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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 마 2: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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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 없는 사람들> 마 2:13-18
새문안교회 2003.12. 7 주일예배


오늘 본문은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아기 예수를 그의 부모가 밤에 급히 애굽으로 피신시킨 일과 이어서 발생한 어린이대학살의 참극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사건의 원흉은 헤롯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이로서 하나님께서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미 오래 전부터 예언하신 메시야였습니다. 따라서 온 이스라엘 백성은 그의 오심을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탄생은 그 기다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고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서 모든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야의 탄생소식을 듣고 기뻐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메시야의 오심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에 대한 기다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헤롯 왕입니다.

헤롯은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선조에 관해서는 에돔사람이었다는 것 외에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헤롯 가문은 일찍이 갈릴리와 유대 등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헤롯, 즉 헤롯1세 또는 대헤롯이라 불리는 헤롯은 밖으로는 로마의 실권자들이 바뀔 때마다 아부와 충성다짐과 탁월한 설득력으로, 안으로는 무자비한 숙청과 효과적인 반란진압으로 로마의 신임을 얻어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그의 지배권을 확보하고 확대하며 철권통치를 통해 그의 지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이 병들어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가족 안에서의 권력투쟁이 일어나 그의 통치권이 흔들릴 마당에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찾아와 묻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2절) 했던 것입니다. 굴종과 흥정과 계략 등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해 다져놓은 그의 왕권에 도전하는 새 왕이 태어났다는 말은 그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의 평생의 대업이 일시에 위협받고 수십 년 동안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3절) 한 것은 이해가 되고도 남는 것입니다. 여기서 헤롯과 더불어 소동했다는 온 예루살렘은 예루살렘 안에 살던 모든 유대인들이라기보다는 헤롯에 붙어서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있던 그의 모든 수하들을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그저 "소동했다"는 것은 약한 표현입니다. 헤롯은 경악하고 극도의 불안과 위협감에 사로잡혔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를 상대로 거래하며 자신의 왕국을 세워온 관록의 헤롯이었습니다. 순순히 물러날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민하게 대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절반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에 관해서 더러 들어 알고 있는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문제해결의 첫 조치가 메시야가 어디서 나올 것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찾아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4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것이 유대 베들레헴일 것이라고 헤롯에게 알려주었습니다(5-6절). 헤롯은 이제 베들레헴의 어디일지를 더 정확하게 알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을 가만히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는(7절) 그들에게 헤롯 특유의 속임수로 말하기를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8절) 하며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냈습니다. 자칫하면 헤롯의 덫에 걸려 아기 예수가 살해당할지 모르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갓 태어난 아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어처구니없고 불가능한 일을 획책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참살당하도록 그냥 계실 리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그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이루시기 전에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방박사들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셨고, 그들은 다른 길로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12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동방박사들이 떠난 후에 이번에는 아기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어라" 말씀하셨습니다(13절).

요셉은 즉시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갔습니다(14절). 이렇게 헤롯이 예수님을 잡기 위하여 설치한 덫을 하나님께서는 가볍게 들어올리심으로써 그의 계략이 허사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능란한 처세술과 계략으로 수십 년간 난공불락의 왕국을 구축해온 헤롯이 겪은 가장 큰 실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실패는 천인공노할 흉악한 범죄를 자행하는 또 하나의 실패로 이어졌습니다. 즉 동방박사들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길로 이미 돌아가 버린 사실을 알게 된 헤롯은 격노해서 수하의 군사들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들 중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인 아이들을 다 죽이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끔찍한 희생을 양산해내고서도 헤롯은 화가 풀리지 않았을 것이고 유대의 왕이 나셨다는 첫 소식의 충격과 함께 그의 왕권에 대한 미래의 도전자를 확실하게 찾아내 제거하지 못한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두 해쯤 후에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구원자를 기다림이 없는 자가 행하는 모든 일은 허사가 될 뿐 아니라 엄청난 비극을 만들어낼 뿐임을 우리는 이 불행한 역사를 통하여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바로 섬기지도 않으며 세상적 탐욕을 따라 사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심이 없거나 또는 이를 적대시하며 결국은 그를 저지하거나 제거하는 일을 벌이다가 자신과 많은 생명을 파멸로 이끌어가고 마는 것임을 우리는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헤롯의 폭거는 역사의 주인이시고 의로운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원대하고 영원한 구원사역에 반기를 드는 모든 악한 세력을 결코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응징하심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헤롯의 이야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림이 없었던 또 한 무리들이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헤롯의 긴급호출을 받고 모였던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예언서 연구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지도자들이고 신앙의 교사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마땅히 이스라엘 민족의 숙원이고 대망의 대상인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관심을 가지고 역사적 상황의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뜻밖에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의 탄생소식을 뒤늦게 듣긴 했어도 당연히 그 소식에 환호하며 곧바로 그 아기를 찾아 나섰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왠지 소극적이고 미온적이었던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들은 헤롯의 호출을 받고 모여 그로부터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하는 질문을 받고서야(4절) 비로소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메시야의 오심에 관하여 지식적으로는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람들 같고, 남의 일에 대해 말하듯이 태연히 대답할 뿐 그 일로 인하여 흥분하거나 빨리 그 아기 메시야를 영접하거나 확인하러 나서려는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이 놀라울 정도의 무관심과 미온적 반응은 그들과는 여러 점에서 많이 달랐던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 반응과 대조해볼 때에 더욱 뚜렷해집니다. 이들은 밤에 밖에서 양을 치던 한 떼의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주의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10-12) 하고 떠나자, 서로 말하기를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눅2:15) 하고는, 즉시 달려가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했으며(눅2:16-17),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렸던 것입니다(눅2:20).

천하게 여겨지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던 목자들의 열광과 고위성직자이고 지도자였던 자들의 무관심과 미온적 반응, 이 얼마나 역설적인 대조입니까? 이에 대해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하여 지식은 갖고 있었으나 간절한 기다림이 없었던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헤롯 치하에서 백성들에 대한 영향력과 지배권을 일정 부분 나누어 받고 누리는 동안 그 상황에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생각됩니다. 그뿐 아니라 어쩌면 진정한 주권자인 메시야가 온다면 그때까지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그 모든 권세와 명예와 특혜를 다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을 상실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그로부터 30년 후 장성하신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의 구원사역을 펼치기 시작하시자 그에게 종교적 주도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했으며, 그래서 그를 경계하고 견제하며 그를 흠집 내고 비방하며 급기야는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이방세속권력을 비롯한 모든 종교세력들과 결탁하여 끝내 그들의 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장본인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메시야 대망신앙의 자연적 소유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에 대한 진정한 기다림이 없었던 그들은 세속권력자 헤롯의 협력자들로 전락했을 뿐 아니라 헤롯보다 더한 범죄자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 각자는 한번 스스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진정한 기다림이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오신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즉시 그를 찾아 나서고 그의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던 목자들의 흥분과 열광이 과연 나에게 있는가?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 그건 바로 나를 가리키는 말은 아닌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냉냉한 지식의 소유자일 뿐 그 간절한 기다림이 없었던 사람들, 이 세상에서의 일정한 영향력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상황에 만족하고 안주하며 진정한 주권자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결국은 세속권력과 결탁하여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장본인들, 그들이 실상은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냉철하게 되짚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다림을 가져야 합니다. 뜨겁게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한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만이 오늘날 우리의 사회와 나라와 민족을 구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찾아야 합니다. 찾고 전해야 합니다. 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며 전해야 합니다. 이 기다림과 찾음과 전함이 없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헤롯당이거나 헤롯에 빌붙어 사는 거짓 신앙인일 뿐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힘과 명예와 부와 즐거움에 취하여 현실에 안주하고 세속권력과 적당히 타협하며 지내느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다 잃고 지낸다면 결국은 그를 반대하고 그의 오심을 방해하며 그를 비방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그저 그리스도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강절 둘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그를 기다리고 찾고 전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고 분명하게 하며 확고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다림은 우리의 믿음이요 소망이고, 우리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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