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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 다시 생각하기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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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로마서 12:1~2 
  제목 예배, 다시 생각하기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나오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11월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 안팎에 걸린 현수막에는 “당신이 함께하면 꿈이 이뤄집니다”라는 표어로 11월이 전교인 출석의 달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 번 주일은 예배, 다시 생각하기라는 주제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려고 여기저기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서양인들은 동양을 향해서 길을 떠납니다. 인도나 티베트나 히말리야 산봉우리를 향해서 구도자의 발걸음을 옮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행을 통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학교과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여러분을 지으신 창조주께 직접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지음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기까지 인생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다섯 가지 목적 가운데 첫 번째 목적을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살피려고 합니다. 계시록은 그것을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성경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드신 것은 여러분으로 인해서 기뻐하기 위함입니다.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살아있기를 원하시고 여러분을 바라보며 기쁨을 얻기 위함입니다.

어린 자녀를 키우시는 부모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을 바라보며 기뻐하시지요? 언제나 즐거움만 안겨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녀들을 인해서 얻는 즐거움이 크실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여러분으로 인해 즐거워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쁨 되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나는 순간 하나님은 입이 귀에 닿도록 미소를 지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기뻐하기 위해 여러분을 만드셨기에 태어날 때부터 기뻐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의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을 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기 위해서 여러분을 만드신 것도 사실이지만 그 다른 일면은 바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되돌려 드리도록 지으신 것도 맞습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돌려드리기를 바라십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주님께 나아와서 묻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니이까?” 그 때 예수께서 대답해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예배란 바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배를 사람들이 자주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예배하면 어떤 이는 기도를, 다른 이는 찬양을 떠올리고, 교회 가는 것을, 그리고 가서 듣는 설교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예배란 그 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첫 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첫 째 되는 목적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이 가르치는 바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구도자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고 여러 가지 형태의 예배가 있지만 오늘 우리는 예배의 본질 가운데 하나를 살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야말로 예배를 가장 잘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다른 번역으로 살펴봅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 12:1 표준새번역)

저는 오늘 이 구절을 자세히 살피는 대신 두 가지만 밑줄을 긋겠습니다. 첫 째 예배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나의 반응입니다. 예배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내가 반응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에 대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반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움직이길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행동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복주시고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이 모든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둘 째 우리가 반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배란 우리가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를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주신 것을 기억할 때 우리가 그 분께 돌려드리는 것이 예배의 진수입니다.

무언가 여러분이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돌려드릴 때마다, 무언가를 하나님께 드릴 때마다 그것을 우리는 예배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부모인 여러분께 감사할 때 여러분은 기뻐합니다. 우리가 하늘 아버지께 감사할 때 하늘 아버지는

기쁨은 맛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드리길 하나님은 기대하실까요?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요? 온 세상 만물을 만드시고 여러분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 분께 여러분이 드릴만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 분께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주 구체적으로 어떻게 여러분의 사랑을 드려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막 12:30)

하나님은 세 가지 방식으로 그 분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째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 특히 생각을 다해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깊은 생각을 가지고 사랑해야 합니다. 생각 없이 예배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데는 우리의 사고가 필요합니다. 깊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바라십니다.

둘 째 목숨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열정을 다해서 예배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 목숨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우리를 사랑했기에 우리가 열정을 다해서 하나님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셋 째 힘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실제 우리의 능력을 다해서 주님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온 우주를 만드시고 여러분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세 가지 방법으로 여러분이 자신을 그 분께 드리기까지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관심을 쏟기까지는 하나님도 여러분의 관심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먼저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은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드릴 때 그것이 바로 예배의 진수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고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열정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을 되돌려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쏟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향하십시오. 나의 생각과 나의 애정과 나의 능력을 하나님께 쏟는 것입니다. 예배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자동항법 장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며 예배의 순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기도하고 자동적으로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다해서 마음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께 관심을 쏟기를 바라실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관심을 쏟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내가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며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내가 일하고 쉬는 것을 다 보고 계시며 나의 모든 행동을 잘 알고 계십니다.”(139:2)

하나님은 우리를 살피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관심을 쏟으시고 계속해서 관심을 쏟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서 당신의 눈길을 떼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생각을 멈추지 아니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만드신 이유가 바로 여러분을 사랑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에게 관심을 쏟기 위해서 여러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관심을 여러분을 향해 쏟고 계십니다.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이니까 계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 사랑에 빠진 것처럼 계속해서 우리를 향해서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구도자 여러분,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 때로는 관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남자들의 넋두리를 들어보십시오. “세상에 내가 얼마나 가족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지, 그래도 아내도 자식들도 몰라줍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왼 종일 지치도록 오늘도 일했는데 . . .”

왜 식구들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러분에게 불평할까요?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관심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관심은 엄청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계속해서 당신의 관심을 우리에게 쏟으십니다.

첫 사랑에 빠졌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 사람을 생각에서 지울 수가 있습니까? 아침에 일어나도 맨 먼저 그 사람이 떠오릅니다. 쉬어도 그 사람 생각이 납니다. 하루 종일 그 사람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거의 이성을 잃게 합니다. 벗어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무궁토록 사랑한다고 합니다. 첫 사랑의 열정이 타오를 때만 아닙니다. 결혼하고 나면 식어지는 열정이 아닙니다. 몇 년 함께 살고 나면 무덤덤해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년을 하루같이 사랑합니다. 하루도 천년처럼 기다립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관심을 쏟습니다. 영겁의 세월이 흘러가도 하나님을 우리를 첫 눈에 반한 것처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관심을 쏟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당신에게 관심 쏟기를 배우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쉽지를 않습니다. 정말로 말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한 곳에 관심을 쏟다가도 너무 쉽게 다른 곳으로 관심을 파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자동초점 카메라와는 다릅니다. 피사체를 향하기만 해도 초점을 맞추는 카메라와는 틀립니다. 우리는 관심을 쏟기로 마음을 먹어야 가능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관심을 쏟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선택적으로 관심을 쏟습니다.

우리는 왜 그렇습니까? 너무 쉽게 관심분산이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특히 관심집중이 어렵습니다. 하나는 본성상 우리 자신에게 관심이 향하는 것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에게 관심을 쏟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를 보십시오.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적대감을 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또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롬 8:7 표준새번역)

어떤 풀어쓰기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쏟는 것은 하나님께 관심을 쏟는 것을 거스립니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빠져든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보다는 자신에 대해서 더욱 생각하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롬 8:7 메시지성경) 그러므로 우리는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관심을 쏟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장은 권합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 12:2)

다른 번역으로 살펴봅시다. “여러분 자신의 문화에 너무 잘 적응해서 생각도 없이 거기 빠져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대신에 여러분의 관심을 하나님께 고정시키십시오.”(롬 12:2 메시지성경)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해야만 합니다. 어디에 관심을 쏟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다른 데에 관심을 쏟는 것을 중단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조용한 시간을 가지도록 권합니다. QT란 용어가 그래서 있습니다. 두 달마다 한 번씩 할인된 가격으로 복 있는 사람을 보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루 중에 잠시 시간을 내십시오. 언제 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도 할 수 있고 아니면 하루 중간에, 어쩌면 하루를 마감하면서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중단하고 하나님과만 시간을 가지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말씀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결단하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은밀하게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 갚아 주실 것이다.”(마 6:6 표준새번역)

이 일을 위해서는 시간도 필요하고 장소도 필요합니다. 구약시대는 한 장소를 지정하셨습니다. 모두들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틀립니다. 어디서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조용한 장소이면 어디든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만 하면 일하려가는 승용차 안에도 가능합니다. 낙엽이 아름다운 뒤뜰도 좋습니다. 아니면 아늑한 거실도 좋습니다.

다른 번역은 이렇게 풀이합니다. “조용하고 한적한 장소를 찾아서 하나님 앞에서 역할극을 하려는 유혹을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할 수 있는 한 진솔하게 정직하게 거기에 있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초점이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질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마 6:6, 메시지성경)

진솔하게 정직하게 하나님만 바라면 됩니다. 특정한 의식이 요구되지도 않습니다. 무슨 특별한 용어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거기 여러분과 주님이 대화할 수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꾸밈없는 진실함이 필요합니다. 일의 압박에서 벗어나십시오. 특별히 신령해지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좀 더 알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나님께 진솔하려고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여러분이 해야 할 두 번째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계속적인 대화를 발전시켜 가는 것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찾고, 그의 능력을 힘써 사모하고, 언제나 그의 얼굴을 찾아 경배하여라.”(시 105:4)

왼 종일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최근에 출판된 좋은 책이 있습니다. 언젠가 구역장님들께는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독서의 계절 가을을 맞이하여 소개해드린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는 책입니다.

원제목은 Sacred Pathways (신성한 오솔길들)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들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우리 각자의 영성을 발견하게 하는 책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지음 받은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 나름의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마치 사람마다 은사가 다른 것처럼 자신만의 영성의 오솔길이 있음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자연주의 영성을 가진 사람은 야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건물이라도 일단 건물 밖으로 나가 강가에서는 숲 속에서나 산이나 너른 들판을 걸을 때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기회가 됩니다.

감각주의 영성을 가진 사람은 오감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아름다움과 영광의 빛 가운데 푹 잠기기를 원합니다. 정교한 건축, 고전 음악, 격식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엄숙하고 장엄한 예배를 선호합니다.

전통주의 영성을 가진 사람은 의식과 상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의식, 상징, 성례, 제사 등에서 양분을 얻고 대개 규칙적인 예배참석, 십일조, 주일성수를 좋아합니다.

금욕주의 영성을 가진 사람은 고독과 단순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의식이나 종교의 부산물, 세상의 모든 소음을 떠나서 혼자 남아서 기도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행동주의 영성을 가진 사람은 참여와 대결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정의의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란 악에 맞서 회개를 촉구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나가 불의와 일전을 하기위한 충전소입니다.

박애주의 영성을 가진 사람은 이웃 사랑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가난하고 초라한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에 개입하고 그들을 도울 때에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을 섬기는 기쁨을 맛보는 분들입니다.

열정주의 영성을 가진 사람은 신비와 축제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감각주의자들이 아름다움에 에워싸이기를 원하고, 지성주의자들이 개념을 붙들고 씨름하기 원하듯이 열정주의자들은 즐거운 축제에 감격하는 일들입니다.

묵상주의 영성은 사모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연인으로 부르며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가장 깊고 가장 밝은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그 책에서 소개하는 영성은 지성주의 영성으로 생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회의론자일 수도 있고 헌신된 신자일 수도 있지만 교리 공부를 즐기며 신앙이란 체험 못지않게 이해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을 때 하나님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이 아홉 가지 색깔의 영성을 골고루 소유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영성을 파악하여 더 효과적으로 발전시키십시오. 부족한 부분을 개발하여 보다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여러분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는 게리 토마스의 책을 읽고 나면 하나님께 이르는 자신이 길이 열리게 되며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질 것입니다. 칼같이 예배시간을 지키며 설교 말씀을 깨알 같은 글로 받아 적기를 즐기는 아버지, 기도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어머니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 가지 봉사를 하느라 주일이면 새벽같이 집을 나가 밤에 들어오는 딸, 대학 기독교 동아리 회장을 맡아 사회 개혁에 목소리를 높이는 아들, 나이도 잊고 신학을 공부하는 고모, 특별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도 세계 각국의 오지를 돌아다니며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고 바쁜 삼촌 사이에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 드리는 폭이 넓어질 것입니다.

각자의 중심에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든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라는 놀라운 사실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특별한 성품과 특별한 영적 기질의 소유자로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지으신 방식에 따라서 당신 독특한 예배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나름의 신성한 오솔길을 통해서 주님께 자주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어떤 사람은 30분마다, 아니면 1시간마다 시계를 맞추어 놓고 알람이 울리면 하나님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시간에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알람이 울리면 자기 차 속에라도 올라가서 하나님과의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어쨋던 하나님을 하루 종일 떠올리며 계속적인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렇게 시도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엄청난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성경 이사야서 26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사 26:7) 다른 성경은 이렇게도 번역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자들, 그 생각이 주님께 고정된 모든 자들에게 주께서는 완벽한 평화로 지키십니다.”(사26:3 NLT)

여러분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면 걱정, 근심, 염려, 불안이 찾아올 것입니다.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의기소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관심을 쏟게 되면 감사와 소망이 넘쳐날 것입니다. 확신과 사랑이 찾아들 것입니다.

예배란 무엇보다도 나를 향해 온통 관심을 쏟으시는 하나님께 내가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 꼭 예배당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 하나님께 여러분의 관심을 쏟을 때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노래합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말씀 맺습니다. 11월,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분께 변함없는 여러분의 사랑을 표현하는 한 주간이 되시고 다음 주일에는 정한 예배의 시간에 준비된 아름다운 모습으로 뵙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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