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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벨탑의 교훈 / 창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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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바벨탑의 교훈
본문 : 창세기 11장 1절~9절

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
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
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6 여호와께서 가라사
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
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
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
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
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괴짜들이 많았습니다. 늘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어떤 학
생은 가방에다가 “영어와 독일어와 한문은 본국으로 추방하자!!” 표어를 달고 다녔
습니다. 영어 공부하기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표어를 크게 써 가지고 다녔겠습니
까? 우리가 영어를 공부해야 되고, 독일어를 공부해야 되고, 한자를 공부해야 된 이유
는 창세기 11장에 있는 바벨탑 사건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 인간의 언어는 한가지였습니다. 무슨 언어인지는 몰라 한 가지 말로 인간
이 다 통하고 있었지만, 창세기 11장 이후로 우리는 참 괴로운 시절을 맞게 되었습니
다. 그런데 언어가 혼란된 것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이 죄를 짓기 때문에 죄를 방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지금 영국, 미국, 한국, 일본, 중국, 다 한 가지 언어를 쓴다고 생각해 보세
요. 지금보다 죄가 100배는 더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언어 혼잡 사건이 바로 창세기 
11장에 시작되었습니다. 
노아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습니다. 우리 황인종의 조상이 된 장남은 ‘셈’이었습니
다. 셈에게는 하나님께서 영권을 주셨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종교가 너희로부터 
나올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동양인 셈족으로부터 결국 유대교도 나오고 기독교
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막내 이름이 ‘야벳’인데, “야벳이 창대케 되리라”
해서 물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백인종이 물권을 받아서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는 이름이 ‘함’입니다. 함이 제 5계명을 범하고, 아버지
를 수치를 덮어주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수치를 형제들에게 다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함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의 후손은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
하노라” 그래서 흑인종은 결국 노예 생활을 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삶을 살아왔
다 하는 것을 역사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일이 있은 후 노아의 세 아들이 자손의 
자손을 낳고 번창해 갑니다. 그러자 노아는 “함아 너는 여기 살아라. 셈아 너는 여
기 살아라. 야벳아 너는 여기 살아라” 해서 각 지방과 나라를 나누었습니다. 지방과 
나라가 나누어지다보니 노아의 세 아들의 후손들이 생각해 보니까 “이러다가는 우리
가 흩어지겠구나” 해서 이들이 단합대회를 열었습니다. “우리가 흩어지지 말고 한 
군데 모여서 살자” 그래서 모여서 살 만한 땅을 찾으려고 동방으로 이동하는 중 ‘시
날평야’를 만납니다. 이 시날평야에서 ‘헤어지지 말고 뭉쳐서 살자’, ‘뭉치면 살
고 헤어지면 죽는다’ 6∙25 이후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들은 표어입니까? 노아의 후손
들이 뭉쳐서 살면 더 평안하고, 더 안전하고, 더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고 시날 평지
에 뭉쳐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날 평지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아십니
까? 창세기 10장을 보면 셈의 후손과 함의 후손과 야벳의 후손이 나오고 있는데, 6절
부터 보니까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구스의 아들은 스바
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8절이 중
요합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영걸英傑, 영
걸이 젊은 여자라는 뜻이 아니고, 영웅호걸을 줄여서 영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니
므롯이 영걸이었습니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
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니므롯이 얼마
나 영걸인지 세상에 호가 났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사냥도 잘 하고, 스포츠도 잘 하
고, 일도 잘하고 하면 ‘꼭 니므롯 같다’라고 합니다. 니므롯이 영걸의 대명사가 됐
습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
었으며” 니므롯이 살던 곳이 시날 땅이었습니다. 이 시날 땅에서 토박이로 박힌 돌
이 되어서 산 사람이 함의 후손 니므롯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시날 평야에 우리가 흩
어지지 말고 뭉쳐서 살자”하는 이 가족단합 대회의 주동 인물이 누구냐, 우리는 함
의 후손, 저주받은 함의 후손 가운데 영웅호걸인 니므롯이라고 추측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땅이 니므롯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니므롯이 주동이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거기서 뭉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니므롯 같은 사람이 만약
에 21세기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위대한 스포츠맨이 됐을 것입니다. 그래
서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도 땄을 것이고, 유명해졌을 것이고, 잘 생겼을 것이고, 돈
도 많이 벌었을 것이고, 여자도 많이 따랐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반골 기질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사람이 저주
받은 반열에 속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와 실력은 외모에 있지 않
습니다. 사람의 진정한 실력과 가치는 그 사람이 영웅호걸인지, 잘 생겼는지, 못 생겼
는지, 성공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영웅호걸이라고 
평가될지라도 하나님으로 부요치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하나님을 향해서 
반골 기질을 가진 사람은 불쌍하고, 가련한 인물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그가 높은 위
치에 있거나 큰 권위를 지니고 있거나 부유하다고해도 하나님을 향해서 반역하고 있
는 사람은 가련한 사람이요, 기도해 주고며 불쌍히 여기고 “지옥 가지 마시오!” 권
면을 해 줄 대상이지 우리가 존경하거나 위대하다고 평가할 인물은 못 된다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사라의 참된 가치와 실력은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과 관련이 되어 있느
냐,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사람이냐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됐느냐, 거기에 그 사람의 진정
한 가치와 실력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니므롯은 세상에서 보면 영웅호걸이지만 하나
님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물은 하나님이 무시하십니
다. 명함에다가 프로파일 길게 새겨 다니고, “내가 이런 사람이요!” 그래도 하나님
은 “그래도 내가 보기엔 넌 아무것도 아니야!”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 되는 것은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입니다. 함의 후손 니므롯이 주동이 되어
가지고 똘똘 뭉쳐서 이들이 결의한 내용이 11장 4절에 나와 있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
을 면하자 하였더니”이들이 모여서 결의한 내용은“시날 평지에 성과 대를 쌓자”였
습니다. 성은 City, 대는 Tower입니다. 도시와 탑을 만들자. 파리같은 도시를 만들
고, 에펠탑같은 탑을 만들자.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단을 쌓을 때에는 가공하
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라고 했는데 시날 평지가 평지가 되다 보니까 가공 안 된 자
연석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아하, 여기는 보니까 진흙이 많구나. 진흙을 뭉쳐
서 벽돌을 만들고, 벽돌과 벽돌은 역청을 넣어야 하지만 진흙을 넣어서 쌓자’해서 이
들이 대를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이 만든 것이 ‘바벨’이라고 하는 도시였습니
다. 도시의 기원은 성경적으로 볼 때에 죄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장 17절
에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도시
를 맨 처음 만든 사람은 자기 아우 아벨을 죽인 가인입니다. 가인이 도시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이런 바벨의 창시자는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 니므롯과 그 일당이었습
니다. 그러므로 도시의 기원은 죄와 연관이 되어 있어 죄가 많은것 같습니다. 시골은 
아무래도 죄가 적지 않습니까?
농사 짓고 밤에 피곤해서 들어가 자는데 무슨 죄 짓을 게 있겠어요.
술집도 없고, 다방도 없고, 노래방도 없고, 근데 요새는 시골에도 들어가서 난리 치는
데 요새는 시골도 믿을 수가 없게 됐습니다.
이 도시는 죄 지은 사람들이 숨을 곳이 많아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도시에 사는 우리들은 죄에 대해 더 큰 면역력을 가지고 살아야 될 줄
로 믿습니다. 
이들이 ‘성과 대를 쌓자’ 그랬는데 왜 쌓자 그랬습니까?
동기가 뭡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노아 홍수로 한 번 멸망시키셨으니까 이제 홍수가 나도 죽
지 않도록 탑을 쌓아서 꼭대기에 올라가서 쌓자’는 동기를 쌓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데 그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꼭대기에 올라가 봐야 몇 명이나 올라갑니까?
거기 올라가려고 쌓습니까?
또 홍수가 나서 죽지 않으려면 산 꼭대기에 쌓지 왜 평야에다 쌓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인류에게, 창세기 9장에 보면 물로는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언약
을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홍수가 오고, 매미가 오고, 잠자리가 오고, 다 와도, 이제는 물
로는 인류가 멸망하지를 않습니다. 
아멘.
그 증거로 하늘에 하나님이 무지개를 주셨어요.
일곱가지 색이 영롱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시인 윌리암 워즈워스처럼 ‘내가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
은 뛰노라’ 왜냐, 하나님이 물로는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생각하기 때
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물 심판은 안 하시지만 이제 한 가지 더 남았습니다.
무슨 심판 남았습니까?
불 심팜이 남았어요.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언젠가는 불로 쓸어버릴 것이다. 하늘도 불로 날아가고, 땅도 불로 다 절
단날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로 다 타 버릴 것에 우리 인생을 다 버리지 말고 불에도 살아 남을 
영원한 하늘 나라를 위해서 우리의 삶을 투자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노아의 후손들이 도시의 탑에 건설한 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4절에 있는 데로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해 보자’.
‘하늘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데 하늘에 높이 쌓아서 닿게 해 보자’.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 맞먹어 보자.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다 그 말이에요.
‘아침의 아들’이라고 하는 천사가 있습니다. 
이름은 루시퍼입니다. 
계명성이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호위대 천사였어요.
그런데 이 계명성이 마음속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사야서 14장 14절에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내
가 하나님하고 한 번 비겨보리라’ 무슨 뜻이에요?
‘맞먹어 보리라’.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하늘에서 떨어져서 마귀, 귀신, 바알세블, 파리의 왕이 되어 버렸습니다.
땅에 찍힌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게 사람 몸에 들어가서 병이나 일으키고, 돼지 속에나 들어가고, 이런 더러운 귀신
이 되고 말았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도전의 대상이 아닙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고도 하나님을 도전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두 번째 동기가 뭡니까?
‘우리 이름을 내자’.
사람이 무슨 일을 하면 ‘내 이름을 내자’. 
노아의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을 높이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
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이런 동기로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런 동기가 아닙니다. 
‘내 이름을 높이고, 우리 이름을 높이고, 인간을 높이자!’ 
이게 뭐냐하면, 철저한 인본주의라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바벨탑이 건설이 다 안 된 것입니다.

셋째로는, 4절 후반에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온 땅에 흩어져서 충만하게 살으라고 하셨는데 이 인간들이 무엇을 열었
습니까?
단합대회를 열었습니다. 
소주 마셔가면서 ‘위하여, 위하여!’.
단합대회할 때 위하여는 무엇을 위하는지.
그런데 단합대회 좋아요.
단합해야 살죠.
그런데 하나님은 쏙 빼 놓고 인간 중심의 단합만 했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을 왕따 시키고 인간끼리 단합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탑을 쌓은 동기는 세 가지인데,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하나님을 무시하
거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악된 동기들 뿐이었다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중요하고도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이것이 지
금 누구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냐, 내 이름을 높이는 것이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냐,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은 세 가지로 심판을 하십니다.
인간들이 하나님 쏙 빼 놓고 단합대회를 해도 하는 일이 잘 됩니다. 
말이 잘 통하니까, “야, 벽돌 쌓아라. 동쪽에 쌓아라. 서쪽에 쌓아라. 야, 그 쪽에 
벽돌 비뚤어졌다” 하면서 잘 쌓아갑니다. 
바벨탑이 형통하게 올라갑니다.
그런데 인간의 형통함도 종류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 없는 형통이 있고, 하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형통함이 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형통하는 것은 조만간 풍랑 만날 형통입니다.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데도 다시스로 도망가는데 마침 배가 있
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배 밑창에서 낮잠 자고,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만은, 어떻
게 됩니까?
풍랑이 일어나서 결국 누워서 낮잠도 못 자고, 선원들이 내려와서 “자는 자여! 어찜
이뇨?” 잠 다 깨워놓고, 결국은 바다에 던지워가지고 고기밥 되는 신세가 되지 않습
니까.
‘하나님 없이 하는 데도 다 잘 되네. 나는 기도도 안 하고, 하나님께 예배도 안 드리
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일을 시작했는데 잘 되네’.
조금 있으면 풍랑 만날 겁니다.
하나님 없는 형통은 풍랑 만나거나 하다가 중지되거나 하는 것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형통해도 꼭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형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대만에 갔을 때 보니까 대만에 있는 사람들은 우상 숭배를 심하게 합니다.
물건을 사러 가도 “이거 주세요” 해도 듣지도 않아요.
조그마한 상자를 만들어 놓고, 벽장에 놓고, 문 열고 거기다 빌고 난리가 났어요.
아침에 10분은 그렇게 하는 것 같더라구요.
손님이 와도 신경도 안 씁니다.
우상, 말도 못하는 우상, 도끼로 찍어도 꼼짝 못하는 우상과도 이렇게 정성을 다해서 
동행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아멘.
우리 만사가 형통하는 것은 좋은데 하나님과 형통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 없는 형통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조만간 풍랑 만날 형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7절에 보니까 내려오십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자’.
여호와 하나님이 한 분이신데 어떻게 ‘우리가 내려가자’ 복수로 쓰였느냐?
하나님은 한 분이면서 복수성을 가진 분이에요.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 분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이제 의논하시고 내려오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혹은 ‘제호바’라고 말을 하지만 히브리 
말로는 ‘엘로힘’이라고도 합니다.
엘로힘, 임자가 붙은 것은 히브리 말로 복수에요.
하나님은 이름 자체가 한 분이면서 복수성을 포함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세 가지로 심판을 하십니다.
첫째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했다.
서로 알아들을 수 없게 됐습니다. 
밑에서 중국어로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위에서 독일어로 말을 합니다. 
그 말을 듣던 셈의 후손 하나가 ‘모르겄는데?’라고 말합니다.
말이 안 통하니까 벽돌이 잘 안 쌓이게 됐습니다.
갑론을박하게 된 것입니다. 
의사가 분산되고 통일성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이 때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영어 공부를 해야 되는 고통을 안게 됐다 그 말입
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온 지면에 그 인류를 흩어 버리셨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했는데 이제는 ‘하나님 없는 단합대회 그만하고 흩어져라!’ 그래서 
다 흩어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또 어떻게 됐습니까?
8절에 보니까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성 쌓는 일이 그만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처음엔 잘 되는 것 같았는데 중단되고 말았어요.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사업을 해도 처음에는 잘 됩니다.
가서 고스톱을 해 보세요.
처음에는 딸 겁니다. 
나중에는 엎어 써서 다 뺏기고, 털리고 오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 형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요.
나중까지 형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잠언 21장 30절에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 그
랬어요.
하나님 하고는 지혜로도 안 되고, 싸움으로도 안 되고, 명철로도 안 되고, 바둑을 둬
도 안 되고, 장기를 둬도 안 되고,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이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을 심판하시는데, 이 악이 어지간한 악이나 죄는 심판을 금방금방
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죄 지으세요.
주일 자꾸 빼 잡수시고, 지어 보세요.
주일날도 놀러 가시고.
그래도 별 일 없을 걸요.
하나님은 어지간한 죄나 악에는 별로 그렇게 처음부터 심판 탁탁 내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드디어 하늘에 쌓이는 날이 되면 그 때는 하
나님이 임하시고 인생 막대기와 사람 채찍으로 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세 번 반성해야 될 존재입니다.
인간은 세 번 반성해야 될 존재라 그랬습니다. 
석 삼에, 반성할 성자, 삼성.
세 번 반성하는 삼성, 한 번 시작할 때 반성하는 겁니다.
‘내가 이 일이 어떤 동기로 시작하고 있느냐’.
또 이 일이 잘 되고 형통하면 반성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며 형통하고 있느냐’.
그리고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아하, 내가 뭔가 잘못된 것이 있느냐’ 이
렇게 세 가지를 반성하라 그랬어요.
시작할 때 반성하고, 형통할 때 반성하고, 문제가 있을 때 반성하고.
이렇게 삼성의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와 동행하는 삶은 영원토록 지속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 삼성의 삶을 사심으로 이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형통하는 삶이 되시
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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