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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의 아들 / 요 12: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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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아들 / 요 12:34~37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그 죽음의 의미와 영광과 축복을 여섯 가지 의미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죽음은 땅에 떨어져 썩는 한 알의 밀알과 같은 것입니다. 밀알의 비유는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라 영적인 교훈입니다. 둘째, 십자가의 죽음은 고통이지만, 하나님의 뜻이고 섭리며 계획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넷째,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생과 축복을 주는 것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 임금을 추방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모든 인간을 주님 앞으로 이끄는 사건입니다.


‘인자’로 오신 예수

예수님께서 십자자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셨지만, 많은 사람들은 메시아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계속 질문을 합니다. 34절 말씀입니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율법은 사람들에게 ‘메시아는 영원히 존재하는 분’이라고 교육했습니다. 구약에서 ‘메시아’라는 단어를 썼지만, 신약에 들어와선 헬라어로 ‘크리스토스’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메시아는 그리스도와 같은 말입니다.
34절에서 사람들은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라고 질문합니다. 구약에서 메시아는 고통, 슬픔, 절망, 좌절 등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고 전쟁, 패배, 포로 생활, 죽음 등을 종식시키시는 분입니다. 마치 일제시대 때 우리가 해방과 독립을 기다렸던 것처럼, 로마에 점령당한 이스라엘 민족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목말라 했고 메시아는 그들의 희망이며 전부였습니다.
그 메시아가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메시아에게 ‘너는 스스로 인자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인자가 무엇이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인자’는 문자 그대로 사람 인(人), 아들 자(子)입니다. 즉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라는 단어를 매우 독특하게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사복음서에서 69번, 요한복음에서만 12번을 사용하실 정도로 인자라는 말은 특별한 개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 성경으로 ‘인자’라는 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우리에겐 해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왜 인자라고 표현할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인자라고 말하는 자가 정말로 사람의 아들이라면 특별히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사람의 아들인이면서 동시에 사람 이상의 존재, 하나님의 아들, 영존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실 때 예수님께서 ‘인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과 신의 아들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매우 독특한 개념입니다. 다니엘서 7장 13,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 나오는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사람이긴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 위에 계신 분, 영원하신 분, 하나님의 아들, 참 메시아의 의미가 인자라는 말에 모두 포함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이며 우리와 같은 사람의 아들이어야 한다는 말이 바로 ‘인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빛’

사람들에게서 인자에 대해 질문을 받고, 예수님께서 인자의 특성을 상징적인 단어로 간결하고 분명하게 설명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빛’입니다. 이 설명은 예수님의 마지막 공적 설교입니다. 요한복음 13~17장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적으로 설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의 특성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의 마지막 공적 설교이며 3년 동안 자신에 대해 하신 말씀의 결론 부분에 해당합니다. 35, 36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감을 의미하는 짧은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빛이란 말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 빛은 단순히 어둠을 밝히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땅에 떨어져 썩는 한 알의 밀알이 예수님을 가리키듯, 빛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단어입니다.
그래서 보통 ‘빛’이라는 단어를 쓸 때 영어로 ‘라이트(light)’라고 하는데 35절과 36절에서 ‘빛’은 정관사 ‘더(the)’를 붙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보통 빛이 아닌 ‘바로 그 빛’이라는 뜻입니다. 태양, 전깃불, 촛불처럼 어둠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바로 그 빛(the light)’이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35절과 36절에 ‘빛’이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오는데 네 번은 정관사가 붙고 마지막으로 나오는 빛에는 정관사가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긴 표현입니다. 정관사가 있는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빛입니다. 정관사가 없는 빛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이런 의미로 35, 36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바로 그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바로 그 빛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동안에 바로 그 빛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어둠을 떠나 빛으로 오라

‘바로 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해 네 가지 메시지를 남기십니다.
첫째, ‘바로 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잠시 동안 사람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메시아도 영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도 영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로 오신 메시아는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므로 이제 사람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잠시 동안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은 ‘이 메시아는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메시아는 영원히 지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때가 차면 그분은 제자들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는 ‘잠시 동안’이라는 말을 새겨 봐야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잠시 동안 지상에 계시다가 하늘로 가실 분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빛이 있는 동안 어둠에 붙잡혀 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빛은 어둠의 반대 개념입니다. 어둠의 특징은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길은 빛이 있을 때 찾을 수 있습니다.
어둠이 깔린 세상에서는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길을 찾지 못하면 곧 절망하고 맙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채 두려움에 싸이게 됩니다. 그러면 불안하고 우울해지며 나중에 병들어 죽게 됩니다. 인간은 희망을 잃어버리면 짐승과 같아지고, 빨리 죽음을 맞게 됩니다. 희망을 가질 때에 병과 암도 이기고 위기와 절망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잃으면 모든 것이 꺾이고 맙니다.

캄캄한 밤길을 걸어 본 적이 있습니까?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 여기저기 다녀본 적이 있습니까? 어딘지도 모른 채 한 발자국을 내디디면 낭떠러지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다면, 몸서리쳐지듯 두려웠던 그때를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곧 어둠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둠에 익숙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어둠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칠흑 같은 현실이 어둠이라는 사실은 빛을 바라볼 때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어둠에 있고 그 어둠에 익숙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빛이 있으니 그 빛이 있는 동안 어둠에 다시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태양이 떠 있습니다. 바깥으로 나와 햇빛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햇빛이 싫어서 지하로 들어가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신세대의 특징에 대해 한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낮을 싫어하고 밤을 좋아합니다. 햇빛보다 달빛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잠자는 것을 싫어하고 태양이 떠오르는 새벽을 싫어합니다. 여러분이 태양을 사랑하고 빛을 좋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빛이 있는 동안 그 빛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빛을 찾는 것이요, 빛을 믿는 것이요, 그 빛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어둠, 저주, 절망, 좌절,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는 방법은 철학이나 논리도 아니고 학문이나 돈도 아니며, 명예나 권력도 아닙니다. 오직 빛만이 그 세력들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빛이 임하면 어둡고 암울하던 내 영혼은 생기가 돌고 신선해지집니다.
빛이 있는 동안 어둠은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추우면 불 곁으로 가면 됩니다. 배가 고프면 참지 말고 밥을 먹으면 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배고픈 사람이 제아무리 ‘배고픈 귀신아, 물러가라’고 외친다 해도 배고픔은 여전합니다.

외로움을 느낄 때 사람을 만나면 됩니다. 외롭다고 하면서 사람 만나기를 거부한 채 비판만 일삼고 있으면 더욱 외로워집니다. 제가 보기에 외로움은 본인 스스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도 싫고, 저 사람도 싫다며 모두 쫓아버린다면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빛과 어둠은 공존하지 못합니다. 빛을 비추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과 귀신도 공존하지 못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단호하게 도전하십니다. 빛이 있는 동안 그 빛을 믿으며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에 붙잡히지 않고 그 빛 안에 살게 될 것입니다.


불신앙 버리고 빛의 자녀로

넷째, 빛이 있는 동안 그 빛을 믿으면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고, 빛 안에 들어와 살면 빛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입니다. 어둠의 자녀는 카인의 후예입니다. 그들은 착하게 살고 싶어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부정, 비판, 음란, 거짓 등 어둠의 세력이 독버섯처럼 계속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저주, 죽음, 어둠의 세력에게 지배당합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꾼이 됩니다. 상상하지도 못한 새로운 삶을 살게됩니다.

제가 연예인교회에서 섬길 때 유명한 연예인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말 95퍼센트가 욕이었습니다. 입에서 아주 쉽게 욕이 나옵니다. 제가 전도했던 분인지라 ‘이제 욕 좀 그만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제가 욕을 하지 않으면 입이 근질근질해요. 말끝마다 욕을 넣어야 말을 한 것 같아요.” 오늘 저는 성도님들의 입술에서 욕이 사라지길 축원합니다. 저주의 말이 사라지길 축원합니다. 분노하고 화내는 것이 사라지길 축원합니다.

빛의 자녀가 되면 입에서 자꾸만 찬송이 나옵니다. 이전에 입으로 욕을 했더라도 사람들에게 축복을 말하고 성경 말씀을 암송하게 됩니다. 빛의 자녀는 방황하지 않습니다. 빛의 자녀는 더 이상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설명해 주셨지만, 사람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 말씀의 언어와 문구는 알고 있었지만, 속뜻은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말과 문구만이 아니라, 그 뜻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 시간 동안 인내심으로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들으면서 성령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신앙 때문에 듣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불신앙이란 단순히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현상이 아니라 영적인 현상입니다. 불신앙의 깊은 곳에 어둠의 영이 있습니다. 기적이나 표적을 보게 되어도 ‘그래도 안 믿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불신앙입니다.

불신앙의 깊은 곳에 오만과 교만이 있습니다. 이성과 논리와 합리성을 뛰어넘는 교만이 불신앙입니다. 단지 논리에 맞지 않고 사리에 맞지 않으며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 어둠의 영이 있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유로 ‘비합리적이다, 비논리적이다, 비상식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방어를 위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앙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36절 하반부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공적 활동은 끝이 납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모이십니다. 그것은 공적 활동이 아니라, 열두 제자들을 불러놓고 개인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혹시 우리 마음에 불신앙이 있다면 그 어둠의 영이 깨지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불신앙은 이성이나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오만, 교만, 거짓 등이 뿌리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를 성령의 칼로 잘라내고 성령의 불로 태워버려야 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온유해지기를 축원합니다. 또 모두 빛을 받아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탄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인 빛의 아들이고 세상을 밝히는 축복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이 빛을 비출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여긴 모인 사람들에게
빛의 아들이 되는 축복을 주신 분은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 이 빛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이
나타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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