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 (겔 37:11-14)

  • 잡초 잡초
  • 604
  • 0

첨부 1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 (겔 37:11-14)

  오늘도 이 거룩한 성일에 주님의 전에 올라와 하나님께 함께 예배 드리는 여러
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82년 미국 보스턴의 한 병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병원에는 뇌암에 걸린 한 소년이 누워있었습니다. 그 소년의 이름은 숀 버틀
러였고 그 당시 그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숀은 그만 의사로부터
"회생불가"라고 하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소년은 비록 병원에 누워
있었지만 사실은 죽음의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시한부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숀은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아주 야구를 좋아했던 야구광이었습니
다. 숀은 정말 야구를 좋아했고 야구를 즐겼던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숀은 당시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런 타자였던 스테플턴 선수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열열한 팬
이었습니다.
  어느 날 숀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마음을 담아 이 홈런 왕 스테플턴 선수에
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 내용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내 아들은 지금 뇌암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열열한 팬이었던
내 아들 숀이 마지막으로 당신을 보기 원합니다."라는 그런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그러자 이 편지를 받아본 스테플턴 선수는 정말 뇌암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
는 그 어린 소년 숀을 생각하며 그가 입원하고 있는 병원에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소년의 손을 꼭 잡고 그의 귀에다가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숀, 내가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스테플턴이다. 내일 경기가 있는데 내가
너를 위해 멋진 홈런을 날려주마. 숀, 그러니 희망을 버리지 말아라." 그러자 이때
숀은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오랜만에 얼굴에 생기를 띠고 그 야구 영웅을 반갑
게 맞았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정말 스테플턴은 소년과의 약속대로 홈런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이 그대로 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비록 적은 목소리였지만 그 병상에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때부터 소년의 병세가 완연한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5개월 후에 암세포가 완전히 말끔하게 사
라져 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했던 그 소년이 건강한 몸으로 퇴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국의 각 언론들
은 이 사실을 연일 대서특필하였고 미국 전역에 모든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에게 있어서 희망과 기쁨은 암세포까지
죽일 수 있는 명약 중에 명약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질병은 바로 "절망"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까? 로마서
15:13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서는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충만케 하사 언제나 우리들에게 성령의 능
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소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
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기뻐하고 찬송하
며 감사함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한마디로 절망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소망이 있다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본문 11절 하반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뭐라고 절망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
느니라." 그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처지를 "우리는
다 멸절되었노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소망을 다 잃어버린 채 이처럼 철저하게 절망에 붙들려 있었을까요? 
  당시 이스라엘은 BC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이 함락됨으로 그 거
룩한 성 예루살렘 도성이 다 훼파되고 많은 젊은이들과 백성들이 포로로 사로잡
혀 가고 연약한 부녀자들은 수치와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 아름
답고 거룩한 성이었던 예루살렘은 들짐승들이 드나드는 폐허로 변해버리고 말았
던 것입니다.
  더욱이 바벨론에 포로로 붙들려간 그들의 삶은 한마디로 비참하였습니다. 종의
삶이었습니다. 쇠사슬에 매인 삶이었습니다. 자유가 없었습니다. 물질은 궁핍하고
가난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여기가도 저기가도 멸시와 천대만 받을 뿐이었습니
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우리는 소망이 없다. 이제 우리 민족의 앞날은 끝장이
나고 말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 그의 종 에스겔 선지자에게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행하실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에스겔서 37장의
말씀은 그때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신령하신 임재하심 가운데 본 환상을 기
록한 말씀입니다.
  본문 1절의 말씀을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
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에스겔이 주의 신에 인도하심을 따라 간 곳은 다름 아닌 바른 뼈로 가득한 죽
음의 골짜기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중요한 사실은 이 뼈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
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절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허무함
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 어느 곳에서도 소망을 찾아 볼 수 없는
철저한 절망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른 뼈들로
가득 찬 그 죽음의 골짜기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희망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에스겔 선지자가 그렇게 마른 뼈들로 가득 찬 그 절망의 골짜기를 바라
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에스겔아 이 뼈가 살겠느냐? 이 뼈
가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 "예,
하나님 살 수 있습니다."라고 그렇게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
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본문 3절의 말씀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
답했습니다. 이는 에스겔 선지자로서 하나님께 대답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습
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
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
라."(겔37:4-6)
  놀라운 사실은 비록 환상이었지만 에스겔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그 죽
음의 골짜기를 향하여 대언했더니 그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뼈들이 더그럭 더
그럭 소리를 내면서 달라붙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뼈들이 제각각 자기의
형체를 갖추며 달라붙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뼈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더니 그 위에 가죽이 덮혀 완전히 사람의 형체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에스겔에게 "에스겔아!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 당한 자에게 불
어서 살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0절의 말씀에 보면 이에 에스겔이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
로 대언하였더니 하나님의 생기가 그들에게로 들어가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극히 큰 군대를 이루었다고 증거 합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아무리 이
스라엘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마치 마른 뼈로 가득 찬 죽음의 골짜기와 같이
철저하게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반드시 그들이 회복될 것
을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소망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비록 지금은 이스라엘이 처해 있는 상황이 비참할지라도
머지않아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요, 하나님의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은
혜와 위로하심과 축복을 받게 될 것을 그들에게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1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멸절되었나이다"
라고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
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
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리라!"
  이는 내가 너희로 하여금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오게 하리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오게 하리라!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오게 하리라!
  낭패와 실망을 당한 자리에서 회복의 자리로 나오게 하리라! 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씀은 단지 에스겔 선지자 당시 바벨론에 포로되어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을 향하여 소망을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창세기 1장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하나 하나 하
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창조하실 때마다 마치 노래의 후렴 구절처럼 반복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1:5절의 말씀을 보면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라고 증거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라는 날짜를 계산 할 때에 통상적으로 아침으로부터 시작해서 저녁
으로 끝나는 것을 하루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하루의 시작
이 저녁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하루의 시작이 저녁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
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금요일 오후부터 시작이 되어서 토요일 오후에 접어 
들게 되면 안식일이 끝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요
일 오후가 되면 벌써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시간은 저녁부터 시작해서 아침으로 끝나는 것일
까요? 이는 다름 아닌 우리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아침으로 시작해서 저녁으로 끝나는 인생관은 죽음과 절망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녁으로 시작해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인생관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
가는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긍정적입니다. 소망적입니다. 언제
나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로마서15:13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
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 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믿음 안에서 우리들에게 기쁨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평강이 넘치게 하십니다. 어떤 절망과 역경 가운데서도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신 것을 보면
언제나 사람들이 "이제는 마지막이다.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제
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을 봅니다.
  보십시오.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 가운데 아우성을 치며 여기가
"바로 우리가 죽어 묻힐 매장지구나!"라고 탄식할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그 바다 한 가운데로 마른땅과 같은 큰 대로를 열어 주
셨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계속되는 가뭄 속에서 이제 겨우 가루 한웅큼과 조금 남아 있
는 기름으로 한끼 식사를 준비해서 먹고 아들과 함께 이제 죽을 시간만을 기다리
려고 하던 여인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보내사 가뭄이 다 끝나
기까지 가루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는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끝났다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절망이 하나님의 절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끝이 하나
님의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기 때문입니
다.
  보십시오. 시편 62편의 말씀을 보면 믿음의 사람 다윗에게도 절망의 순간이 있
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성을 빼앗기고 경황도 없이 그 성을
빠져 도망쳐 나올 때 다윗의 마음은 참담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때 그
당시 자신의 모습을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더욱이
그렇게 꺼져 가는 등불과 같고 정말 상한 갈대와 같은 자신을 그 동안 그렇게 믿
었던 신하들까지도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일제히 힘을 합하여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상황이 어떠했겠습니까?
  정말 다윗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끝장이 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런 와중에서도 다
윗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고백하며 외쳤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
하리로다…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
는도다…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이 얼마나 놀라운, 그리고 담대한 다윗의 믿음의 고백이요, 외침입니까?
  이는 아무리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 절망적이라 할
지라도 오직 자신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들을 향하여 또한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야곱아,(위수야!)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
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
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27-31)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는 자는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넘어지고 자빠진다 할지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칠전팔기하는 승리자
가 될 수 있습니다. 걸어가도 뛰어가도 날마다 피곤하거나 곤비치 않는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혹시나 이 자리에 절망의 마음을 가지고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인생살이에 피곤에 지쳐 이 자리에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삶의 여러 가지 무거운 짐을 지고 영혼에 곤비함을 안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
까? 
  우리의 소망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의 시
선이 어디로 가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몸은 이 자리에 나와 있지만 우리
에게 새 힘을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 지금도 실망스러운 자신의 삶의 현실
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결코 우리는 소망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 곤고한 삶
의 자리를 박차고 다시 일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모든 삶의 현실을 다 뒤로하고 여러분의 눈을
들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오. 평화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소망의 주님을
앙망하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새 힘을 얻게 하시고 능히 승리하게 하실 여
호와 닛시의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
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
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주시고 늘 지켜주시리 /(후렴) 눈을 들어 주
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
식 주리라"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마치 마른 뼈와 같지만 그러
나 너희가 다시 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절망에 붙들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는 다 멸절되었나이다."라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처럼 다 멸절되었던 자들입니
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큰 절망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다시 살리
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
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분명히 절망의 어두움 속에서 헤메이는 자들이 아니
라 생명의 빛 가운데서 행하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소망 중에 살아가는
자들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원한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저 천국입니다. 영원한 저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
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저
영원한 천국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살 자들이라면,
분명히 이 소망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라면 왜 이 세상에서 좀 잘 살고 못 사는
것 때문에 낙심하십니까? 왜 실패했다고 절망하십니까? 왜 하는 일이 잘 되지 않
는다고 그것 때문에 슬퍼하십니까?
  아무리 이 세상에서 누리는 영화가 대단하다 할지라도 솔로몬의 고백대로 그것
도 잠시 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겪는 고통과 아픔이 크다 할
지라도 그것 역시 잠시 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것 때문에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가 멸절되었다는 그런 부정적인 마음에 사로잡혀 절망하지 말고 범사에 여러
분의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기뻐하십시오.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십시오.
  우리의 영원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며 사십시오.
  언제나 소망 중에 우리의 가난을 부요함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우리의 질병을 건강을 바꾸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우리 인생의 어두운 밤을 밝은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으로 바꾸어주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 결론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범사에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소망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본문 14절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
어 너희로 살게 하리라" 할렐루야!! 이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깨서 일찌기 요엘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 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