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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지금 아구스도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눅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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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탄]지금 아구스도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눅2:1-20)   

2장 1절 ~ 20절: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여관 집 주인의 태도를 또 생각을 해야 되겠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서 ‘천하로 다 고향에 가서 호적을 하라’ 하니까 사람들이 이제 몰리기 시작하지요.  무슨 행사나, 후가 때나, 명절 때가 되면 여관 방이 차고, 넘치지요? 
이 주인은 ‘돈 벌 기회는 이 때다’ 합니다.  고기 떼가 많이 지나가면 어부들은 ‘이 때다’ 하고서 그물을 치지요.  그런 것처럼 ‘돈벌 기회는 이 때다!’  호적 하러 가는 사람들이 밀어닥치니까 이제 눈에 돈 독이 오르는 거지요.  평상시에도 ‘돈, 돈!’ 하고 살던 사람이 돈이 몰려오는 기회를 보게 되니까 독이 오른단 말이요.  돈에 대한 독이 올라!  그러니까 아무렴 찾아오는 사람들이 방을 구하는데 돈이 많은 사람들은 더 좋은 방을 구할 거고, 돈이 적은 사람은 좀 덜한 방, 이렇게 쭉 쭉 올라가고, 내려가고, 돈 내는 가치에 따라서 그 방이 다르지요.
이제 요셉과 마리아도 찾아왔는데 ‘사관에 있을 곳이 없다’고 그런 것을 보니까 아마 손님들이 다 찾던 모양이야!  더 더군다나 요셉과 마리아가 무슨 금마차나 타고 왔다면 여관 방에 이미 들었던 사람이라도 내어 쫓고 방을 내 줬을 거에요.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가 무슨 부자입니까?  가난한 사람이지.  무슨 옷을 좋게 입었겠습니까?  더 더군다나 여자가 아기를 배어 가지고 지금 진통이 오고 그러는데 누가 방을 내어 주겠느냐 그 말이요.  여관 집 주인이 돈 독이 올라 있는데 요셉과 마리아에게 방을 내어줄 리가 없다 그 말이지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 손님들이 요셉과 마리아의 형편을 안 봤겠습니까?  손님들 각자는 고향 가느라 그 여관 방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는데 ‘누가 더 큰 방에서 잠을 자느냐, 누가 더 좋은 침대에서 잠을 자느냐, 누가 등 따시고, 배부르게 침대에서 뒹굴다가 가느냐?’  이 손님들의 마음은 전부 다 그게 들어있단 말이요.  그리고 그런 욕심, 그런 소원을 가지고 살아왔고, 그런 마음으로 돈을 내었는데 누가 자기가 돈을 내어놓고 다른 사람을 그 방에서 자게 하겠느냐?  몰라, 또 다른 사람을 자게 하는데 아닌 말로 가이사 아구스도가 찾아온다면 ‘아, 내 방 쓰십시요, 내 방 쓰십시요’ 서로 그러지 않겠어요?  그러나 이 마리아와 요셉에게는 그러질 않는다 그 말이지요. 
우리가 여관 집 주인의 태도나, 여관 방에 든 손님들의 태도나, 이걸 늘어뜨리면 인생이 출생해서 죽음에 까지, 무덤에 까지 이르는 동안에 사람들의 각자의 그 소원, 목적성을 거기서 볼 수가 있어요.  하루 저녁에 그런 마음을 품는 손님들의 마음이나, 백년 동안 그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사는 인생들의 마음이나 똑 같은 겁니다, 똑 같아요.
방마다 대 만원이요, 초 만원입니다.  그러니까 여관 집 주인이 기분이 나쁠 리는 없고, 기분이 좋아서 그저 입이 함박만큼 벌어져 가지고 싱글벙글하지, 그렇지 않겠어요?  여러분들도 돈이 많으면 싱글벙글해요?  그 사람들의 마음을 우리가 볼 수 있다.
그리고 방 안에서는 밤새도록 왁자지껄하지요.  사람들이 오다 가다 일가 친척을 만나 놓으면, 또 아는 사람을 만나 놓으면 밤새도록 얘기를 하지요?  깨가 쏟아지도록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야, 무지 오래간만에 만났다.  우리 술 한잔하세’ 하고서 밤새도록 퍼먹고 마시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밤새도록 화투치기 하면서 ‘누가 돈을 많이 따느냐?  저 사람 호주머니 속의 돈을 내가 다 갖고 가야지’ 하는 도둑 심보를 가진 사람도 있고.  가만 보면 참 그게 다 인생살이의 축소판입니다.  세상을, 사람의 마음을 한 눈으로 볼 수가 있지요.
그 앉아서 하는 얘기들은 전부 다 돈 버는 얘기, 노는 얘기, 뭐 웃는 소리, 그저 시끌벅적합니다.  세상 사람들 모여 앉으면 무슨 얘기하겠어요.  노상 자기 잘났다는 얘기, 돈 버는 얘기, 뭐 어디 가서 놀았다는 얘기, 그거 빼 놓으면 없어요, 그거 빼 놓으면 없어!  안 믿는 사람들의 세계는 속에 그게 들어 있고, 그것밖에 없어요.  그 때의 그런 환경들이 우리 인생살이와 똑 같다. 
사람들이 모두 다 그런 식으로 고향 가느라고 살아갈 때에 메시야의 기쁜 소식이 목자들에게 전달이 되었습니다, 그렇지요?  목자들은 그 밤에 무엇을 하고 있었지요?  고향 찾아갔습니까, 양떼들을 지켰습니까?  양떼들을 지켰지요.  참 우리가 이것을 볼 때에 사건적으로 보면 그건 당연한 건데 계시적, 사상적으로 보면 이거는 참 놀라울 정도로 시대적 역행을 하고 있어요.
밤에 잠을 자지를 않았단 말이요.  사건의 어두운 밤, 진리의 어두운 밤에 목자들은 잠을 자지 않습니다.  물론 그 때야 시간적, 공간적 밤이었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걸 신앙적으로 볼 때에는 사건적인 밤이요, 진리가 어두운 밤이요.  그런 밤에 잠을 안 자!  양떼를 지키는 목자는 그런 밤에 잠을  안 자!  행여나 이리 떼나 맹수가, 사나운 짐승들이 나타나서 양떼들을 해칠까 싶어서 지팡이를 가지고 지키며 잠을 잘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러나 여관 집 주인은 돈 보따리 앉고 ‘이 돈 누가 훔쳐 가지나 않나’ 하고 잠을 안 자!  목자들은 양떼 지키느라고 잠을 안 자고, 여관 집 주인은 돈 훔쳐갈까 싶어서 잠을 안 자고, 참!
이 목자들도요, 주님의 종들도요, 생각 하는게 다 달라요.  어느 종은 ‘우리 교인 누가 꼬여 가지고 어디로 안 데려가나?’ 하고 걱정하느라 잠을 안 자고.  왜 그 생각을 하는고 하니 데려가면 교회가 운영이 안 돼, 교인 숫자가 적어져.  뭐 그런데다가 생각을 하고.  그러나 어떤 종은 ‘이 양떼가 잡혀가면 안되는데, 잡혀가면 신앙이 죽는데, 영원한 미래가 죽는데, 생명이 죽는데’ 이렇게 또 생각을 하는 종이 있고 그렇지요?  지키는 성질이 질적으로 달라요. 
이 목자들은 양떼들을 지키느라고, 보호하느라고 잠을 안 자고, 요셉과 마리아는 메시야에게 수종 드느라고, 어린 아기에게 수종 드느라고 잠을 안 자고, 그 마음의 씀씀이가 다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밤새도록 돈 버느라고 잠을 안 자고, 어떤 사람은 어린 아기 보호하느라고 잠을 안 자고, 어떤 학생은 공부하느라고 잠을 안 자고, 어떤 학생은 밤새도록 테레비 보느라고 잠을 안 자고.  같아요, 달라요?  다르지요.  그렇게 어디다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서 그 자기에게 임해지는, 다가오는 사건성은 다른 겁니다, 알겠어요? 
양무리들은 밤중에 놀러 다닙니까?  예?  양무리들이 밤이 되니까 내 세상 만났다고 그냥 산으로 뛰어 다닙니까?  목자를 중심하고 잘 모여있다 그 말이요.  그러나 늑대들은?  막 돌아 다니지! 밤중에도 돌아다녀.  밤중에 돌아 다니는 건 이건 수상한 거야.  그거 알아야 돼요.  신앙적인 밤, 사건적인 밤인데, 주위가 어두운 밤인데 돌아 다니는 건 수상하고, 여자가 밤중에 돌아다니는 이것은 수상해, 남자들도 수상하고.  돌아 다녀봐야 하나도 좋은게 없지요.  칼 맞기 일쑤지!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 누구에게 이 소식을 전한 거지요?  예?  목자들에게!
여관 방에 손님이 좀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여관 방마다 천사들을 보내 가지고 메시야가 났다는 그 기쁜 소식을 전했다면 얼마나 전도가 더 잘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목자들은 보잘 것이 없어요.  그런데 왜 그들에게 전했을까?  메시야 나심을 왜 그들에게 전했을까? 
신앙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관 방의 손님들에게는 이 소식을 전하지 않아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편안하게 뒹굴다가 가자!’ 하는 그런 여관 방 생활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들어가지를 않아요.  귀에 들어가지를 않는단 말이요.  마음에 들어가지를 않는단 말이요.  현재 믿는 우리들이 그런 사고 방식을 가졌다면 하나님의 은혜도 임하지 않는다 그 말이요, 같은 이치입니다. 
밤에 양떼들을 지키는 목자에게 진리와 영감이 찾아간다, 성령의 영감이 찾아간다.  성경을 봐도 그런 목자에게 성령의 영감이 와요.  그게 주님이 찾아오는 겁니다, 알겠어요?  마음이 돌아다니는 그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가 있지요.  개들이 돌아다니면 그 뒤로 누가 따라 다니지?  ○○아, 개들이 돌아다니면 그 뒤로 누가 따라와?  개들이 우- 따라와?  꺼먼 개, 누런 개, 얼룩 개, 삽살 개, 털 개, 왕발 개, 뭐 다 따라 오더냐?  그 개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누가 또 찾아가지?  개 장사들이 찾아가는구먼.  그거 이치야, 그거는 빤한 거에요.  여러분들, 그건 일반적 이치지만 정신적인 면으로 그걸 분석하면 틀림이 없어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이것은 전부 가견적인 건데, 눈에 보이는 전부는 없어질 거에요, 없어지는 것.  그러니까 그 면이 진짜가 아니고 그런 것을 보여줄 때에 진짜는 인간의 내적인 그 정신, 사상면에서 찾아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물질 세계를 만들어 놓은 겁니다. 
TAPE 2 - A면
알겠어요?  그걸 꼭 알아야 돼요.
꽃에서 향기가 나면 뭐가 찾아오지?  아, 벌이 찾아오고, 그래.  어린 아이가 똥을 눠서 똥 냄새가 퍼져 나가면 벌이 날아와, 똥파리가 찾아와?  똥파리!  냄새에 따라 찾아 오는게 달라요, 알겠어요?  이게 이치라!  이거 무시하면 안 돼.  이치 무시하고 살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헛 똑똑 이야.  이치를 잘 깨닫고, 그 이치를 잘 이용, 활용하면 자기는 참 그 지혜롭고 멋있는 사람이 돼요. 
자- 그러면 처녀가 시집을 빨리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그 이치가 다 나오는 건데, 시집 못 가서 안달이 나서 밤새도록 돌아다녀야 되나?  어떻게 해?  남자가 나타나도록 밤새도록 돌아다니면 뭔가 나타나지.  아가씨들 돌아다니지 않아도 부지런하고, 영리하고, 똑똑하면 가만히 있어도 냄새가 나가!  눈에 보이지 않는 냄새가 나가!  이웃 사람들이 그 냄새를 맡아!  그 냄새 좋아하는 총각은 자동적으로 그 냄새 따라서 오는 법이지, 그렇지 않아요?  안 그래?  그게 이치야!
공부를 해도 성경에서 이치를 잘 깨달아 가지고, 이 이치를 가지고 이치적으로 세상 공부도 활용을 하면 자기가 세상살이에 그 만큼 편해요, 알겠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미련해 가지고 헛 고생을 하느냔 말이요.  미련해 가지고 헛 고생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안 그래요?  미련해서 헛 고생을 하는 그런 경험을 갖는 것보다도 지혜를 써서 더 많은 이익을 얻어 가지고 나도 좋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을 주고 가는 그런 사람이 돼야지!  헛 고생으로 죽으라고 고생 고생하는 것처럼 미련한게 어디 있어.  우리 인생은 다른 사람에게 또 이익을 주고 가는 인생이 되어야지요, 그 기쁨으로 살아야지. 
사건, 환경적으로 물론 어려운 사건, 환경이 본의 아니게 올 수가 있어요.  내가 일부러 고생을 하는 일이 없다 하더라도 그런 환경이 부딪히면 가지고 있는 지혜 가지고 이겨 나가고.
어쨌든 천사의 소식을 귀담아 들은 이 목자들은 마굿간마다 가서 뒤졌단 말이요, 그 냄새나는 마굿간마다.  가서 예수님을 만난 거지요, 메시야를 만난 겁니다.  다리 아픈 것도 다 잊어버리고, 피로함도 다 잊어버리고, 입에서는 뭐가 나왔을까요?  찬송이 나왔지요.  예수님 만나면 그렇게 좋습니다.  그 참 희한하지요.
우리가 그런게 있습니까?  보고 싶은 사람을 탁 만나면 노래도 잘 나옵니까?  예?  마음 속에 그 즐거움이 생깁니까?
캄캄한 밤인데 후레휘 불 만나면 그렇게 좋습니까?  여러분들, 혹 밤 길 걸을 기회가 생기면 달이 떴다고 안심하지 말고 불은 항상 갖고 다녀요, 그게 지혜로운 거요.
예수님이 그렇게 좋습니다.  그렇게 돼 있어요.  인간이 만들어지기를 그렇게 돼 있어요.  여름 밤에 불을 켜 놓으면, 전기 불이던, 촛불이던, 호롱 불이던 켜 놓으면 밤에 저 멀리서도 뭐가 날아오지요?  불나비가 날아옵니까?  예, 제 타 죽는 것도 모르고 불을 그렇게 좋아하지요?  오징어 잡는 것도 오징어가 불보고 쫓아오게 해서 잡지요.  그것도 우리가 깨달을 수가 있어요.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면 그렇게 기쁘게 돼 있어요, 질이 그렇게 돼 있어요.  도둑의 세계는 자기 친구 만나면 기쁩니까?  예?  도둑의 세계는 그렇단 말이요.  우리들이 그들을 만나면 무섭고, 벌벌 떨고, 멀리하지만 그들끼리 만나면 기뻐한단 말이요, 기쁘고 즐겁단 말이요.  그러니까 그런걸 무시하면 안된다.  그러니까 자기의 마음의 느낌의 기쁨성을 갖는 그런게 있는 인간이다.  하나님을, 주님을 만나면 기쁘단 말이요.  첫째, 마음이 기뻐, 지혜가 생겨, 이치를 깨달아요.  그런게 다 오게 돼 있단 말이요. 
우리 기독자는 교회 가는게 기뻐야 되겠는데 교회 가는게 감옥 가는 것보다 더 싫은 사람도 있지요?  내 총각 시절에 교회 가는게 얼마나 좋은지 늘상 교회에서 살았어.  ‘뭐 교회에 내가 할일 없나?’ 하고 늘상 교회에서 살았어.  우리가 일반적으로 좋은 면으로 생각할 때에 그거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들도 예수 믿으면서 집안 일 다해 놓고 ‘뭐 할일 없습니까?’ 하고 묻는 것도 좋지요, 안 그래요?  그거 아주 희망 있는 사람이야!  자기 일 다해 놓고 딴 사람이 일하는데 가 가지고 ‘내가 뭐 도와줄 것 없습니까?’ 하면 이거 얼마나 좋습니까?  예, 그거 사람 정신이 됐단 말이요, 안 그래요?  참, 사람 못된 것은 자기 할 일도 안하고, 남에게 미루고.  심보가 못돼 먹은 일군들이 그렇지.  자기 맡은 일은 충성스럽게, 확실히 해 놔야 되겠는데 어쨌든 시간만 넘기고, 해가 지기를 바라며 일당만 뜯어가려고 그러고, 그거는 정신 머리가 썩었어!  일반적으로 그거 뭐, 먹고 마시는 복도 누가 주겠어요?
예수님을 만나니까 그렇게 좋습니다.  그러니까 목자들이 돌아가서도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있었을까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목자들이 어떻게 좋은지 잊을 수가 없어!  주님 만난 그 기쁨이 얼마나 기쁜지.  이제 우리는 이 구주 예수 메시야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성경은 복합적인 계시입니다.  우리가 한 사건 속에서 다양적인 계시성을 여러 각도적인 면에서 이치를 끄집어내서 깨달을 수가 있다 그 말이요, 그래서 복합적이다.  하나의 역사만이 아니라 이중, 삼중의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역사를 가르쳐 주실 목적으로 역사를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오늘 날 우리들에게 갖고 오셔서 우리들을 깨우치려고 그 역사를 일으켰다 그 말이요.  나를 위해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그 뜻을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백성을 창조의 목적대로, 당신처럼 온전자로 만들어 주시고 싶어서 그 역사를 일으켰다 그 말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 한번밖에 없는 이 역사 속에서 이중, 삼중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 말이요.  하나만 깨달을게 아니고 복합적인 계시이기 때문에 다각적인 면으로 깨달을 수록 자기는 그 만큼 이치에 밝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축소시키면 내가 되고, 확대시키면 가정이 되고, 확대시키면 국가가 되고, 확대시키면 천국이 되고, 축소시키면 교회가 되고, 축소시키면 성도가 되고, 이치는 똑 같아요.  그래서 진리란 말이요.  하나님의 한 이치를 가지면 복합적으로 깨달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정신, 사상도 이치적인 정신, 사상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지 지엽적인 행동을 어떻게 하면, 뭐 이런 식으로 갖고 있으면 안된단 말이요.  정신은 이치적이지.  이치를 안 연후에 행동을 하게 되면 그거는 진리 이치에서 나온, 진리에서 나온 행동이기 때문에 그 몸과 마음이 하나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동, 활동이 될 뿐만이 아니라 사상, 정신, 신앙도 된다 그 말이요.  그 하나, 하나지요.  질적으로 하나, 하나에서 나오는 거지요, 통일이란 말이요.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님을 믿지 아니하는 이방인이요, 그의 소원, 목적은 세상 제 1 주의로 사는 자요,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하게 살다가 가느냐 하는 것이 가이사 아구스도의 소원,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다 가느냐 하는 그 소원, 목적으로 살아가는 자가 이방인이라, 또는 가이사 아구스도라!  알겠어요?  사상적으로 말하면 이방 사상, 존재적으로 말하면 가이사 아구스도라!  한 인간을 말하니까 그렇게 된단 말이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누림성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런 소원, 목적을 갖고 있다면 그건 이방 사상이라!  오늘 날 제 2의 아구스도라 그렇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 기독자들 중에는 세상 제 1 주의로 사는 이방 사상과 정신을 가진 자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가이사 아구스도는 세상 명예, 영광, 권세로 사는, 그 세상 소원 목적으로 사는 하나의 대명사입니다. 
그 세상이 말하기를, 어떤 세상이 말하기를?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세상이 말하기를, 그 사상, 정신이 말하기를, 예? ‘호적을 하라, 내 편으로 되라, 내 정신을 가져라, 나한테 소속이 되라, 내 입장이 되라, 내 명령대로 살아라’ 하니까 모든 사람들은 세상의 부귀와 명예와 영광을 구하기 위해 소원, 목적을 하고, 소속을 그렇게 하고, 자기 입장을 그렇게 세워 놓고 살아가고 있다 그 말이요.  지금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을 안 들은 사람이 있습니까?  예?  성경은 그 정신적으로 말하는 이걸 알아 들을 줄 알아야 돼요.  지금도 그 명령을 하고 있고, 우리들에게 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요셉과 마리아만큼은 자기의 고향은 베들레헴이요, 말씀의 집이요.  베들레헴=떡집이란 말이요.  말씀의 집이라!  다윗의 후손이요, 그래서 우리가 그걸 무시 못해요.  ‘어느 신학을 나왔느냐?’  ‘순복음 신학 나왔다, 성결교 신학 나왔다, 감리교 신학 나왔다, 장로교 신학 나왔다’ 그거 유심히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신학 나왔다 그러면 ‘아, 거기에서는 뭘 가르쳐 주는 노선이다’ 하는걸 생각을 하고 들어가는 거지요. 
‘네가 누구 집 자식이냐, 너의 부모가 뭐하냐, 너의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느냐?’  옛날 부모들이 자식들을 시집, 장가 보내려고 그러면 그 집안 되게 따지지요.  그거 우리가 일반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그거 이해할 줄 알아야 됩니다, 알겠어요?  우리는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볼 줄 알아야 돼요.  예‘수 믿느냐, 안 믿느냐’ 할 때에 ‘가족 전부가 예수 믿는다’ 여기서 멈출 것이 아니고 ‘믿으면 어떻게 예수 믿는 집안이냐?’ 하고 보고 들어가는 거지요, 참 중요합니다. 
마리아도 신앙의 후손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마리아가 이방인입니까?  아니지요.  요셉도 의인인데 이방 여자를 택할 리가 없지.  여러분들, 몰라서 그렇지 마태 복음 족보장을 훑어보면 맨 뒤에 누가 나오지요?  ‘예수가 나니라’ 그랬지요?  그래, 그 누구로 부터?  마리아로 부터!  그럼 그걸 족보적으로만 보면 이렇게, 이렇게 내려와서 예수가 누구로 통해서 나왔다 하는 것으로만 보이는데 마리아의 신앙 사상적으로 들어가서 보면 마리아의 그 신앙이 그 조상들의 신앙의 족보를 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그게 보여요, 알겠습니까?  그것이 보여요.
그 신앙 사상이 그렇게 오르락, 내리락 하고 할 때에 성령님께서 오시는 거에요.  찾아오시는 것, 그에게 찾아오신단 말이요.  그 신앙에서 그 진리가 탄생이 되는 거에요.  무시하면 안 돼요.  그게 보이는 거에요.  그 신앙 속에, 그 신앙의 계대 속에, 그 신앙의 사상 속에 예수님이 인간에게 오신단 말이요.  구원이 오시는 거고, 은혜가 내려지는 거고, 축복이 오는 거고, 생명이 잉태되는 거고, 그렇습니다.  중요해요, 참 중요해요.  ‘다윗의 후손이요’ - 자기 출처를 속이지를 못해요.  이게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부모님들이야, 조상들이야 예수를 모르는 부모나 조상이 많잖아요?  그러나 이제는 우리 입장에서 이 진리 알았다 그러면 알았을 때에는 자기의 족보를, 육의 족보를 강하게 생각지 말고 신앙의 족보에다가 강하게 생각을 두고 살아야지요.  왜 그 족보장에 보면 이방 여자도 이름을 올렸잖아요!  그런 면에 강하게 두고 ‘내 당대로 부터는 내가 족보를 하나님의 족보에다가 올려놔야겠다, 내 당대로 부터는 내 자식을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의 호적에 올리듯이, 입양식을 하듯이 내가 그렇게 해야 되겠다.  그리고 나부터 내 자손 대대에, 후손 영원히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내가 살도록 해야 되겠다.  내가 이거 완전히 바꾸어 놓아야 되겠다’ 하고 나가야 됩니다.
전 예수 믿을 때에 참 미련한 자랑 같지만 그 생각을 했어요.  ‘부모님이 절간에 찾아가고 하는 이걸 예수 믿고 완전히 뒤집어 놔야겠다, 우리 집 족보를 뒤집어 놔야 되겠다’  예, 이 진리 알기 전에도 내가 이 생각을 했어요.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족보에다가 내가 새롭게 올려놔야 되겠다.  육신의 족보야 육신대로 그건 가견적이니까 그건 내려오던 말던 내버려두고, 나는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족보에다가 내가 올려야 되겠다.  내 가정 후대 대대로 그렇게 되게 해야 되겠다’  그러니까 이거 개혁이지요, 완전히 개혁이지요. 
그 때 그랬기 때문에 뭐 저희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셨습니다만은 제사가 어디 있어요.  뭐 다 때려치워 버렸지요.  ‘제사 지내러 안 간다’  내가 언제 큰 집에 갔는데 마침 그 날이 제사 날이었던가 봅니다.  어릴 때 겨울에 문밖에서 발발 떨며 제사지내려면 얼마나 추워요.  예수 믿은 다음부터는  절대로 제사를 안했어요.
집안 식구가 하나님은 안 믿어도 하나님 소리를 들으면 발발 떨도록 만들어야지!  예수를 믿지는 않지만 하나님 믿는 자가 워낙 하나님이 무섭다고 벌벌 떠니까 안 믿는 자가 꿈에서라도 지옥 불에 들어가는 그런 꿈이라도 꾸게 말이요.  그렇게 만들어 버려야 돼요.  ‘하나님’ 하면 벌벌 떨게 만들어야 돼.  ‘아이구 하나님한테 벌받는다, 큰 일 난다’고 이렇게 만들어 버려야 돼요.  그런 소리를 자꾸 들어야 나중에 뭐 어떻게 하다가도 어려운, 고통스러운 사건이 탁 닥치면 ‘아, 이거 하나님이 계신가?  무섭구나’ 하는 그런 어떤 느낌이라도 들게 말이요.  사실 하나님이 무섭지 뭐.  말 잘 듣는 자에게는 그렇게 사랑스럽지만 안 듣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무섭지 뭐.
이 요셉과 마리아, 참 신앙의 두 남녀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적 하러 베들레헴으로 올라간단 말이요.  노선이 같고, 구하는게 같고, 그렇지 않아요?  그게 얼마나 복스러운 부부냐.  말하자면 참 복스러워!  그리고 또 요셉의 사상을 가만히 보면 요셉이 상당히 자상하지요.  안 그래요.  마음 깊고, 사려가 깊고, 그런 지혜가 다 어디서 나와요.  신앙 속에서 다 나오는 것 아니요?  말씀의 집으로 올라가!  다윗의 신앙 노선으로 올라가!  그 소속으로 올라가!  그 입장으로 마음이 올라가 굳어진다 그 말이요.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이 들리니까 다윗의 신앙 노선으로, 베들레헴 떡 집으로, 말씀의 집으로 올라가!  그 신앙 사상이 올라가!  멋있잖아요?  시대적 역행 아니요?  사건적으로 보면 호적 하러 올라가는 거지, 그렇지요?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니까 이건 역행이야!  신앙적으로 보니까 호적 하러 올라가는게 아니고 신앙의 노선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단 말이요.  나중에 이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을 했는지, 안했는지 모르겠어요.  왜냐?  그 밤에 애굽으로 도망을 갔으니까!  여관 방하고도 마굿간에서 자기 집에도 못 들어가고 하나님의 지시 소리를 듣고 애굽으로 도망을 갔으니까 호적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자기 동네 육신의 족보는 왜 없겠습니까마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그 명령에 의한 그 호적은 안됐단 말이요, 그 사상으로 안됐단 말이요.  그 사상의 명령에 안됐단 말이요.  안했단 말이요.  이해가 가지요?  그래서 4장에 보면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 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가는 건데, ‘유대를 향하여’  다 지역 명사이지만, 지방 이름이지만 이것이 다 신앙의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2절~4절을 보면 ‘올라간다’로 돼 있어요.  지도상으로 보면 베들레헴은 갈릴리 지방보다 남쪽입니다.  그러면 ‘내려가야 된다’고 해야 되겠는데, 지도상으로는 ‘내려간다’고 해야 되겠는데 ‘올라간다’고 한 것은 영적, 신앙적인 면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들,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간다고 그래야 말이 되겠습니까, 내려간다고 그래야 말이 되겠습니까?  올라간다고 그래야 지요, 그렇지요?  의미가 달라요.
그런데 어제 저녁에 뉴스에도 나왔지요.  이 베들레헴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넘겨준다고 그랬나?  그거는 물론 세상의 정치적인 일이지만 내 입장의 신앙 사상을 가지고 볼 때에 그건 내 주면 안된다.  그러니까 정치적이지만 이 유대인들이 내어줬다 하는 이것을 저는 신앙적인 신앙의 세계에서 우리 기독자들의 신앙의 세계를 쳐다보면서 ‘아차, 난리 났구나!’  전 그걸 보는 겁니다.  가견적인 그것을 들어서 오늘 날 영적인 신앙의 세계를 또 한번 보여주는 겁니다, 알겠어요? 
이 베들레헴 유대인들, 육적, 혈통적으로 보더라도 그래요, 다윗의 동네 아니요?  다윗이 산 동네고.  그 마리아와 요셉의 사건이 있었던, 메시야가 난 동네고 한데 그걸 왜 내 주느냐 그 말이요.  이 유대인들이 내줘서는 안된다.  그런데 내 주는 지도자들이 누구였지?  평화를 부르짖는 자였어요.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나라 땅을 지키겠다고 하는 그 자들입니까?  어쨌든 평화를 부르짖는 자였지요.  그런데 어느 청년이 죽였지?  그거 내 준다고 자기 나라 지도자를 죽였잖아요. 
정치적으로야, 세상 법으로야 그건 일반적으로 범죄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 볼 때에 분명히 그 청년은 하나님으로 부터 조상들에게 허락한 땅이란 말이요.  그러니까 내 줘선 안 되지요.  가견적인 면으로 볼 때에 그래요. 
그걸 우리 신앙의 세계에서 볼 때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 이건 누리라고 준 것이 아니고 구원을 이루라고 한 거란 말이요.  구원을 이루라고 한 이것을 남에게 빼앗기면 안 돼요, 알겠어요?  욕심이 있어야 돼요.  절대로 남에게 빼앗기면 자기의 구원은 망쳐 버려요.  비록 세상적인, 정치적인 일이지만 ‘이게 지금 신앙의 세계에서 뭘 얘기해 주고 있구나!’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줄 알아야 됩니다.  이게 보통 의미가 아니다, 알겠어요?
그리고 신앙 사상적으로 이 베들레헴을 내줬다는 면을, 좀 억지 해석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중요한 이 말씀을 내 줬다.  왜 내줬느냐?  평화를 부르짖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건 세상인지, 기독자의 사상인지 모르는 거지요.  오늘 날 그거 보이잖아요?  부르짖는게 전부 그거 아니요?  세상의 어떤 ‘평화, 평화!’ 부르짖는 것 아니요? 
여기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에게 평화로다’ 하는 이 성경 구절 가지고 아마 오늘 온 교회가 예배 시간에 설교 메시지 본문으로 많이 써먹을 거야!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하면 이거는 택자들이란 말이요.  불신자까지 포함한게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 돼요.  우리의 부르짖음은 세상의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안에서의 평화, 그게 진정한 평화요, 참 평화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부르짖는 평화는 하나님을 중보자로 두고, 가운데 세우고 평화입니까?  하나님을 빼내버린 평화는 마귀가 얼마든지 장난을 치는 거고, 평화는 없는 겁니다.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없어요.  그걸 알아야 돼요.  세상은 마지막 그 날까지 구석 구석이 정치적인 전쟁이요, 식량 전쟁이요, 늘 싸움이에요.  성경은 그 말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을 떼네 버린 평화는 없어요.
만일에 그게 세상으로 평화,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지!  뭐 하러 예수가 와.  이질적인 평화, 세상적인 인본주의 평화, 그건 하나님 앞에 옳은게 아니요.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는 그래야 돼.  안 믿는 세계에서는 그래야 돼.  안 그러면 어떻게 할거냐?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눈이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줄 알아야 되고 불신 세계의 그 입장에서도 볼 줄 알아야 되고.  ‘거기 들어가라’ 그게 아니고 제 3자적 입장에서 이면도 볼 줄 알아야 된다.  그러나 기독자 자기는 하나님의 척도를 가지고 살아야지!  하나님의 척도를 안 가지면 그렇게 또 안 보여요.  우리는 그게 보여야 돼요.

기도 올립시다.
사랑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날 속화된 종교계와 불신, 타락된, 영이 죽어 있는 이 불신 세계는 가견적인, 가식적인 면에서, 눈에 보이는 면에서 행복을 찾고, 기쁨을 찾고, 오늘 날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교회들이 다 예수 오심을 기념하고, 찬송하는 것도 세상적인 개념에서 평화를 부르짖고, 예수님을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깨달았습니다.  이 예수님의 탄생, 이 사건이 절기적인 25일 날만의 사건이 아니고 그 사건을 들어 일으켜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참 사건이 있기 때문에 그 사건을 들어 깨닫게 해 주시려고 주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는데 하나님 아버지!  이 말씀이 절기적인 바람을 타는 것이 아니고 언제든지 우리 기독자들에게 가져야할 영적 신앙 사상 인줄 압니다. 
저희들은 항상 가이사 아구스도, 이 세상 명령이 언제든지 있는 것인데 하나님 아버지!  늘 우리는 분초 찰나 순간마다 다윗의 신앙 노선으로, 말씀의 떡집으로,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는 전무후무한 요셉과 마리아가 메시야 탄생을 한 것처럼 두 부부의 그 신앙 사상을 가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만들어 주시고, 또한 그러한 신앙 사상 속에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 잉태가 된다고 하는 것을 저희들은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발견한 대로, 깨달은 대로, 그 신앙의 이치대로 살아가는 복된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당신의 백성과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같이할 지어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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