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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예수를 믿으라. / 행 16: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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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믿으라.
사도행전 16장 31-34절

어떤 마을에 한 사나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나이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첫 번째 친구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늘 첫 번째 친구를 가까이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친구는 첫 번째 친구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소중히 여기고 가까이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친구는 만나기만 하면 이래라 저래라 요구만 하고 귀찮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친구지만 될 수 있으면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루는 왕궁에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왕이 법정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틀림없이 내가 무슨 잘못한 것이 있구나. 왕이 나를 처벌하기 위해서 출두 명령을 내렸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자기가 제일 친하다고 생각하는 첫 번째 친구에게 가서 왕궁에 함께 가줄 수 있느냐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첫 번째 친구가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하며 낙심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에게 찾아갔습니다. 하소연을 하면서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친구가 말했습니다. "좋다, 내가 같이 가주기는 하겠는데 왕궁의 문까지만 같이 가겠다. 그 다음은 너 혼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크게 실망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친구에게 갔습니다. 별 기대도 하지 않고 내가 이러이러한데 함께 갈 수 있느냐고 했더니 세 번째 친구가 두말없이 가겠다고 했습니다. "물론이지. 내가 함께 가주지. 내가 자네에 대해서 다 알고 있지 않나? 내가 왕에게 가서 자네가 틀림없이 결백한 사람이라고 말하겠네."라고 하면서 따라나섰습니다.

이 이야기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왕의 법정은 하나님의 심판대입니다. 누구나 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친구는 물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물질은 절대로 같이 따라가 주지 못합니다. 물질은 아무리 쌓아도 소용없습니다. 바벨탑과 마찬가지로 와르르 무너지고 맙니다.
두 번째 친구는 우리의 친척, 친구들입니다. 부모형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무덤까지는 따라와 줄 수 있습니다. 무덤에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애도해 줄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친구는 탈무드에서는 지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변호해주십니다. 우리의 두 손을 높이 들어주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 한 분만 의지하면서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면서 따라갈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천국까지 안전하게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31-34절 말씀은 바울과 실라 선생님께서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감옥에 갇혀다가 하나님의 기적으로 옥문이 열려 출옥한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에 보면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 바울과 실라가 드리는 기도소리와 찬송소리가 깊은 밤, 깊은 옥에 메아리쳤습니다. 그 기도와 찬송소리를 다른 죄수들이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날 밤 두 사람의 그 기도와 찬송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찬송 역시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찬송은 소중하고 위대하고 힘이 있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고 했습니다.
지진으로 땅이 흔들리면서 옥문이 열리고 손발의 착고들(수갑들)이 풀어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옥문을 엽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닫힌 문을 엽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맺힌 것을 풀고, 묶인 것을 풉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은 고난과 고통과 억울함을 무릅쓰고 기도하고 찬송했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망적 사건 앞에서 절망하면 절망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절망적 사건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기도하고 찬송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할 수도 있고 소망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감사할 수도 있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할 수도 있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찬송할 수도 있고,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감사하며 기도하고, 찬송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 아침 함께하신 여러분들은 절망이 소망으로, 불평이 감사로, 낙심이 기도로, 원망이 찬송으로 변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은혜를 받게 되기를 주님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이 그날 밤 감옥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던 그 시간에 절망하여 자결하려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옥문을 지키던 간수였습니다.
기적과 절망이 교차하는 현장에서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부르짖는 간수를 향하여 바울이 전한 메시지와 메시지를 받은 간수의 변화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1. "주 예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주경학자들은 이 구절을 구원의 가능성과 연쇄성을 밝힌 구절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가능성과 나도 구원받고 가족도 연쇄적으로 구원받는다는 구원의 연쇄성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당 가는 길은 단 하나 예수밖에는 없습니다.
내 영혼이 죄사함 받고, 내 가정이 구원받고, 이 나라가 구원받고, 이 민족이 구원을 얻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딱 하나 오직 예수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 말고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 예수 믿어야 천국에 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나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 죄를 사하시고, 나를 죄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구원받고, 믿어야 천국에 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나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2. 구원받고 난 후의 삶의 변화입니다.

바울은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간수와 그 가족 모두가 들었습니다. 그 결과 33절에 보면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예수를 믿었다는 말이요,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결과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본문 34절에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의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고, 간수는 그 사람들을 지키고 감시하는 사람입니다. 사적인 접촉도 안되고 특별대우를 해서도 안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를 영접하고 난 뒤 바로 바울과 실라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예수를 알게 해 주고, 예수를 전해준 바울을 예수님 대접하는 심정으로 대접한 것입니다.
예수 믿고 은혜 받고 나면 일상용어, 곧 말이 달라집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이란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태도도 달라집니다. 겸손해지고 부드러워지고 편안해집니다.
어떤 부인이 예수 믿고 한 석달 되었는데 막 입이 간질간질 하는 겁니다. 남편은 안 믿는데 교회에 가니까 목사님이 "할렐루야!" 그러니까 교인들이 "아멘!"하는데 너무 은혜가 되고 좋은 겁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면 남편에게 "할렐루야" 그랬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야 너 미쳤냐" 그랬대요.
예수 믿으면 말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 날 그 간수는 죄수인 바울을 초대합니다. 상처를 씻기고 약을 발라줍니다. 음식을 대접합니다. 정성을 다합니다.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남편을 대하는 태도, 아내를 대하는 태도, 형제를 대하는 태도, 이웃을 대하는 태도, 남을 대하는 태도, 어른을 대하는 태도, 주님의 종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변화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예수 믿고 오래되고 교회에서 직분도 맡고 난 후 행동과 말이 거칠어지고 난폭한 성격으로 변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경우입니다.
간수는 죄수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매맞아 상처난 자리를 씻기고 음식을 대접하는 등 지극한 정성으로 섬겼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보면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형제 사랑은 주님 사랑의 표시입니다. 주의 종을 사랑하는 것도 주님을 사랑할 때만 가능해집니다.
둘째, 크게 기뻐했습니다.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부 번째 변화입니다. "기쁘다, 평안하다, 행복하다, 감사하다, 좋다"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간수의 "온 집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고, 간수와 그 가족들은 그 말씀대로 온 집이 믿고 구원받고 크게 기뻐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온 집과 온 가족이 그리고 모든 가정들이 행복해지고, 평안해지고, 살맛나고, 좋고, 웃고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업에 성공해 떼돈을 벌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주식에 투자해 떼돈을 벌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퇴직금을 몽땅 털어 주식에 투자를 했습니다. 예배시간에도 휴대폰을 켜놓고 주식등락을 들여다 보고있습니다. 올라가면 웃고, 내려가면 한숨쉽니다. 기도하려고 눈감으면 주가 등락표가 눈에 떠올라 "주여!" 한다는 것이 "주식!"한다고 합니다.
성공을 하고 권력을 잡고, 출세를 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간수의 집안이 기쁨이 넘치고, 행복이 넘치게 된 이유는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대로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기쁜 것입니다.

현대가정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고백하고 사랑하는 그 믿음만 회복한다면 오늘 우리네 가정도 기쁨이 넘치는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삶도, 기쁘게 사는 것도 예수 믿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 떠나면 개인도, 가정도, 국가도 지옥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하면 초막도, 궁궐도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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