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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시아 왕의 종교 개혁 / 왕하 2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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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2:1-13                                           
“요시아 왕의 종교 개혁”                                              KPCC

지금부터 486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Martin Luther가 일으킨 종교개혁을 흔히 말하는 종교개혁이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은 구약 시대의 종교개혁이라 일컫는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입니다. 

요시아 왕은 유대 나라의 17대 왕으로서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8살에 王位에 올라서 31년 동안을 통치한 유대의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이 요시야 왕이 통치한 지 약 18년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요시야 왕은 예루살렘 성전이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수리할 곳을 찾아 그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힐기야에게 그 일을 맡겼습니다. 힐기야 제사장의 감독 하에 성전수리가 진행되던 중 성전의 지붕에서 한 율법 책이 발견되었습니다. 힐기야는 그 율법책을 서기관인 사반에게 가져다주면서 “이 율법 책을 성전수리 중에 발견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서기관 사반은 이 사실을 요시야 왕에게 고하였습니다. 율법 책을 받아 본 요시야 왕은 그 율법 책을 읽어 보라고 말했습니다. 사반이 그 율법 책을 왕과 함께한 사람들 앞에서 읽었습니다. 그 율법 책에 무엇이라고 씌어 있는지는 우리가 알 수는 없으나 그 율법 책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 왕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의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사장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하며 즉시 회개하는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시야 왕은 모든 백성을 모으고 그 앞에서 이 율법 책을 읽게 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고, 산당을 철폐하고, 우상을 다 찍어 버리도록 하였습니다. 왕하 23:6 이하에 보면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아세라 우상을 찍어 버리고 모든 이방신들을 철폐하는 역사를 이룬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 시대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내용입니다. 이렇게 종교개혁을 통하여 우상 神을 섬기던 자세를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도록 한 요시야 왕을 하나님은 복 주셔서, 내리기로 한 심판을 거두어들이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나님의 돌보아 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종교개혁을 감행하여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바로 찾게 된 요시야 왕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22:2,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을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는 역사의 평가를 받게 해 주셨습니다. 또 23: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고 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종교개혁을 통하여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바른 신앙을 되찾게 한 요시야 왕을 두고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의 신앙을 늘 점검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자 하는 종교개혁의 자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또 다른 표현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주일을 앞두고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는 모습들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게 된 계기가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는 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시야 왕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300년 이상 된 낡은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 이전의 왕들은 이 하나님의 성전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시야 왕만이 성전 수리의 필요성을 발견한 것을 보면 이러한 종교개혁의 시발점은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고 거기에 관심을 갖는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하면 교회 사랑에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자세 - 그것은 교회에 관심을 갖는 자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구체화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사랑의 구체화 작업으로 “성전수리”를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교회를 사랑하는 표현으로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우선 교회사랑 속에 종교개혁의 불이 붙는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하십시다. 아이러니칼하게도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도 성전건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베드로 성당을 짓는 데 자금이 모자라서 면죄부를 팔게 된 사건이 바로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요시야의 성전수리에 있어서는 자금의 문제가 아주 정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절, “그러나 저희 손에 붙인 은을 회계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행하는 것이 진실함이었더라.”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에 대한 진실한 마음과 자세를 간직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과 자세가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의 발견”이라는 사실입니다. 성전을 수리하던 중 발견하게 된 율법 책, 그 율법 책의 내용으로 말미암아 종교개혁의 성격과 방향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율법 책에 씌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 당시 유다 나라의 신앙에 대한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상숭배를 철폐하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술과 미신을 숭상하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린아이를 불에 던지는 잘못된 열심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자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하나님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놀라지 마시고 왕하 23:21-23을 보세요. “왕이 뭇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언약 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유다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 왕 18년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즉,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기초를 사사시대부터 요시야 왕 때까지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 현대 신앙인들도 이런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중세시대 약 500여 년 동안 중세 카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내용이 교회에서 잊혀져 온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미명하에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교황의 말에 더 귀한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선물보다는 “나의 선한 행동”이나 “나의 공로”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마틴 루터를 비롯하여 우리 장로교의 창시자인 John Calvin 같은 분들이 종교개혁의 기치(motto)로 내놓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以信得義, Justification by Faith)”는 “오직 믿음(Sola Fide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과 말씀과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귀한 신앙의 명제는 인간의 지식과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에 기초한 내용임을 종교개혁자들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그 당시 로마 카롤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보다 다른 것에 더 치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以信得義, Justification by Faith)”는 것을 종교개혁자들은 내세운 것입니다. 이러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모습은 바로 오늘 본문의 요시야 시대까지 유월절을 잊어버린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요시야 왕 시대까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잊혀진바 되어 있었습니다. 천장의 먼지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 집에 성경책은 있지만 먼지 속에 묻혀 있지나 않는지요? 책꽂이에 꽂혀있는 장식품이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잊혀진바 된 하나님의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찾아서 읽고 묵상하고 말씀대로 행할 때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다시 확인되고, 여기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방향과 의미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과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말입니다. 중세 카롤릭 교회 시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그 말씀을 간직하는 모습 속에 있음을 아십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어떤 프로그램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예루살렘에 가셔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고 돈 바꿔주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시면서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9:46). 이렇게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신 다음에 예수님은 그 성전에 나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데에 교회를 사랑하는 모습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난 휴가 때에 저는 와싱턴 주의 시애틀(Seattle)을 방문하였습니다. 마침 시애틀 필그림(Pilgrim) 장로교회 담임 목사가 저와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이 친구 목사가 절더러 주일 설교를 부탁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배 후에, 점심을 먹는데, 그 교회 시무 장로님 한 분이 일부러 제 식탁에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연세가 지긋이 드신 분이셨는데, 오셔서 느닷없이 하시는 말씀이 “우리 목사님은 아주 특이합니다. 어떤 프로그램이라고는 하실 생각을 안 해요. 그저 말씀, 말씀 하십니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저는 이 장로님이 친구 목사에 대해 자랑하는 건지, 아니면 흉보는 건지 잘 모르겠더군요. 저는 “할 수 없다. 내 소신껏 말해야지”하고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장로님, 제가 보기에는 교회는 원칙을 지녀야 하는데, 그 원칙은 프로그램 중심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장로님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지난 60년대 미국에 오셨답니다. 코네티컷 주로 오셔서 처음에는 감리교에 다니다가, 장로교회로 옮겼답니다. 거기서 흔히 말하는 은혜를 받아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였답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시들해지니까 교회 다니는 것이 왠지 무의미해 보이고, 열심은 내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교 활동을 하기로 했답니다. 동부 지역에서 꽤 알려진 선교단체에 가입하여 열심히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카고의 휘튼(Wheaton) 대학에서 해마다 모이는 “세계 선교 대회”의 일도 맡아서 온갖 심부름하며 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지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님들을 미국 교회에 연결시켜서 선교 강연을 하도록 하는 일도 도맡아 하면서 많은 수고를 하였답니다. 처음에 이렇게 선교사님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에 하나로 “목회를 하는 목사님들은 너무 안일해 보여서 마음에 안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에게 매력을 느껴서 그 일을 도우며 감당해 나갔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선교사들에게도 많은 실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곳 시애틀로 이사를 와서 지금 이 교회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도 처음에 “뜨레디아스(Tres-Dias)” 같은 프로그램으로 꽤 성장을 했는데, 결국 교인들이 다 흩어진 가운데, 지금 목사님이 오셔서 오직 말씀으로만 목회를 하시는데, 처음에는 거부 반응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합당한 방향이란 것을 깨닫게 되고, 그러니 신앙생활도 더 깊이가 있어지더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면서 요즘 시애틀 지역에서는 “아버지 학교”란 것을 어느 교회에서 함으로 교회가 성장했다 하니까, 교인을 빼앗길 교회들은 그 프로그램을 하는 교회를 욕하고, 또 어떤 교회는 자기들 교인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와 유사한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교회 교인들은 그러한 물결에 조금도 요동되지 않고 차분하게 신앙생활을 잘 감당하는 모습을 본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그 원칙에 충실한 곳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는 꼭 알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에로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요시야 왕은 이미 3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예언한 사람이며, 또 종교개혁 역시 하나님께서 예언한 사실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왕상 13:1-2,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이 일은 요시야 왕보다 300년 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 반역하여 남북 분열을 일으킨 자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남북 분열의 책임자이지만, 종교적으로는 여호와의 신앙을 이방 종교처럼 우상종교화 시킨 사람입니다. 이렇게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하나님께서 이미 300여 년 전에 예언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사건입니다. 이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의 신앙자세가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란 기초아래 올곧게 나아가는 모습을 하나님은 원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인간의 생각이나 방법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지향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자기의 옷을 찢었습니다(6절).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종교개혁의 대상을 발견합니다. 종교개혁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인 바울까지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전 9:27).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개혁이 바로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귀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나 여러분이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신앙의 자세와 방향을 개혁시킬 부분들이 많이 있음을 말씀을 통하여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자세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음 주일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개혁되어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한 주간이 되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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