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 슥 9:9~12 (눅 19:37~40)

  • 잡초 잡초
  • 278
  • 0

첨부 1


제목 :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본문 : 스가랴 9:9~12 (누가복음 19:37~40 참조)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많은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을 겪게 마련인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인생을 고해, 즉 고통의 바다와 같다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겪게 되는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일까요? 아니면 사업의 실패로 빚더미에 올라 앉는 것일까요? 물론 다른 여러 가지 어려움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각각 그 느낌이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참기 어려운 고통들은 대체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공통점이란 바로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희망만 잃지 않으면 그래도 견딜 만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희망이 있으면 그 시련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희망 없는 고통, 바로 그 절망이 참으로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누군가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바로 그런 절망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고 낯선 땅에 포로로 잡현간 지 7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고향은 더 이상 꿈에 그리던 그 고향이 아닙니다. 무너져 내린 예루살렘 성벽은 흉칙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 폐허가 되다시피 한 예루살렘 성전은 참으로 황량할 따름입니다. 도시 전체가 잡초와 가시덤불로 뒤덮이고 온통 들짐승의 거처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까? 백성들의 마음을 추스르고 서로 위로하며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할 터인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민심은 흩어지고 국론은 분열되었습니다. 그런 중에 어렵게 시작한 성전 재건 사업은 기초도 다지지 못한 채 중단 위기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으로 민족의 분열을 극복하고 흩어진 민심을 모으고 힘을 합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까? 과연 그들이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설 수 있는 희망은 있는 것입니까?

  선지자 스가랴는 바로 그런 절망의 자리에서 환상을 봤습니다.(슥 2:1~5) 그가 고개를 들어 보니 손에 측량줄을 가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묻습니다. “네가 어디로 가느냐?” 그 사람이 대답합니다.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무슨 말입니까? 그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측량하러 간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측량을 합니까? 어떤 공사든지 하기 전에 먼저 측량부터 하지 않습니까? 성벽을 쌓거나 건물을 짓기 전에 먼저 땅부터 측량해야 합니다. 측량은 건축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예루살렘을 측량하러 간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건축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써 건축을 시작하셨습니다. 절망한 백성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시작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황폐하여 거기 아무도 살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황폐함이 너무 심해서 손을 댈 수조차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일에 이미 착수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그 일에 착수하셨는데 누가 과연 방해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천사가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 황폐한 성 안에 사람과 짐승이 매우 많아져서 성벽을 두를 수 없을 만큼 예루살렘이 커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친히 예루살렘의 불 성벽이 되셔서 지키실 것이라고 그 천사가 말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누가 감히 하나님의 불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까?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재건되는 예루살렘에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계셔서 그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그 천사가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토록 확고한 의지를 보여 주시는데 뭐가 더 필요합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그 일을 시작하셨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비록 예루살렘은 황폐하고 또 백성들에게는 아무 힘도 없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로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희망의 출처는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그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셨는데 왜 우리가 절망합니까? 바로 그 희망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희망을 하나님께 둔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연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들이 과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돌아와야 합니다. 선지자 스가랴는 자기에게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돌아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스가랴 1장 3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돌아가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흩어져 살고 있는 땅으로부터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슥 2:7) 그들은 아무 희망도 없는 그 땅에서 돌아와야 합니다. 현실과 타협하여 살고 있는 그 땅에서 돌아와야 합니다. 그 땅을 박차고 일어나 돌아와야 합니다. 그 땅으로부터 도망쳐야 합니다.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들의 귀환을 결코 고레스 왕이 주는 은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귀환은 히브리 노예들이 애굽을 탈출했던 것과 같은 것이요, 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다만 약속만을 믿고 고향 땅을 떠났던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하여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으로부터 속히 빠져 나와야 합니다. 독수리를 잡아 새장 안에 가둬 기르면 오래지 않아서 나는 법을 잊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길들여진 독수리는 날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되고, 마침내 날개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포로 생활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습니다. 마치 바벨론을 영원히 머물 집처럼 생각하고 거기 그냥 주저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거기 그냥 머물면 아니 됩니다. 그 옛날 그들의 선조 히브리 노예들이 애굽에서 노예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떠났던 것처럼 이제 그들도 바벨론의 멍에를 부숴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입니다. 비록 예루살렘이 황폐해서 사람이 살 곳이 못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영광을 회복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아가야 합니다.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불신의 자리에서 벗어나 믿음을 향해서 떠나야 합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희망을 향해서 떠나야 합니다. 불순종의 노예의 사슬을 벗어 던지고 순종하는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 둘째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일찍이 선지자 스가랴는 장차 예루살렘에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했습니다. 그 메시야는 제국의 지배자들과는 달리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분명히 예언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를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던 그 메시야를 누가 맞이했습니까? 당시 예루살렘은 메시야를 맞을 준비가 거의 완벽했습니다. 성전은 헤롯 대왕에 의해서 멋지게 재건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보다 그 규모가 갑절이나 컸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성전의 위용을 보고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스가랴가 그 모습을 봤더라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그렇게 멋진 성전에 일찍이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그런데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은 그 메시야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이 호산나를 부르며 환호할 때 저들은 그들을 꾸짖으라고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과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손뼉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처럼 이제 우리도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생각이 지배하는 자리에 그냥 앉아서 주님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그 옛날 저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과 같은 어리석은 기다림은 결코 올바른 기다림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은 감람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문을 봉해 놓고 있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그 문으로 거짓 메시야가 들어오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게 하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예루살렘과 메시야의 엇박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웃지 못할 코메디가 다만 예루살렘에서만 벌어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교회는 과연 누구를 기다리며 또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만약 주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면 과연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 같습니까? 오늘 교회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재건하고 있는 것이 혹시 예루살렘이 아니라 또 다른 바벨론 제국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일이 실망스럽습니까? 나라의 앞날도 별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마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매우 절망적입니다.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바로 새로운 희망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 산행에서 참으로 놀라운 것을 봤습니다. 낙엽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 끝에 이미 작은 새 싹이 돋아나 있는 것을 봤습니다. 또 다시 푸르른 계절을 가져다 주는 것은 낙엽이 떨어진 자리 마다 다시 돋아난 아주 작은 새 싹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미 주님이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주님이 왕으로 오십니다! 사랑과 평화의 왕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여러분의 삶의 진짜 주인으로 모심으로 말미암아 그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지금 여기서부터 마음껏 누리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