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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세 부모의 믿음 -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무서워하는 경외심 /히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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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모세 부모의 믿음 -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무서워하는 경외심 

<서론>

오늘의 한국의 교회가 보완하고 극복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가 교회가 자꾸 여성적, 여성화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자매들이 숫자적으로 많아진다는 표면적인 것이 문제가 아니고 교회가 도전적 정신을 잃어버리고 지나치게 심미적 성향으로 치우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도전적인 정신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적 배경을 고려하면, 세상을 거슬러 올라갔던 출애굽기의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가 더욱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작은 자들 안에서부터 성령께서 믿음의 용기와 담대함을 일으켜 주시기를 기대해 봅니다.

<본론>

히브리서 11장, 지금까지는 창세기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고 이제는 출애굽기에 출연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을 살펴 봅니다.
출애굽기하면 단연 모세가 떠 오르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평범한 예상을 뒤엎듯이, 모세 이전에 모세의 부모의 믿음을 먼저 제시합니다.
모세의 부모는, 아버지의 이름은 아므람, 어머니의 이름은 요게벳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모세의 부모의 믿음의 모습으로 증거해준 것은 그들이 서슬퍼런 바로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아들을 석 달 동안 숨겨서 키웠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을 무역대국으로 만든 국가적 영웅이기 때문에, 요셉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말할 것도 없고 요셉이 죽은 이후에도, 애굽사람들이 한 동안은 요셉의 명성을 기억하여 그 후손들을 우대하였지만, 세월이 점차 흘러 마침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의 시기, 질투의 대상을 넘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습니다.

왜 사람은 원한은 바위에 새기고 은혜는 강물에 새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애굽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요셉의 은혜는 쉽게 잊어버리고 갈수록 많아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제는 눈에 가시처럼 여깁니다.
마침내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마구 구박합니다. 구박을 해도 이들은 질경이처럼 끈질기게 잘 자라는지라, 마침내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많아지는 것이 두려워서 이스라엘 아이 중 남자 아이는 강물에 던져서 다 죽이라고 하고 여자 아이만 살려 두라는 왕명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자, 이 남자 아이, 모세를 석 달을 숨겨서 키웁니다. 그리고 석 달 후에 이 모세를 강물에 던지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띄워서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모세를 바로의 딸이 발견하고 모세를 자기의 양아들로 삼게 되고, 히브리 사람 유모를 찾으니 요게벳이 유모가 되어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엄마의 젖을 먹으며 엄마의 품에서 사랑의 기도를 받으며 자라가게 됩니다.

모세의 부모가 석 달 동안 모세를 숨겨 키운 것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아름다운 아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 보면 "..he was no ordinary child.." 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유명한 설교 중에 의하면 <행7:20>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달을 길리우더니"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굴이 이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고대유대사'에 의하면,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서 이 아이가 보존될 것이며 애굽에서 히브리 백성을 구원해 낼 구원자가 될 것임을 확신시켜 주었다(Josephus, Ant.ii, 210이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그 아이의 외적 수려함이 그들을 감동시킨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외형을 보시지 않고 마음을 보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이에게는 미래의 탁월성을 나타내주는 어떤 표식이 있어서 그 아이가 보통아이가 아니라 약속을 수반한 아이임을 증거해 주었다."

모세의 부모는, 단순히 남자아이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서 숨겨서 키운 것이 아니고 또 아이가 그냥 죽이기에는 넘 잘 생겨서 살려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아이가 하나님의 뜻을 받은 아이임을 어떻게든 나타내 주었고 모세의 부모는 임금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계시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말씀하셨다 할지라도, 아므람과 요게벳에게서 모세를 숨겨 키운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 남자 아이를 키우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그들에게는 "남자 아이는 죽이라"는 임금의 명령을 거역하는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다 들키면 어떡합니까? 들키면 죽음이지요. 임금의 명령을 거역하는 데에는 "만약 들키면 기꺼이 죽으리라,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정신이 아므람과 요게벳에게는 있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정신, 세상을 거슬로 올라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공통적인 믿음의 정신입니다. 모세의 부모에게도 이 믿음이 돋보입니다.

모세 부모의 믿음, 임금의 명령을 거역한 것으로 나타난 것은, 아이에 대한 집착이 남다른 사람이거나 혹은 그들이 "뭐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그렇지 않아도 살림살이 어려워서 아이들 키우기도 만만치 않았지만, 죽이라고 하니까 내가 오기로 더 살려둔다.." 오기쟁이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세 부모의 믿음은 임금의 명령을 거역하여 자신들이 죽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계시에 순종하는 마음, 일사각오의 신앙입니다. 눈에 훤하게 보이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임금의 명령을 따라야 할 것인가, 세상의 다수가 따르지 않고 무시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걸고 따라야 할 것인가 사이에서 그들은 묵숨걸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모세부모가 임금의 명령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이 담대한 믿음, 용기의 정체(identity)는 무엇인가? 세 가지로 나누어서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믿음은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의식하는 정신(精神)입니다.

사람은 그냥 느낌이나, 충동적으로 믿음의 행동을 하지는 못합니다. 더욱이 모세의 부모처럼 석 달 동안이나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에라 모르겠다"는 충동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갈등 앞에서 그들의 마음 안에서 곰곰 생각이 되고 생각이 숙성되어 결론에 다다르는 과정이 있습니다.
안전하게 임금의 명령을 따를 것이냐, 치명적 위험요소가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소리와 하나님의 계시를 따를 것이냐 그 갈등의 과정 가운데, 아므람과 요게벳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에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 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한 의식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여기에 민감한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흠없이 행동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의식은 없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식, 사람에게 잘 보이고, 그래서 사람들의 존경과 인기에 중심이 붙잡힌 것, 사람의 영광에 목매면, 이 사람은 바리새인이 됩니다. 바리새인의 내면의식이 이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그릇된 종교 행위들 지적할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거듭 거듭 깨우치심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거기에 대하여 칭찬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당신의 모습을 칭찬하면 예수님께서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앙생활을 배울 때, 어느날 내가 지금 기도하는 것이 사람들 들으라고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가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지금까지의 기도는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한동안은 같이 기도할 때, 사람들 들으라고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연습을 부단히 해야 했습니다.

예배 중에 대표기도할 때, 당신의 마음은 사람을 의식합니까? 하나님을 의식합니까? 그렇다고 난 안할랍니다,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 앞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공중기도할 때, 대표기도할 때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연습하십시오.

예) 지난 주 가족찬양대회 때, 정's family나 옥탑방...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들은 참 자유인이구나,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구나.. 존경하는 마음을 갖았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의식에서 자유하지 않으면 그렇게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름다우니까 아름다운 연출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 왜 다윗이 법궤가 자기 지경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뻐서 왕의 체통도 잊어 버리고 덩실덩실 춤을 추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울의 딸 미갈이 그 모습을 보고 비웃지요? 다윗과 미갈, 하나님 의식하며 사는 사람과 사람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의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넓혀 가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예배당에서만, 개인적으로 큐티할 때만, 아니면 돈이 쪼들릴 때에만 하나님을 찾고 의식했었는데, 이제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도,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식구들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예수님은 이런 때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넓혀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진수(眞髓)이고 이것을 하나님과 동행이라고 합니다.

종교개혁가들이, 청교도 신앙인들이 신앙과 삶의 모토로 삼은 것, "하나님 앞에서(Coram Deo)"가 이를 가리킵니다. 믿음은 사람들 보다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의식하는 정신입니다. 이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의식할 때에 성령께서 그 마음에 용기와 담대함을 불어 넣어줍니다.
복음 전하면 죽어? 위협하는 권력자 앞에서 베드로가 말했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행4:19>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 담대함과 용기가 어디에서 납니까?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더 크게 의식하는 정신에서 비롯됩니다. 당신도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더 크게 의식해 보십시오. 성령께서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과 용기를 당신의 마음 안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둘째로, 믿음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아므람과 요게벳, 이들은 살던 때는 요셉의 때가 아닙니다. 아마도 이때는, 다들 애굽의 노예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인들 집단 거주지, 게토처럼 그렇게 모여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이 석 달 동안 이 아이가 남자아이가 아니라고 숨겨야 하는 대상들은 우선적으로 애굽의 군대가 아니라 동료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아므람과 요게벳이 생각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같은 핏줄이니까, 내가 몰래 사내아이 키워도 이들이 보호해 주겠지 생각했다면, 큰 낭패를 겪었을 것입니다. 만약 모세의 부모가 사람들을 의지하여 동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말하고 "우리 애는 넘 아까워 도와줘!" 하며 보호해 달라고 하였다면, 아마도 "내 아들은 강가에 버렸는데 넌 뭐야, 넌 왜 안 버리는거야?" 이렇게 말할 사람들 있었을 것이고 애굽의 관리들에게 고자질하는 사람들 있어서 큰 낭패를 당하고 "같은 핏줄인 너희가 그럴 줄 몰랐다"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았기에 석 달 동안 모세를 숨겨 키우고 그리고 그 후에 하나님만이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믿음에서 강가에 띄웁니다. 성경은 모세의 부모가 바로의 딸이 강가에 놀러 나오는 때를 맞추어서 아이를 강가에 띄웠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그들이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전혀 몰랐으나 그러나 아무 사람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뜻이 분명하실진대, 이 아이를 어떻게든 살리시리라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로서 아이를 강물에 띄워 보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상상도 못했던 방법으로 모세의 부모의 믿음에 응답합니다. 바로의 공주가 요게벳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출2:9>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아이가 살 길을 찾은 것뿐만이 아니라 요게벳이 양육비를 받으면서 그 품 안에서 키웁니다. 정직히 하나님을 의지하였을 때, 종종 하나님께서 깜짝 놀라도록 우리에게 응답해 주심을 경험합니다.
예) 양은순 여사의 간증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신앙생활의 성숙과 능력을 경험하는 중요한 원리가 이것입니다. 사람을 의존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의존하십시오.
반대로 오래도록 교회생활을 하지만 신앙생활이 답보 상태에 머무르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사람을 의존하는, 의존적 태도입니다.
현대에 제자훈련이 교회 안에서 다시 눈 떠졌을 때, 목자와 양이라 표현하든, 리더와 follower로 표현하든, 멘토링이라 하든, 요새는 크리스찬 코칭이라는 표현도 사용합니다, 일대일 관계를 통하여 신앙생활을 배우는, 관계 중심의 사역을 할 때에 많은 유익과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일대일 관계 사역의 큰 위험성으로 지적되는 것은 자칫 의존적인 관계를 고착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끈질기게 잠재해 있는, 가르치는 자에게 있는 소유와 집착욕과 배우는 자에게 있는 의존감정이 딱 맞아 떨어져서 정작 둘 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은 못 배우게 되는 부작용이, 많지는 않지만, 치명적 위험요소로 지적됩니다.
이와 관계해서, 예수님은 열 두 제자 키우고 그들에게 올바른 정신과 꿈이 새겨져 있음을 확인하고 떠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 관계 피라밋을 만든다거나 자기 휘하에 사람을 두려는 이상한 발상은 예수님의 마음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하나님 한분 의지하는 믿음이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실제로 강건해지기 위하여, 사람을 의존하지 않는 것, 내 마음 안에 다른 사람을 기대고 싶은 의존감정을 벗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위에 계시고 사람들은 옆에 있습니다. 옆으로 기댈 것이 아니고 위를 바라보고 똑바로 서는 것을 배우기를 힘쓰십시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목사는, 인도자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의존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도록 돕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목사가, 인도자가 하나님처럼 기대했을 때 아마도 큰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목사는, 인도자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하였을 때, 하나님처럼 행하려고 하였을 때.. 크게 낭패를 겪을 것입니다.
하나님 한분 의지하여 바로 서기를 소망하며 배우기를 힘쓰십시오. 하나님 한분 의지하고 바로 섰을 때에, 그 때에 비로소 당신의 심령에 자유와 당당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진짜 협력, 팀웤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배웠을 때에 가능합니다. 오늘 설교가 차갑고 무정하게 느껴지나요?
예) 김진홍 목사님 -

사람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는 약속, 이 말씀은 여러분 마음에 꼭 새겨 두십시오.
<렘17:5-9절>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사람을 의존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존하기를 힘쓰십시오. 그것이 어느 사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비로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셋째로. 믿음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경외함입니다.
모세의 부모, 아므람과 요게벳이 임금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결정적인 동인은 그들은 하나님을 더 무서워하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여러 칼라의 삶 너머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그들은 알고 바라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무대가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끼는 이 땅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도리어 정작 중요한 운명이 결정되는 곳은 이 땅 너머, 저 하늘에 있음을 그들은 선명히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을 넉넉히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이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부모가 임금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이 세상에서 보이는 임금의 칼의 위협은 잠시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 속담에 '언 발에 오줌누기'라는 말이 있지요? 당장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잠시 따뜻함을 누리기 위하여 오래도록 더 춥고 차가움을 생각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지요.
이 땅에서 그냥 평안하게 살려다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하는 것은 더욱 큰 어리석음임을 모세의 부모는 알았습니다.
도리어 잠시 고난을 받더라도, 그러다 죽임을 당할지라도 영원의 운명을 좌우하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 이 땅에서의 어떤 사람도, 어떤 위협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담대함을 낳습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을 때가, 어떤 때는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을 때가 왕왕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볼까요? 어느 교회가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면, 그 교회 목사가 일군들을 불러다가 뭐라고 말할 것같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 대박 터졌다!!!" 대부분은 이러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도 인간이지 하나님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회가 바람을 타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수로 몰려올 때에, 그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해 주실 것 같습니까? "봐라, 내 능력 봤지? 나만큼 센세이션을 일으킨 사람 이 세상에 없었어.." 이랬을 것같습니까?

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한번 볼까요? <눅12장> 보십시오. 뭐라고 합니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바리새인의 누룩,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바리새인의 가르침.. 인간 중심의 가르침, 사람에게 매혹적으로 들려지는 세상의 영광, 사람의 영광을 자극하는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사람들의 인기를 누리고자 하는.. 이 가르침을 사람들이 몰려 올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의를 줍니다.
그리고 나아가 <4,5절> 보십시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넣는 권세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세상의 권력자들, 권세가들.. 어느 사람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의 말씀과 연관하면, 사람의 인기, 사람의 평판에 연연하지도 말고 어느 사람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연연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비결을 명확히 가르쳐 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영원의 운명을 좌우하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영원의 운명을 좌우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그러면 세상의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 줄리앙 황제 앞에서의 젊은이.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는 자유의 능력, 담대함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당신의 마음 안에도 이 믿음의 자유와 담대함을 베풀어 주십니다.

<결론>
믿음은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의식하는 정신입니다.  믿음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믿음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경외함입니다.
오늘 당신의 마음은 무엇에 더 예민하여 있습니까? 사람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믿음의 능력과 담대함은 하나님께 더 민감한 마음에서 경험됩니다.
기질적으로 유약했던 제자, 그래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던 제자, 디모데에게 바울이 상기시켜 주었던 이 말씀을 당신도 마음에 새기고 기억해 보십시오.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여 기죽지 마시고 비굴해지지 마시고 도리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바로 서 보십시오. 비로소 자유하며 비로소 다른 사람을 의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보람과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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