀하십니다
이 둘은 모양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속성은 정 반대입니다.
전갈은 사막의 거미입니다. 전갈이 다리를 오무리면 새알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알인줄 알고 건드렸다가는 쏘이게 되는데
독성이 얼마나 강하지 전갈에 쏘이면 사람이 죽게 될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러한 극단적인 비유를 하고 계실까요?
그것은 육신의 아버지도 절대로 실망시키거나 해를 기치는 법이 없는데 하늘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최상의 것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우리의 기도 응답에 최상의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의 기도의 비유를 통해 하신 말씀의 요지는
기도는 명분보다는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더라도 강청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반드시 응답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고 응답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그 이상의 말씀입니다.
응답 정도가 아니라 응답을 하시더라도
최상의 것으로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똑 같은 기도에 관해 기록한 마태복음 7:11절에는
[ 너희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고 하십니다.
여기에 좋은 것은 바로 최상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 응답은 반드시 최상의 것으로 하십니다. 그 최상의 것이 바로 성령인 것입니다.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최상의 것은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떡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 평생 떡을 먹고도 남을 수 있는 경제력을 주십니다.
돈을 달라고 하면 성령님이 돈을 벌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엡3:20절에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9>
[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이 ] 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기도로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뿐 아니라 넘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교훈 하시는 바는
기도해라 그것도 명분보다 강청하는 기도해라
그리하면 내가 응답해 주겠다
내가 응답할 때에는 최상의 것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교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왜 우리가 강청하기까지 기도하되 성령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까요?
왜 예수님은 기도를 하려면 강청하는 기도하라고 해놓고
갑자기 "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합니까?
우리들에게 정말 간절히 기도하고 애타게 부르짖었던
기도의 순간들이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 개인적인 일과,
주변의 일에 대해서 그렇게 기도한 적은 많지만,
성령님을 받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던 일은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내용, 기도의 자세를 가르쳐 주시다가,
갑자기 결론을 '성령을 받으리라' 라고 하시는 말씀에
의아함을 가지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여 강청함으로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기도제목은
" 성령을 주옵소서 "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강청하기까지 체면불구하고 뻔뻔스럽지마는
이것만큼은 믿음 가지고 구해야 할 것은 바로
[ 내게 성령주시옵소서 ] 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좀 안다고
[ 목사님 나는 예수 믿을 때 성령 받았는데요 ] 하고
[ 성령을 주시옵소서 ] 라는 기도를 접어 두고 신앙생활 한다면
삶에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령은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본문말씀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주고 싶어하는 선물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2) 성령은 아무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강청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재미있는 개구리 우화가 있습니다. <10>
개구리 두 마리가 우유 통에 빠졌습니다.
개구리들은 이제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한 개구리는
[ 어떻게 여기에 빠져가지고 재수없게 죽게 되었는고? ] 하고
절망하고는 죽을 바에야 우유나 실컨 먹고 죽자 하고는
배가 뽕양하여 네 다리짝 뻗고 죽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개구리는
[아니야 나는 살아야 해 ] 하고는 막 헤집고 돌아다녔습니다.
이 개구리가 바로 성령충만한 개구리입니다.
성령충만한 개구리는 밤새도록 헤집고 돌아 다녔는데
그 밤 사이에 우유가 치즈로 변해서 통 밖으로 펄쩍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 장로교 교인들은 너무 체면이 강해요.
그래서 앉아서 누워서 당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강청하기까지 성령을 구해야 합니까?
그것은 성령 안에 모든 좋은 것이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다가 보면 역부족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좌절하고 낙망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 목사님도 좌절하고 실망될 때가 있습니까? ] [ 있지요 ]

지금 새벽기도회에 부교역자들이 사도행전 강해 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인데 성령행전이 시작되기 까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50일이 지나고 부터입니다.
그 50일이 어떤 기간이었습니까?
제자들에게는 죽을 맛 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40일은 실패와 좌절 속에 죽지 못해 사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낙망하게 하고 좌절하게 합니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성령받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받으면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10일 동안을 성령 받기 위해
진액을 짜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기도회가 열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실망과 좌절 앞에서 기도하다가 성령받아
장벽이 무너지고 길이 열리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임하면,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
이 말은 자녀도, 청년도 늙은이도 성령받으면 희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론>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명분이 아니라
강청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응답을 하시되 최상의 것으로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그 최상의 것은 성령입니다.
무언가 부족하거든
무언가 잃어버렸거든
무언가 막혀 있거든
성령을 주옵소서~! 라고 강청하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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