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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침묵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 (욥 3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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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 (욥 38:1-7)


침묵에게 

내가 행복할 때에도, 내가 서러울 때에도, 그윽한 눈길로 나를 기다리던 너

바위처럼 한결같은 네가 답답하고 지루해서 일부러 외면하고 비켜서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네 어깨 너머로 보이는 저 하늘이 처음 본 듯 푸르구나.

너의 든든한 팔에 안겨 소금처럼 썩지 않는 한마디의 말을 찾고 싶다.

언젠가는 네 품에서 영원한 잠을 자고 싶다. 침묵이여!


이해인 수녀의 침묵에게! 라는 시입니다.


여러분! 침묵을 좋아하십니까? 말을 즐겨하십니까? 침묵과 말은 항상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침묵 속에는 말이 들어있지만 말 속에는 침묵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또한 침묵 속에 들어있는 의미가 말 속에 들어있는 있는 의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넓고 깊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기적절한 침묵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요구되어지는 덕목입니다. 때와 장소에 맞게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은 금과 같이 빛나 보이고 돋보일 수 있으며 사람사이의 관계를 아름답게 맺어주기도 합니다. 말을 해서 풀어야 할 과제가 있고 침묵으로 넘어가야 할 상황도 있습니다. 우리는 잘 선택해야 합니다. 말을 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막힌 담을 헐 듯 수월하게 문제를 해결하는가 하면 무심코 내뱉은 비난의 말이 설사 악의가 없었더라도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상처를 주고 인연의 끈을 끊어버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감정이 지금 어떤지 꼭 말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을 해서 해결이 된다면야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묵묵히 참고 넘어가는 인내가 아쉽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고 충고해주는 것보다 그냥 눈감아 주고 잘한 점에 대해선 칭찬을 아끼지 않을 때 나타나는 효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을 수 있습니다. 남을 배려해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한 때입니다. 칭찬이 아닌 비난의 말이라면 오히려 침묵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이 힘들고  앞길이 막막하고, 가슴이 답답하며,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의 길이 없는 문제로 고통을 받을 때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성경은 우리가 고난을 맞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고통 중에 부르짖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9)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을 믿습니까?  '기도와 응답',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입니다. 심지어 성경은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65:24)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말씀입니까? "부르기 전에 응답하겠고, 말을 마치기 전에 들을 것이다"  성경은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신 기록의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를 펴더라도 기도는 응답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친히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시107:6, 13, 19,28)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시118:5)

하나님은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찾았을 때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생생한 기도 응답의 간증들을 듣고 있습니다. 


나의 고통과 하나님의 침묵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에서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실망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 때입니다. 내 삶에 일어난 절박한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해 가슴 답답함으로 밤을 새우며, 하나님께 부르짖고 응답을 기다렸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고 오직 침묵만 지키실 때가 있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한 마디 말씀이 절실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응답이라도 단 한 마디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합니다. 내가 겪고 있는 이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이라도 한 말씀만 들려주시면, 그 고통의 정도가 어떻든지 간에, 고통의 결과가 어떻든지 상관없이 내가 당한 고통의 시간을 견디며 이길 수 있겠는데 하나님은 그저 침묵하십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험이 없었습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경험하셨을 것이고 공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때 혹시 신앙의 갈등을 느끼지는 않았습니까? 아니면 그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셨습니까?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스스로 신앙의 좌절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것일까?' '내가 무엇을 잘못 했을까?'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이 시간 낭비가 아닐까?'  '혹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일까?'  '과연 하나님은 계실까?' 등의 엄청난 신앙의 회의를 가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내가 고통을 감당하는 것도 힘들지만, 하나님의 침묵하심이 내가 당한 고통을 훨씬 더 감당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시편에 보면 옛 성도들도 하나님의 침묵에 가슴앓이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13:1)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데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시13:3)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시77:3)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시77:7∼9)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이 고통의 터널을 지날 때에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가 참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신앙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이 슬픔을 거두어 가시고 이 질병을 좀 낫게 해주십시오. 때로는 하나님이 답을 하시지만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답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답이 없으신 하나님을 보고 침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이 침묵은 지금도 계속 됩니다. 하나님만 침묵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말하는 것보다 침묵을 하는 것이 금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나 자신도 죽겠습니다만, 나로 인해서 하나님의 명성과 하나님의 공의가 다른 사람에게도 이해가 되지 않으니 하나님! 침묵을 깨십시오! 하나님은 끝까지 침묵을 깨지 않습니다. 욥기서를 보면 욥기서가 6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5장은 완전히 욥과 친구들과의 변론입니다. 마지막에 욥이 하나님께 회개를 하고, 하나님이 침묵을 깨는 장면이 나옵니다. 침묵을 개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제 침묵을 깨겠는데, 침묵을 깨는 이유는 그대가 회개를 하고 자신에게 아직도 의로움이 없다고 말하고 회개하니 내가 침묵을 깬다. 그러니 그대는 내가 묻는 질문에 답하라! 그대는 이 땅을 누가 만들었는지 아는가? 이 땅에 구획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식물과 동물과 세상의 만사를 다스리고 생명을 주신 분이 누구인지 아는가? 이 질문에만 답변하라! 왜 질병을 주었는지 묻지 말고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이 누구인지 이것만 답변하라”그 때 욥이 답변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침묵을 깨시는군요! 당신은 그런 하나님이시군요”.

하나님이 침묵을 깨는 순간 욥의 질병이 다 사라졌습니다. 잃었던 양과 소, 짐승이 다 돌아왔습니다. 자식들도 다 나았습니다. 성경 말씀의 기록을 보면, 과거보다 2배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깨어지자 140년을 더 살았습니다. 욥이 전체 산 연령이 200세라고 합니다. 60대 환갑이 되어서 하나님의 침묵을 받는 질병을 앓았고 질병이 나은 다음에 140년을 살고, 4세대에 이르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욥의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까지 침묵하십니까? 침묵도 하나님의 행동이십니다. 이것을 나중에야 욥이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입을 열어서 말씀해야 하나님이 아니라 침묵하시는 하나님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새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계획을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침묵 중에도 역사는 진행이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듣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고통에 눈을 감고 계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고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의심하며 절망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이끌고 계십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 하나님의 일하시는 손은 움직이고 계십니다. 자신의 백성들을 향한 포기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열심은 지금도 역사를 진행시키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 때,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을 신뢰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십니다.

둘째, 고통의 끝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이 전부가 아닙니다. 고통에는 끝이 있습니다.

셋째, 고통의 결국은 아름다운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오늘 당장, 내가 처한 고통의 현실 때문에 가슴 터질 듯이 답답하지만, 침묵 중에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고통이 가져다줄 축복을 기대하십시오. 결코 오늘로 전부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고통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분명한 소리를 갖고 있는 침묵입니다. 그 침묵 자체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음성으로 바꾸는 일, 그것은 하나님께 보다는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와 더 크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 음성 듣기를 기다리십니다. 믿음이 우리의 귀를 열어줄 것입니다.

침묵 / 무한의 소리

우리가 고통 받고 방황할 때 하나님이 신기루와 같은 분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것 같다가도 다가가면 사라져 버리는 환상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사라져 버리시고 우리는 어떻게 그런 환상을 실체로 믿는 어리석음을 범했을까 하는 당혹감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은 신기루와 정반대 같은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처음에는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다가가 보면 그분은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분명한 의사소통을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성품이요, 바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기루와 반대되는 실체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실재하시며, 또 우리가 그분을 보거나 듣기 훨씬 전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삶 속에서 겪는 난감한 경험들과 복잡한 생각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 듣기를 더욱 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열망함에도 불구하고 들을 수 없는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한 것은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침묵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욥이 겪은 모든 괴로움 뒤에 마침내 입을 열면서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밝히 보여 주지 않고 그저 멀찍이서 전체적인 경치만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보게 된(즉,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된)욥으로서는 부분적인 응답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모든 의문들을 해결하기에는 부족하였겠지만 위로를 받기에는 충분했던 것입니다. 때로 어두움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아 나설 때에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관한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통하여 의도하신 바를 말씀하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침묵이 말보다 더 강한 어조의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명료한 의미일 수 있습니다.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게 위협하는 삶의 요소들은 무엇입니까?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

삶 자체가 하나님의 선하심과는 상반되는 것 같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고 인정 있는 분이라면 이럴 때 뭔가 설명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귀에 대혹 자상하게 속삭여 주셨으면 하고 바라는 바로 그때에 왜 주님의 음성은 그렇게도 희미하고 불분명해야 하는 겁니까? 이럴 때는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압도하는 것 같습니다.

잔칫집의 노랫소리

하나님의 침묵은 단지 고통의 아우성이 그분의 음성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좋은 일이 있을 때도 시끌벅적합니다. 어쩌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보다 더할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고통을 느낄 때는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압니다. 위안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무엇인가를 들으려고 애씁니다. 사실 환난 중에는 더 귀를 기울이게 되지만 좋은 시절에는 그렇게 겸허하지가 못합니다. 그 시절이 우리를 속여 자아 도취성 청각 장애에 빠지게 만듭니다. 생각이 온통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고 고집이 세져, 음악 소리를 줄이거나 잔치를 끝내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떠들썩한 잔치 소리에 하나님의 음성이 묻혀 버리고 맙니다.

인간적인 자기주장들이 빚는 잡음

수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주장만을 내세울 때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종종 이런 시끄러운 논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진짜 메시지가 섞여서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해 전파(격렬한 자기주장들) 때문에 송출되고 있는 메시지를 제대로 수신하거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온갖 인간적인 생각들 속에 하나님의 성스러운 메시지가 은폐되고 맙니다.

때때로 잘못은 철저하게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마음에 안 들어 합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듣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탐탁치가 않아서입니다. 메시지가 믿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 기준에 맞추어 살란 말인가?”라고 반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고 결론 내리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음성은 사람들의 요란한 견해들 속에 파묻혀 버립니다.

무관심

때로는 무지와 무관심, 경험 부족, 그리고 끝까지 들으려는 끈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시합니다. 정신을 딴 데로 돌리는 능력과 기질이 우리를, 꽉 움켜잡고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인간의 유한성(有限性)에 기인한 청각 장애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갈망합니다. 인간의 주신 기능은 하나님의 음성 전파의 파장을 잡기에는 너무나 뒤떨어져 있습니다. 마치 전파를 수신할 수 있는 안테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유한성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고통과 부(富), 자기주장, 무관심 그리고 인간의 유한성을 근거로 하나님의 침묵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이것보다도 더 신비롭습니다.

먼 옛날에,  이상한 문화와 특이한 언어를 사용하는 어느 나라에서 한 방문객이 선물을 받았습니다. 집 주인이 책장에서 조그만 책 한권을 꺼내더니 아무 말 없이 방문객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게 아무런 주저 없이 즉석에서 선물을 주는 것이 그 나라 풍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은 지나치게 독특한 풍습에 반감을 느낀 나머지 그 주인을 응시하며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그 나라말을 읽을 줄도 몰랐습니다. 그는 주인이 슬픈 표정을 짓자 무슨 멜로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주인은 계속해서 책을 받아 줄 것을 권했으나 손님은 난처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변명을 하고는 떠나 버렸습니다. 주인은 마음이 상했으나 놀라지 않고 그 책을 들고는 집을 나와 거리로 나갔습니다.

곧 거리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그 책을 주었습니다. 그 행인이 감사함으로 책을 받아들고 펼쳐 보자 거기에는 그 집 주인이 친필로 써 내려간 뜻 모를 글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주의 깊게 책을 살펴보던 그 행인은 또 다른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언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는 놀라운 인생의 비밀들과 그가 궁금해 하던 의문들에 대한 대답들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로 쉽게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도 이러한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었던 영적인 소리들이 소중한 의미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말씀이 우리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경험했고 말씀이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들은 말씀은 우리를 그대로 두는 법이 없습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살게 하시고 말씀을 조명하게 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도드릴 때 위에 들려오는 어떤 응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 가운데서 신음할 때에도 나를 위로해 주는 어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어도 오감을 통해서 그분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원리들을 제시해 주고 하나님의 목적과 속성을 설명해 주고 있지만 진실로 삶 가운데서 그 음성을 들으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침묵으로 하여금 말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해서 침묵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열쇠를 집어 들고  문을 열어야 합니다. 선물을 받아 펼쳐 읽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무엇보다도 매사를 하나님의 견지에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일 때면 저는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을 택하시면 저도 잠잠한 가운데 그 분의 음성에 귀 기울일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보다는 마음과 생각으로 느끼려고 할 것입니다. 막연한 상상보다는 성경에 기초한 상상을 할 것입니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마음에 그려 볼 것입니다. 나를 붙잡고 계시는 그분의 팔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용기를 주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처음에 느꼈던 것만큼 그렇게 어색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들을 귀만 준비되어 있다면 그분의 사랑과 성실하심, 모든 환경을 다스리시는 주권을 경험할 수 있으며, 고통 중에는 그분의 자비를, 성공 가운데서는 그분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자연이나 모든 인간관계나 환경들이 다 하나님의 대언자입니다.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예술과 과학, 별과 원자 그리고 광야와 바람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품들을 이해할 때, 그분의 방법을 알 때, 하나님의 신비한 인격을 마음으로 찬양할 때, 하나님의 주권이 모든 시대를 매순간 움직이고 계심을 볼 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중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중히 간직해야 할 열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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