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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 단 3:13~18 (마 10:16~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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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본문: 다니엘 3:13~18 (마태복음 10:16~21 참조) 
2003년11월30일 설교 

 
  대림절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절기는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대림절의 색을 고난을 의미하는 보라색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대림절의 기다림은 고난의 자리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린 것도 고난의 자리에서였습니다. 그들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는 망했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 노예처럼, 아니 노예보다 더 비참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기다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의 기다림은 편한 자세로 차나 마시며 사랑하는 님을 기다리는 낭만적인 기다림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니엘서는 바로 그런 고난의 자리에서 기록된 인내와 저항, 그리고 믿음의 증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는 그리스 왕의 폭정 아래서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에피파네스라는 이름은 신의 나타남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안티오쿠스 자신이 이 세상에 나타난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을 신격화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저항하는 것은 모두 다 악으로 취급했습니다. 기원 전 168년에 그가 예루살렘에 쳐들어왔습니다. 그 때 그가 저지른 만행은 유대인들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을 약탈했을 뿐 아니라 제단 위에 돼지를 제물로 올려 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매우 혹독하게 유대인들을 억압하여 그들의 신앙을 말살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당했던 고통과 그에 따른 투쟁 이야기는 외경인 마카베오서에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여간 거룩한 성전이 이방인들에게 마구 짓밟히고 부정한 짐승으로 제단을 더럽힌 것은 유대인들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너무도 절망적이었습니다. 그토록 고통스럽고 또 절망스러운데 과연 어떻게 그들을 위로할 수 있었겠습니까? 과연 그들이 어디서 소망을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과연 그들이 무엇을 통해서 새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역사를 돌아봄으로써 현재의 고난을 이길 힘을 얻을 수 있었고 또한 미래에 대한 소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란 지나간 이야기를 단순히 회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란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해석하고 또한 미래를 바라보는 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역사를 망각하는 백성들에게는 결코 미래가 있을 수 없다고...

  유대인들이 그 고난의 자리에서 거듭 역사를 되새겼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지금 그들이 겪고 있는 것과 같은 고난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던 그 놀라운 역사를 다시 발견했습니다. 그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지금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의 자리에도 하나님께서 다시금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조들에게 주셨던 그 약속을 자신들의 꿈과 소망으로 다시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믿음과 소망으로 그 구원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기다림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관리로 임명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바로 그들입니다. 비록 포로 신분이지만 그들은 편하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제국을 현실로 인정하고 왕에게 충성을 바치면 더 출세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가리켜서 지혜롭다고 합니다. 하여간 적당히 타협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금으로 된 신상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그의 위세에 걸맞게 거대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과연 세계를 지배하는 바벨론 제국의 왕답지 않습니까?

  이제 모든 사람은 음악이 흘러나오면 그 신상에 절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명입니다. 만약 그 누구라도 그 어명을 어기면 가차없이 타는 불에 던져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어명을 어긴 자들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바로 그들입니다. 감히 왕의 어명을 어겼습니다. 왕 앞에 끌려온 그들은 비록 늦었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신상에 절하면 살려 주겠다는 왕의 마지막 호의마저 거절했습니다. 배은망덕이 따로 없습니다. 크게 진노한 왕이 그들을 뜨거운 풀무불 가운데 던지게 했습니다. 그 풀무불은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달구어졌습니다. 불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그들을 붙들고 있던 병사들이 다 타 죽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토록 뜨거운 불 속에 던져졌는데 그 속에서 그들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거닐고 있었습니다. 놀란 왕이 황급히 명을 내려 그들을 꺼냈습니다. 그들의 몸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옷도 전혀 눌지 않았습니다. 불에 그슬린 냄새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다니엘서는 그리스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유대인들을 심하게 박해하던 시절에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안티오쿠스의 박해가 기록되어 있는 마카베오서를 보면 그 때는 전혀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안티오쿠스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항복의 표시로 돼지고기를 먹도록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요구에 굴하지 않고 불에 던져졌습니다. 타는 불 속에 던져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순식간에 타죽었습니다. 살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참으로 처참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현실은 지독하게 냉혹했을 뿐입니다.

  바로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를 유대인들은 기억해내고 되새겼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는 한가한 소설처럼 기억하고 또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고난의 자리, 아니 죽음의 자리에서 거대한 권력에 굴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디며 기억하고 기록한 것이 바로 다니엘서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는 오고 오는 세대 속의 모든 고난 당하는 사람들의 믿음과 소망과 기다림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가 주는 믿음과 소망과 기다림의 근거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 속에서 그 대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들은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여기서 풀무불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끝입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마지막입니다.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를 거부하다가 끝을 맞게 되었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그 뜨거운 풀무불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죽음도 그들을 삼킬 수 없었습니다. 그 맹렬하게 타는 불길도 털끝하나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그 까닭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불 가운데 그들만이 아니고 또 다른 동반자가 있었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불 가운데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네 번째 사람이 누구입니까? 느부갓네살의 증언을 듣습니다.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단 3:25) 무슨 말입니까? 다 끝났다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 죽음의 자리,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습니다.

  심한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다니엘의 이 세 친구 이야기가 용기와 소망을 주는 까닭은 그 때 그 불 속에 함께 계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과 또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 절망 중에 동행하시는 하나님,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바로 여기에 참 소망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다림의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구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 증거가 아닙니까? 아버지께 버림 받은 고통으로 절규하셨던 주님의 그 십자가, 바로 거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습니다. 때문에 죽음의 그 십자가가 오히려 구원과 생명의 능력이 되지 않았습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로 그 믿음으로 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맹렬히 타는 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단 3:17)

  그런데 오늘 이어지는 그들의 말 속에서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과 같이 빛나는 또 다른 믿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저 뜨거운 불 속에서도 분명히 구해 주실 것이지만, 그러나 만약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소망과 기대가 수포로 돌아갈지라도 결코 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불 속에 던져져 순식간에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날리게 될지라도 결코 굽히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죽음도 어쩔 수 없는 참으로 굳센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지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은 마치 어린 양이 이리 떼 가운데 거하는 것과 같이 위험합니다. 고난이 필연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를 지켜 주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사자 굴 속에서 다니엘을 지켜 주신 주님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계십니다! 고난의 현장에 함께 계시며 친히 지켜 주실 것이며 마침내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여러분 모두 지금 여기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신비한 기쁨과 사랑과 평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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