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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핍박을 이기는 사람들 / 행 14: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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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을 이기는 사람들
사도행전 14:19-28 


바울의 제 1차 전도여행은 구브로섬에서 시작하여 →비시디아안디옥→이고니온→루스드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더베 지역까지 연결되고 있습니다.
바울 일행이 장소를 바꾸어가면서 복음을 전하게 된 첫 번째 이유는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구브로섬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견디기 힘든 핍박이 있었고 그래서 새로운 장소로 선교지를 옮기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바울에 의해 치료되어져 일어서서 뛰는 모습을 살폈습니다.
그러자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을 <신>처럼 생각하면서 제사까지 지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핍박은 계속됐습니다. 어떤 핍박입니까?

1.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의 핍박이었습니다.

19절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핍박해서 루스드라에 와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들이 루스드라가지 찾아와서 핍박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루스드라까지는 170Km,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까지는 45Km 나 되는 거리를 달려와서 바울을 핍박하고 루스드라 주민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쳤으며 죽은 줄 알고서 성 밖에 내다 버렸습니다.
여기 무리를 <초인>했다는 말은 <설득하고 설복 시킨다>는 말로 유대인들이 루스드라 사람들을 갖은 말로 설득해서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제거하고, 오히려 그들이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을 무시하는 자들이라고 확신하게끔 하여, 루스드라 사람들과 합세하여 바울을 죽을 정도로 쳤던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핍박받으면서, 또 어떤 때는 피해 다니면서 전도하고 전도하고 또 전도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의 놀라운 확장을 가져왔고 그 과정 속에서 여러 기적들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면서 사도들에게 영광을 돌리려 했지만 그때마다 사도들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얼마나 충성스런 일꾼들입니까? 그들이 축복 받을만하지 않습니까? 만사 형통할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결과는 19절에 말씀한 대로 돌로 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열심히 할 때가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문제를 가슴에 안고서 금식하고 철야하며 기도하기도 하고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 쉬지 않고 전도하기도 합니다.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시간 바치고 물질 바치고 땀 흘려가며 열심히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잘 지켜주시고 축복 주실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오히려 문제가 생깁니다. 어려움이 생기고, 문제에 부딪힘이 생기며 가로막는 장벽이 생깁니다.
그러면 우리는 항변합니다. <열심히 했는데 왜 지켜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포기하고 주저앉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만사 형통하는 게 아닙니다. 열심히 하기 때문에 축복만 받고 건강하고 성공만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되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환난을 당하셨습니다. 천국의 확장을 막는 무리들이 핍박하고 또 핍박하다 결국엔 십자가에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열정적인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야고보도 칼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베드로도 어마어마한 핍박을 받았고
바울도 상상을 초월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받았다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핍박이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믿는 자들에게 핍박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앞으로도 핍박을 계속 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핍박받는 우리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주님은 우리가 핍박을 당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에 우리에게 담대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핍박이 몰려오든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이 이기셨으니 나도 이길 수 있다>는 담대한 자세로 핍박을 맞이할 때 그 어떤 핍박일지라도 능히 이길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한번의 핍박, 한번의 문제 앞에 무너져 버린다면 그는 십자가의 용사가 아닙니다.
무술 영화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영화 속의 주인공이 화살 하나 맞았다고 싸움을 포기하던가요? 화살을 맞고 창에 찔리고, 칼에 상처를 입어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용사의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용사는 한번의 상처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핍박이 몰려온다고 도망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결코 비겁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20, 21절을 보시면 바울은 십자가의 용사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20,21절 보세요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유대인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 밖에 버렸습니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성안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성안에는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나면 다시 죽일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들어갑니다.
왜 들어갈까요? 복음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 날 더베로 장소를 옮겨 복음전파를 계속하고 많은 사람을 예수님 믿게 만들었습니다. 죽은 줄 알았을 정도로 바울의 몸 상태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어나자마자 다시 전도자의 길을 갑니다.

바울의 모습은 한마디로 전도하다가 죽겠다는 자세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입니까?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는 사람입니다. <죽일 테면 죽이라>는 사람,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겐 무서울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난 번 미국 테러 사건 때 범인들이 목숨을 아끼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런 짓 못합니다. 죽겠다면서 비행기 몰고 건물에 충돌하니 어떻게 막겠습니까? 폭탄을 몸에 감고 죽겠다고 뛰어오는 사람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바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제 자신을 돌이켜 봤습니다.
몸살만 나도, 감기에 조금 심하게 걸려도, 속이 조금만 쓰리고 아파도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럴 때는 설교준비도 못하고 기도도 못합니다. 회복 될 때까지 몸조리를 해야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토록 죽어가면서까지 그 길을 갈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전도할 수 있도록 순식간에 상처를 말끔히 씻어주셨고 아픔을 순식간에 없애주셨기에 전도 할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바울은 상처가 쉽게 회복되는 특별한 체질의 사람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살핀 것처럼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죽을 정도로 돌에 맞았으니 하루가 지났다고 해서 어느 정도나 회복되었겠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바울이 어떤 사람이길래…, 고민하는 저에게 하나님은 해답을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이 사는 것은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중심에 자신은 다 사라졌고 예수님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충만으로 차고 넘쳤습니다. 사람은 한번 죽지 두 번 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한번 죽어버린 사람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게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봉사하다 주저앉는 것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힘으로 하는 게 아니고 내 자신의 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덜 죽었기 때문에 실망하고 , 포기하고, 싸우고, 내 이익 추구하고, 내 자존심 생각하고, 큰소리치며 화내고, 혈기 부리고, 질투하고…죽지 않았거나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에겐 자기 이익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자존심이 있습니까? 죽은 사람에게 아무리 욕을 하고 때리고 흉보고 짓밟은 다 한들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죽은 사람입니까 산 사람입니까?.... 구원받았습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겐 여러분이 사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처럼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합니다.
예수님으로만 가득하여 예수님만 나타내십시오. 성령 충만하여 성령 하나님만 나타내십시오.
그럴 때 우리도 바울처럼 죽어가면서도 전도할 수 있습니다. 손해보고 희생하면서 끝까지 충성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갈 수 있습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사명 감당에 최선을 다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방 선교의 사명을 포기한다면 누가 그 길을 가겠습니까? 바울이 죽어가면서도 복음을 전한 결과 더베 지역의 수많은 사람이 구원받았는데 만약 바울이 포기했다면 누가 더베 지역의 영혼을 구원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 선교사로 세우셨기에, 그래서 어떤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가는 것입니다.
내가 힘들다고 내 사명 포기하면 그 힘든 길을 누가 가려고 하겠습니까? 내 길은 내가 가야합니다.
내 사명은 내가 완수해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내 안엔 예수님만이 존재하실 뿐입니다. 설익은 의사가 사람 죽인다는 말처럼, 절반만 죽지말고 제대로 죽어서 예수님이 욕먹는 일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열 사람이 도둑 한 명 못 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전도하지 못하도록 기를 쓰고 막았지만 바울을 막지 못했습니다.
복음의 확장은 날로 날로 더해갔을 뿐입니다. 복음이 중요한 사람은 다른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다른 것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복음을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어떤 핍박이 오더라도 복음을 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넘지 못할 산은 없습니다. 넘지 못할 파도도 없습니다.
우리 갈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하다 할지라도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이 대신 가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이 예수님과 비교되고 바울과 비교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지시며 죽으시기까지 핍박 받으셨고, 바울은 죽음의 위협을 수 차례나 받으면서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핍박 중에도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가셨고, 바울도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가야되지 않겠습니까? 사명의 길 끝까지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경우도 가야할 길을 포기치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더베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코스입니다. 더베에서 많은 사람을 믿게 한 뒤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귀환하는데  곧장 안디옥교회로 돌아가지 않고 전도했던 지역을 거쳐서 되돌아갑니다. 
루스드라에서의 핍박이 어떠했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지경이지 않았습니까? 이고니온과 안디옥에서의 핍박도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지역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22절과 23절에 있습니다. 자신들이 전도한 사람들을 흔들리지 않도록 굳게 세워줄 필요가 있었고, 그들의 교회에 지도자들을 세워서 교회가 든든히 서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먼저 2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2절에서는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①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굳게 하는 것은! 마음을 강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더욱 강화하라. 더욱 신앙을 확실하게 가지라는 말입니다.
마음이 약하면 믿음이 흔들립니다. 사단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동원하여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니 마음이 약하면 넘어갑니다. 마음이 약하면 한마디 말에도 믿음을 버릴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더욱 더 걱정이 됐을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굳은 반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누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무슨 유혹을 하고, 무슨 방법을 동원해 흔들지라도 시험에 들지 말고 믿음을 포기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내 믿음은 내가 지켜야지 남이 지켜주는 게 아닙니다. 제가 아무리 여러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한다 할지라도 믿음을 지켜주지는 못합니다.
내가 주저앉았을 때 일어서는 것을 남들이 도와 줄 수는 있지만 일어서는 것은 내 자신의 몫입니다. 
믿음을 잘 지키십시오. 잠깐의 즐거움, 잠깐의 유익, 잠깐의 힘든 것 때문에 믿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즐겁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나라는 더 즐거운 곳입니다.
세상의 축복이 유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축복은 더 크고 무궁무진합니다.

요즘 마약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과거엔 특수 계층의 사람들만 마약을 찾았는데 요즘엔 무차별적으로 광범위하게 마약이 확산되고 있다고 합니다.
마약은 일시적인 쾌락은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손대기 시작하면 곧바로 파멸입니다. 인생 파탄입니다. 

마약을 하다가 예수님 믿고 돌이킨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선교회가 있습니다. 그 분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마약이 주는 황홀함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끊지를 못합니다. 끊을 수 있는 방법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마약보다 더 큰 황홀함을 줄 수 있는 것이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중독자들은 자꾸만 강도 높은 마약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엄청난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황홀함이 마약이 주는 황홀함보다 훨씬 더 컸기 때문에 마약을 끊을 수 있었고, 끊은 뒤에 계속 된 유혹 앞에서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 믿는 게 마약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신나는데 왜 되돌아가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 믿는 것보다 더 큰 축복도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이 설령 값어치있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일시적일 뿐입니다.
그러나 진짜 값어치있고 진짜 좋은 것은 예수님 안에 있고 그것은 영원토록 주어집니다.

세상의 부귀와 명예와 행복이 아무리 좋다한들 예수님보다 더 좋을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황금으로 집을 꾸며 호화스럽게 산다한들 천국의 아름다움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믿음을 지킵시다. 절대로 포기하지 맙시다.
믿음 지키는 것 때문에 망해야 된다면 기꺼이 망하시기 바랍니다.
믿음 지키는 것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죽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지키면 영원히 망하지 않고 성공자가 되고, 믿음을 지키면 일시적으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 것이요,

반대로 믿음을 포기하면 영원한 멸망인데 어찌 믿음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어떤 유혹이 몰려올지라도 믿음을 굳게 지키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바울이 22절에서 말하는 두 번째 내용이 무엇입니까?

②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환난 없는 신앙 생활은 없다는 뜻입니다. 신앙 생활은 많은 환난을 동반합니다.
신앙 생활은 영적인 전쟁과 같습니다. 그래서 악한 사단은 끊임없이 유혹하고 핍박합니다. 힘든 환난을 끊임없이 제공합니다. 그러니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 생활을 곧 만사형통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 때문에 축복 받고, 형통할 수도 있지만 환난도 만만치 않게 다가옵니다.
신앙 생활하지만 사업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믿지만 알거지가 될 수 있고, 질병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생길 수도 있고, 대학에 재수, 삼 수해도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편안하게만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쉽게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쉽고 편안한 것으로 생각하니까 제멋대로 신앙 생활합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필연적으로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 누가 환난이 두려워 피해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에서 벗어났음을 반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태도를 세상은 용인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박해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경건에서 벗어나도록 공작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가도 포기하고 세상으로 돌아서기 도합니다.
사실 세상의 환난을 기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환난의 정확한 성격을 확실히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환난 자체는 괴롭습니다. 견디기 어렵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롬 5:3-4).

성경은 천국에 이른 자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계7:14)로 묘사합니다.
여러분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왕궁에서 일생을 편히 보낼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히 11:24-26).
여러분 모세가 왜 그토록 고난 받기를 즐겨했습니까? 다름이 아닙니다. 애굽에서의 생활이 그의 육체를 편케할지는 모르지만은 그것은 죄악의 낙입니다. 거기에는 영원한 심판과 멸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당하는 고난에는 가나안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어리석은 결정이겠습니까? 잘못된 선택입니까? 이제 깨달음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대한 자각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은 세상 쾌락을 향한 무사안일의 삶입니까? 아니면 천국을 향한 모진 고난의 삶입니까? 비록 힘들고 고단하지만 천국을 향한 소망 가운데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고 굳건히 그 길을 걷는 하나님 귀한 백성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나라 가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들어가기가 어렵고 많은 사람들이 포기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어떤 환난을 겪어도 괜찮습니다. 가난해도 천국 들어갈 수만 있다면 괜찮습니다. 가난이라든가 부자라든가 그런 것은 예수님 믿는 목적이 아닙니다. 만사 형통하는 것도 예수님 믿는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 믿는 목적의 첫 번째는 구원 얻어 천국 가는 것입니다. 부자 되고 성공하는 것은 제2, 제3의 목표는 될 수 있지만 그런 것이 진짜 목표는 아닙니다.
요즘 가정을 중요시 여기는데 가정의 행복도 신앙의 목표는 아닙니다.
주일 날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 갖기 위해서 예배를 포기할 수 있습니까?
주일 날 장사가 잘된다고 예배 시간에 장사하고 있을 수 있습니까?
이웃이나 직장동료들과 좋은 인간관계 유지하기 위해서 교회 생활 그만 둘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천국 갈 수 있다면 포기해야합니다. 요즘 신앙인들은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신 차리고 잘 깨닫도록 합시다.
지금 대학 입시철입니다. 고3학생이 밤잠 안자고 공부할 때 대학에 들어간다는 보장만 있다면 잠 안자고 공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잠을 자기 위해서 대학을 포기한다면 그게 학생입니까?
오늘 고생해서 내일 잘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고생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당장 고생하지 않겠다고 내일의 성공을 포기한다면 얼마나 미련한 사람입니까?

우리의 목표는 하늘나라입니다. 그곳에 갈 수만 있다면 핍박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가난도 문제되지 않고, 힘든 것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새벽에 잠 못 자는 것 문제되지 않고, 자존심 상하는 것 문제되지 않습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문제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문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나라엔 들어 가야하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데 필요하다면 어떤 환경, 어떤 문제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 생활하다 시험 들었다며 교회 생활을 중단합니다.
목사가 헌금 설교했다고 시험 들고, 교우관계 때문에 시험 들고, 일 많이 시킨다고 시험 들고, 잘못한 것 지적했다고 시험 듭니다.
그게 잘한 것입니까? 어이가 없어서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천국에 갈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결코 천국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솔로몬이 인생의 말년에 무엇을 고백했습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라고 고백했습니다.
솔로몬이 누구입니까? 최고의 권세자, 최고의 영화, 최고의 지혜자, 1000명의 여인, 그리고 은금을 돌과 같이 흔하게 사용하였던 사람입니다.
세상 최고의 모든 것을 다 누려봤던 그가 인생 말년에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부르짖었습니다.
우리가 설령 세상 모든 것을 얻는다 한들 천국을 얻지 못하면 그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23절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교회마다 장로들을 택하여 교회를 잘 돌보도록 하였습니다. 전도하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교회 세워 놓고 끝난 게 아닙니다. 전도한 성도들과 세운 교회를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바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야 자신들을 선교사로 파송했던 안디옥교회로 돌아왔습니다.

2. 둘째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교회로 돌아와서 보고합니다(24-28).

27절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파송한 수리아안디옥교회에 돌아와서 그 곳 교회를 모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선교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 자리가 얼마나 감동적인 자리였을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선교가 자기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역이 되시며, 바로 그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셔서,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역사 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고, 가는 곳마다 믿는 자가 더해 갔다고 선교 보고를 했습니다.

그 보고 속에는 ①박수 엘루마가 잠시동안 소경이 되고 그로 인해 구브로 바보의 총독 서기오 바울이 미음을 갖게 되었던 일(13:9-12)과
②비시디아 안디옥이 제자들이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했던 일(13:52),
③그리고 루스드라 성에서 선천적인 앉은뱅이가 말씀 한마디로 일어난 사건(14:8-10),
④그리고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일(14:19-20)을 포함해서 주로 하나님의 기적적이 능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들을 보고했을 것입니다.
핍박이 있었고 생명의 위험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힘을 주셨고 사명의 길을 계속 걷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감사의 보고, 기쁨과 눈물의 보고, 감격의 보고가 넘치는 자리에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파송의 주체였던 안디옥교회 성도들의 감격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약 2년여의 1차 전도 여행기간 중에 구브로가 변했고, 비시디아 안디옥이 변했으며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가 변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그처럼 어마어마하게 변화시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면 됩니다. 선교가 쉬운 게 아닙니다. 전도가 쉽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 길은 환난의 길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핍박의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방해가 심할지라도 복음의 능력을 믿고 선교하도록 합시다.
복음 전파의 길을 끝까지 가도록 합시다. 그러면 복음 확장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께서 내 대신 일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사 일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능력과 담대함과 기타 필요한 모든 것을 뒷받침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파송한 안디옥교회 앞에 승리자로 당당히 서서 보고하는 바울과 바나바처럼 먼 훗날 여러분도 여러분을 이 땅에 파송하신 주님 앞에 당당히 서서 승리의 선교 보고를 할 수 있는 여러분과 우리 광성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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